민족사랑

일제 때 ‘25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유달리 성행했던 이유는? 사반세기(四半世紀)라는 표현을 남겨놓은 그들의 언어습성

2139

[식민지비망록 81]

일제 때 ‘25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유달리 성행했던 이유는?

사반세기(四半世紀)라는 표현을 남겨놓은 그들의 언어습성

이순우 책임연구원

세화(歲華, 세월)가 전(轉)하여 자(玆)에 소화 병자(昭和 丙子)의 신춘(新春)을 영(迎)함에 당(當)하여 공손(恭遜)히 동방(東方)을 배(拜)하고 황실(皇室)의 어미영(御彌榮, 고이야사카)을 봉축(奉祝)하여 성세(盛世)의 경(慶)을 봉송(奉頌)하는 바이다.
이토 슘보공(伊藤春畝公, 이토 히로부미 공작)의 시(詩)에 ‘부상근역일가춘(扶桑槿域一家春; 일본과 한국이 한집을 이뤄 봄이로다)’의 구(句)가 있어 과연(果然) 내선(內鮮)의 동융(同融)이 비년(比年) 익익심각(益益深刻)하여 일가집목(一家輯睦)의 환희(歡喜)가 창일(漲溢)하면서 다시 춘수(春首)가 회래(回來)하였으니 진실(眞實)로 이이연(怡怡然)하여 강산삼천리(江山三千里)의 신색(新色)을 찬미(讚美) 아니 할 수 없다. 금년(今年)은 아조선(我朝鮮)에 대(對)하여 특수(特殊)의 의의(意義)를 유(有)한 연(年)이다. 즉(即) 작추(昨秋) 10월(月) 총독부(總督府)에서는 시정 이십오주년 기념식전(始政 廿五周年 記念式典)을 거행(擧行)하였으므로써 통치사상(統治史上)의 일획기(一劃期)가 되는 대취지(大取旨)를 천하(天下)에 선(宣)하였다. 그리고 금년(今年)은 총독정치(總督政治)가 기 사명완성(其 使命完成)을 기(期)하여 진(進)할 소위(所謂) 제2 사반세기(第二 四半世紀)의 제1년(第一年)이어서 신행정(新行政)의 제일보(第一步)를 의미(意味)하는 연(年)이다. …… (하략)

이 내용은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마이다 정무총감(今井田 政務總監)의 신년사 한 토막이다. 여기에는 식민통치 사반세기(四半世紀), 즉 25년의 기간이 일단락되고 다시 새로운 ‘제2의 사반세기’가 시작되는 뜻 깊은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취지가 서술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에도 나와 있다시피 일제는 1935년 10월 1일의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 조선총독부 관제의 제정과 더불어 정식으로 출범한 날)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식전을 마련하는 한편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정 25주년 기념사업’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1. 시정25주년 기념식(총독부 신청사 동쪽 광장)
2. 공적자, 효자, 절부, 의복(義僕) 표창(기념식장에서 집행)
3. 물고(物故)공로자 및 순직자 초혼제(경복궁 근정전)
4. 시정25주년 기념축하회(경복궁 경회루)
5.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의 출판
6. 기념회엽서(記念繪葉書; 통계엽서)의 발행
7. 시정25주년기념 종합박물관(경복궁 건청궁 터)

이 가운데 <시정이십오년사(施政二十五年史)>(1935)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역대 조선총독들의 통치연혁과 치적을 시대순으로 집대성하여 펴낸 최초의 간행물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왜 20주년이나 30주년과 같은 10년 단위도 아니고 하필이면 글자 그대로 ‘어중간(於中間)’한 25주년의 기념행사를 이처럼 성대하게 치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매일신보> 1936년 8월 19일자에 수록된 우가키전임 총독의 치적 관련 연재기사에는 ‘사반세기’와 ‘제2의 사반세기’라는 표현이 거듭 등장한다. 원래 서양 쪽에서 파생된 것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10주년, 20주년을 기리는 것보다 25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훨씬 더 큰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엿볼 수 있다.

