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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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

 

<자유신문>은 1945년 10월 5~10일자에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라는 제목으로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네 분 가족의 인터뷰를 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8월 10일 일본 항복 소식을 중국에 진주한 미군으로부터전달받은 9월 5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경에서 비행기로 상해에 도착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자격 입국이냐 ‘개인’ 자격 입국이냐라는 문제로 미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개인 자격 입국이란 미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11월 23일과 12월 1일 2진으로 나뉘어 고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편집자 주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첫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하늘은 언제나 푸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심회는 천변만화다. 어제까지 돌아올 기약이 없던 그리운 그이를 기억하는 눈에 비치는 그것이 비 머금은 잿빛 구름이었다면 희망과 기대에 소스라쳐 발자국 소리를 조심하는 오늘의 가슴에는 오직 붉게 하는 아침노을만이 빛날 것이다. 사십년 전 조국의 주초(柱礎)가 무너지자 조국 광복을 결심한 그들이 늙은 부모와 약한 처자를 버리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상해로 피나는 걸음을 달릴 때에 한때는 모든 개인적 미련을 이를 깨닫고 끊었으리라. 그러나 십년 이십년 지지한 혁명의 험로를 걸어가는 그들의 마음이 갈수록 구국의 정열로 불탔으면서도 풍찬노숙의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 남보다 먼저 머리 위에 백발을 더하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괴롭지 않다. 고국산하에 던지고 온 친족의 견디기 어려운 생활의 우려가 분마(奔馬)와 같이 눈앞을 왕래할 때 하염없는 암루(暗淚)를 금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뿌린 씨는 죽지 않아 어제날 그들의 희생을 밟고 조선은 다시 한번 일어서게 된 것이다. 그리운 가족이 기거하는 조국에 연한 창공을 바라보며 그분들의 감회는 지금 어떠할 것인가. 이에 본사는 망명 정치가들의 남아있는 가족을 방문하여 하루바삐 그리운 소식을 전하려 하는 것이다.

(1) 3대 혁명의 투사―엄항섭 씨 부친 엄주완 씨 방문기

지난 8월 23일 중경방송은 임시정부의 의사를 선전부장 엄항섭 씨의 목소리를 통하여 전해왔다. 3천만의 귀는 그 구구절절에 모였고 얼마마한 흥분과 감격으로 들었을 것인가.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 귀를 의심한 격정의 주인은 현재 시외의 미아리에서 간소한 생활을 하며 오직 자제의 개선을 기다리는 그 노친 엄주완 씨일 것이다.
10월 3일 끝없이 개인 가을 하늘의 다정한 햇빛을 받아가며 기자는 그리운 나의 부모를 찾는 마음으로 동소문 언덕을 넘었다. 좁은 골목을 돌아 조그마한 기와집을 들어서니 씨는 인자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준다. 사랑방 아래편 벽에 쌓인 서책 위로 걸린 가족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뒤에 온 청수한 청년의 모습은 일찍이 기자가 기억하고 있는 엄항섭 씨의 모습이 틀림없다. 먼저 인사를 드리니

“이 골까지 찾아와 주니 대단히 고마워요.”

74세의 고령인 그의 풍채는 구한국시대의 승지로서의 위풍이 아직도 역연하다.
“자제는 언제 중경으로 망명을 하셨는지요.”

“그것이 바로 기미년(1919년)이었소. 지금부터 26년 전이오. 보성전문을 졸업하던 해 그애가 바로 스물둘 때입니다.”

옛 기억을 더듬은 지사의 눈은 추억에 빛난다.
“그 후에 자제는 어떠한 운동경로를 밟았는지 아십니까.”
“그 후 항주의 지강대학(芝江大學)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상해임시정부에서 일을 보고 있는 모양이요. 최근의 소식으로는 일지사변(日支事變. 중일전쟁) 이듬해 여름 중경으로 가는 도중에 장사에서 보낸 편지가 마지막이었소.”
“지금 가족은 몇 분이나 되십니까.”
“그애는 상해에서 결혼을 하였고 나는 아직 자부(子婦. 며느리)도 손자들도 만난 일이 없소. 아이들이 3, 4남매나 될 것이오.”

×    ×

대의는 친분을 멸한다는 옛말과 같이 혁명가의 가족은 언제나 의롭다. 그 장손 엄기창 씨의 말에 의하면 엄항섭 씨는 삼형제에 둘째로 태어난 이였다. 그 백씨 엄승섭 씨는 계씨의 다년 해외망명 생활을 음으로 양으로 돕다가 여러 가지 심혈을 경주한 나머지 오랜 신병으로 1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제씨 홍섭 씨는 18년 전 경성치과의학전문을 마치자 역시 망명중인 형님을 좇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일을 맡아 본다 한다. 그 후 남은 가족의 곤란한 생계를 장손 엄기창 씨의 손으로 근근이 유지하여 왔다 한다.
“자제를 뵈올 날이 가까우실 터인데 소감이 어떠하십니까.”
“다만 감개무량할 뿐이오.”
한마디로 대답을 청하는 기자가 오히려 잘못이리라. 만감이 교차된 그의 흉중을 어찌 두어 마디 담화로 대신할 수 있으라. 더구나 그는 감형 이후 여주로 낙향하여 오늘날까지 경성 땅을 도피치 아니 함을 신조로 한 열혈적 지사임에랴.
기자는 회견을 마치고 돌아서는 자리에 다시 한번 옛일을 회상하였다. 대한 고종 18년 신사(辛巳. 1881) 4월에 조선의 개혁을 두 어깨에 지고 청년 신사 10여 명이 일본을 시찰한 후 돌아와 조선개화에 힘을 바쳐 고난의 일생을 바친 전 농상대신 엄세영(嚴世永. 원문의 嚴世泳은 오기-편집자) 씨가 바로 엄항섭의 조부라는 것을 듣고 100년 민족혁명에 생명과 재산을 바친 선생 가족을 위해 오는 행복을 길이 빌 뿐이었다.(<자유신문> 1945. 10. 5)