이른바 ‘시정 2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편찬 발행한 <시정이십오년사> (1925)의 모습이다. 이것
은 조선총독부가 직접 역대 조선총독들의 치적을 집대성하여 펴낸 최초의 간행물이다.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자료)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현상은 조선총독부 통신국(通信局, 1912년 4월 이후 ‘체신국’으로 개칭)에 의해 이른바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마다 등장하던 ‘시정기념엽서(始政紀念葉書)’와 ‘특수통신일부인(特殊通信日附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1910년 10월 1일 이래로 해마다 발행되다가 1920년 이후로는 5주년 단위로 변경되었는데, 1925년, 1935년, 1940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추가 인쇄되었으나 유독 1930년만은 시정 20주년이 되는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발행(未發行)인 상태로 그냥 넘어갔다. 그러니까 10주년, 20주년, 30주년 …… 이런 식의 단위보다는 확실히 25주년(더 나아가서는 50주년과 75주년)의 의미가 훨씬 더 크게 받아들였던 사실이 잘 입증되는 셈이다

 

1935년 10월 1일의 시정기념일에 맞춰 특수통신일부인(特殊通信日附印)으로 사용한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스탬프’의 모습이다. 이보다 앞선 시정 20주년에는 ‘시정기념엽서’라든가 ‘기념스탬프’의 발행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100년(century)이라는 세월을 4등분하여 이를 25년 단위(quarter)로 기념하는 것은 아무래도 서양 쪽에서 파생된 관습이라고 하겠다. 1시간(60분)을 4등분하여 15분 단위(quarter)로 일컫는 것이나, 스포츠 경기가 4쿼터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방식이라든가 기업회계의 단위가 1/4분기, 2/4분기, 3/4분기, 4/4분기, 이런 식으로 나뉘는 것도 마찬가지의 용법이다.
그리고 특히 군주제 국가의 경우 국왕(또는 황제)의 재위(在位) 기간을 25주년 단위로 기념하여 이를 ‘실버 쥬벌리(silver jubilee)’와 ‘골든 쥬벌리(golden jubilee)’로 일컫는 것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결혼 몇 주년 기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곧잘 사용되는 은혼식(銀婚式), 금혼식(金婚式), 금강혼식(金剛婚式)도 이러한 용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회혼식(回婚式, 60주년)이라는 말 또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동서양의 관념이 마구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25주년 단위의 서양식 기념일(anniversary) 명칭 구분

(*) ‘다이어몬드 쥬벌리’는 원래 군주의 즉위 75주년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인간의 자연수명에 비춰 대개 즉위 75주년의 충족이 사실상 어려우므로 ‘즉위 60주년’으로 대체하여 행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며, 이와는 별도로 즉위 7주년은 ‘플래티넘 쥬벌리(platinum jubilee)’로 일컫는다.

 

원래 동양 쪽의 사고에서는 100년을 4등분하는 개념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대개는 10간(干)과 12지(支)가 결합하여 만든 60갑자(甲子)가 바탕을 이룬다. 이에 따라 10년, 20년이라거나 100년, 200년의 개념도 널리 사용되지만 그보다는 120년, 180년, 240년, 360년 …… 이런 식의 ‘몇 주갑(周甲; 週甲)’ 단위가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보통이다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1915)의 ‘기(紀)’ 항목에는 이 글자가 “12년(十二年, 열두해)”
이라는 뜻을 담고 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반기(半紀, 6년), 이기(二紀, 24
년), 삼기(三紀, 36년) …… 이런 식의 표현이 즐겨 사용되었다

 

약간 특이한 개념으로 ‘기(紀)’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세성(歲星, 즉 목성)의 공전주기(公轉週期)가 약 12년인데서 나온 단위”이다. 그래선지 고문헌에는 이를 활용한 시간단위의 흔적들이 꽤나 많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반기(半紀) = 6년, 일기(一紀) = 12년, 이기(二紀) = 24년, 삼기(三紀) = 36년, 사기(四紀) = 48년, 오기(五紀) = 60년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시기에 이르러 온갖 서양식의 제도와 관념이 속속 전파되었고, 더구나 이런 것들에 대한 수용과 흡수가 빠른 일본제국의 손을 거치면서, 예를 들어 통상 100년을 일컫는 ‘세기(世紀)’라는 표현은 1900년 이후의 시점에 와서 크게 세력을 얻게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당연히 여기에서 파생된 ‘반세기(半世紀 = 50년)’ 내지 ‘사반세기(四半世紀 = 25년)’라는 것도 제법 사용빈도가 높은 용어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황성신문> 1907년 10월 18일자에 수록된 ‘이십세기 조선론(二十世紀 朝鮮論)’ 도서판매 안내광고이다. 이것 역시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세기(世紀, century)’라는 서양식 단위가 서서히 정착되고 있는 증거의 하나인 셈이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반세기’라든가 ‘사반세기’라는 표현도 널리 확산되었다.

 

1925년 5월 10일의 이른바 ‘대혼(大婚) 25주년 기념일’에 맞춰 사용한 특수통신일부인(特殊通信日附印)이다. 가운데는 천황과 황후를 상징하는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구절이 새겨져있다. 25주년 단위의 은혼식(銀婚式)을 크게 기리는 것은 서양식 제도와 관습이 일본제국에 의해 완전히 동화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남산 왜성대(南山 倭城臺)에 자리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전환하여 사용했던 이른바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도 바로 이러한 25주년 단위 기념행사의 결과물이었다. 1925년 그해는 ‘대정천황 어대혼(大正天皇 御大婚) 25주년 기념’, 즉 ‘은혼식(銀婚式)’에 해당하는 때였고, 이에 관한 여러 봉축행사가 대대적으로 함께 벌어졌다.
이러한 축전(祝典)을 맞이하여 일본천황은 조선총독부에 대해 ‘사회교육(社會敎育)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내탕금(內帑金) 17만 원을 하사하였으며, 이 금액을 재원으로 하여 옛 조선총독부 청사본관에 과학관을 설치한다는 결정을 보았다고 알려진다. 이로써 이곳에서는 1926년 1월부터 창설 준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27년 5월 5일에 이르러 일부 공개를 개시한 이래로 연차적으로 시설 확충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 이외에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무슨 학교의 개교(開校) 25주년, 개항(開港) 25주년, 어떤 회사나 상회의 개업(開業) 25주년, 특정한 협회나 단체의 창립(創立) 25주년, 부제(府制)실시 25주년 등과 결부된 기념사업의 흔적은 무수하게 포착된다. 이런 때에는 으레 “사반세기의 역사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식의 찬사가 주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관념이 그대로 이어진 탓인지 해방 이후 시기에도 가령 사사(社史)라든가 교사(校史)의 편찬에 있어서 의외로 ‘25년사’와 ‘75년사’의 타이틀이 붙은 저작물이 상당수에 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왕 세월의 일정한 단위마다 그것을 기념하는 방식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나이의 단위마다이를 나타내는 용어에 대해서도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부분 익숙하게 알고 있듯이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을 출처로 하여 지학(志學, 15세), 이립(而立, 30세), 불혹(不惑, 40세), 지천명(知天命, 50세), 이순(耳順, 60세), 종심(從心, 70세)이라는 표현이 흔하게 사용된다.
이밖에 약관(弱冠, 20세), 고희(古稀, 70세), 육순(六旬, 60세), 칠순(七旬, 70세), 팔순(八旬)을
비롯하여 망오(望五, 41세), 망륙(望六, 51세), 망칠(望七, 61세), 망팔(望八, 71), 망구(望九, 81
세) 등도 비교적 그 용례가 풍부하게 남아 있는 어휘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희수(喜壽)라거나 미수(米壽)라거나 백수(白壽)라거나 하는 표현들이 횡행하는 것을 곧잘 목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문지상에서 무슨 교수, 문인, 화가, 서예가 등의 미수기념(米壽記念) 논문집 또는 회고록 출판기념회나 작품전, 전시회와 같은 행사가 벌어진다는 안내기사 정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용어들의 어원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식민통치자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고약한 언어습성의 하나였던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일본에서 유래한 ‘희수’, ‘미수’, ‘백수’라는 표현의 작명 원리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26년 10월 11일자에 수록된 <키무라 씨(木村氏) 기부(寄附)>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개성 시내 서본정(開城 市內 西本町)에 있는 일본인 부호(日本人 富豪) 키무라 유지로 씨(木村勇治郞氏)는 30여 년 전에 적수(赤手)로 개성에 내주(來住)하여 그동안 근면(勤勉)히 활동(活動)한 결과(結果) 상당(相當)히 치부(致富)하였다는 데 동씨(同氏)는 자기(自己)의 부친(父親)이 당년(當年) 88세(歲)에 당(當)하여 일본(日本)의관습(慣習)으로 미수(米壽)를 자축(自祝)하는 의미(意味)에서 더욱 자기(自己)는 개성의 후의(厚意)를 몽(蒙)하여 금일(今日)과 여(如)한 성공(成功)을 하였으니까 개성의 사회(社會)를 위(爲)하여 조그마한 공헌(貢獻)이나마 잇겠다는 정신(精神)으로 금(金) 2,500원(圓)을 개성군 송도면(開城郡 松都面)의 교육계(敎育界)에 제공(提供)하여 시내(市內) 각공사립보통학교(各公私立普通學校)에 좌기(左記)와 여(如)히 분배기부(分配寄附)하였다는 바 기부(寄附)를 받은 각학교 당국자(各學校 當局者)는 물론 일반(一般)도 그 가상(可賞)한 행동(行動)에 대하여 매우 칭송(稱頌)한다더라. (개성)

 

이 기사에도 “일본(日本)의 관습(慣習)으로 미수(米壽)를 자축(自祝)하는 의미(意味)에서…… 운운”하는 구절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다. 옛 신문자료를 뒤져보니 이런 식의 흔적은 어렵잖게 포착되는데, 가령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의 실제적 설립자로 일컬어지는 일본인 거물 실업가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가 자신의 미수(米壽)를 맞이하여 거액의 추가 기부금을 제공하였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오쿠라상업학교(大倉商業學校)로 학교명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했던 사례도 있었다.

<조선신문> 1936년 8월 26일자에 수록된 하야시 곤스케 남작의 동상 원형에 관한 사진자료이다. 이 동상은 하야시 남작의 희수(喜壽, 77세)를 축하하는 뜻에서 건립이 추진된 것이며, 이를 제작한 조각가인요시다 사부로(吉田三郞, 1889~1962)의 모습도 함께 포착되어 있다.

 

<매일신보> 1940년 4월 17일자에 수록된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시비 건립 관련 기사이다. 그가 경성에 머물 때에 거처로 삼았던 삼청동 백운장 구내의 작소거(鵲巢居) 바위면에 새긴 칠언절구의 말미에는 ‘소봉 77세 늙은이’라고하여 그 자신의 ‘희수(喜壽)’를 기념하여 이를 적은 뜻이 또렷이 담겨 있다.

 

1936년 12월 2일에 옛 일본공사관이자 통감관저 자리였던 남산총독관저(南山總督官邸)에서 제막된 남작 하야시 곤스케(男爵 林權助, 1860~1939)의 동상(銅像)도 제작 동기는 그의 희수(喜壽)를 축하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창의문 바로 안쪽 청운동 백운장(白雲莊)의 뒤뜰 작소거(鵲巢居) 바위면에 경성일보 사장을 지낸 일본 언론계의 거물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의 자작 칠언절구가 새겨진 것도 그의 희수를 기리고 축하하는 모임이 발단이 되었다.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이 땅에 전파된 희수(喜壽), 미수(米壽), 백수(白壽)의 유래를 찾아보니 그것들의 작명원리가 무슨 대단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글자의 모양이나 획수를 파자(破字)하여 억지스럽게 꿰어 맞춘 일종의 언어유희(言語遊戱, 말장난)에서 파생한 결과물 일색이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일제가 이 땅에 남겨놓은 그들만의 언어습성을 지금껏 그대로 따를 하등의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표현들을 잘 가려내어 부지런히 솎아내는 것만으로도 일제잔재의 청산이라는 대의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