 

(2) 일경 연달아 추적, 신산하던 과거 성상―중경임시정부 요인 이시영 씨, 사자(嗣子) 이규봉씨 담

지금 중경에 있는 대한임시정부 요인 중에 최고령인 전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씨의 맏아드님 이규봉 씨(李圭鳳, 55세). 이분은 지금 경성부 내 낙원정(樂園町) 82의 1번지에서 그 엄친 이시영 씨가 하루바삐 귀국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자그마한 키에 단아한 학자풍이나 그 자신이 혁명지사의 한 사람임을 말하듯 맑은 눈의 광채가 범상치 않다.
“생각하면 감개무량할 일뿐입니다. 경술년에 합방이 되자 우리 일가족은 곧 망명할 목적으로 시동(詩洞), 지금의 입정정(笠井町)서 자하문 밖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해 음력 섣달 열사흗날(양력 1911년 1월 13일)부터 시작하여 닷새 동안 일본놈의 눈을 속여가며 하루에 두세 명씩 수대로 나누어서 만주 회인현으로 망명해 버렸습니다. 이 계획은 이동녕 씨 가족을 위시하여 수 가족이 모일 계획이었습니다. 우선 유하현에 자리를 잡은 후에 강습소를 세우고 청년의 교육과 병사교육을 해오다가 거기서 축출명령을 받고는 통화현으로 쫓겨가서 거기서 6년 동안 똑같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때 만주서는 우리 일족을 조선왕족이니 백만장자니 하는 소문이 나서 일인과 마적에게 수차 토벌을 당해서 우리 삼촌댁은 총까지 맞으셨습니다. 그때 노친은 봉천, 북경으로 왔다갔다 하셨는데 기미년 만세 전년(1918년)에 태상황(고종)이 출경(出京)을 하시려고 계획을 세우시고 노친은 덕국(독일)으로 밀사로 보내시려고 하셨습니다. 영국 배가 인천까지 왔었지만 태상황이 승하를 하셔서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원통한 일이었소. 이 계획에 쓰려고 민영달(閔泳達) 씨가 낸 수만원으로 상해임시정부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국무총리에 이동휘 씨, 내무총장에 이동녕 씨, 군무총장에 노백린, 외교총장에 박용만, 법무총장에 신규식, 노동총장에 안창호, 경무국장에 김구 그리고 우리 노친이 재무총장 이런 스태프였습니다. 그 후 국내에서 돈은 안 오고 미국 동포들에게서 오는 돈으로 겨우 유지해오다가 이승만 박사가 이현정박사를 시켜 레닌 정부로부터 1천만원을 차관하려 하였고, 또 손문 전 중국정권으로부터 1천만원을 차관하려 하였으나 모두 여의치 못하여 결국 임시정부는 와해되고 겨우 5, 6명의 위원제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노친은 김구 씨 처소에 우서를 하시며 굶으시는 날이 궁한 생활을 계속해 내려오셨습니다. 그 후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대로 쫓겨서 노친은 항주, 남경, 한구, 장사, 광동 등으로 이렇게 쫓겨다니시다가 몇 번인가 일인에게 붙잡힐 뻔한 위경(危境)을 넘기시면서 무전 도보로 3천여 리를 걸어 중경으로 들어가셔서 금일에 이르셨습니다.
우리 가족이요 말씀 마시오. 별 고생을 다하셨소이다. 곁방살이로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것은 여차였소만은 일본 경관이 끈덕지게 쫓아다니는데는 정말 머리가 시었소이다. 그러나 여지껏 잔명을 보존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었나 보오이다.(<자유신문> 1945. 10. 7)

 

(3) 고난의 노정 종언 과거 33년 일구난설(一口難說), 조완구씨 가족 풍상

시외 미아리로 중경에 망명중인 조완구(趙琬九) 씨 장조카 조남철(趙南哲) 씨를 찾았다. 62세의 진갑 노인인 그의 풍모는 고난의 덤불길을 걸어온 것이 역력히 보인다.
“조완구 씨와 숙질(叔姪) 간이 되신다 해서 찾아뵈러 왔는데 자세한 말씀을 들려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찾아온 뜻을 말씀하니 씨는 한동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가 자리를 고쳐 저고리 싶을 매만지며 닫았던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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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한제국) 당시의 황성신문과 대한민보의 주필로도 계셨지만 내부 주사로 있으시다가 합방 때 강원도 양구군수로 취임하랍시는 어명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다가 서른한 해 전인 을묘년(1915년) 가을에 북간도 용정으로 떠나시고 이듬해 봄에 부인은 시모님과 삼남매를 거느리고 용정에 계신 남편을 찾아 가셨는데 그해 여름에 장남 한 아드님이 비적에게 살해를 당했소.
그때 나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있는 조선국민회의 파견으로 용정으로 나와서 처음으로 숙질 간에 얼굴을 대하게 되었소. 해삼위에서 나온 뜻을 말씀드리니 곧 승낙하여 함께 러시아 국경을 넘어 조선국민회의 기관지 였던 청구신문(靑邱新聞)의 주필로 계시었소.
이듬해 기미년 운동 때 나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로 갔다가 북간도에서 편성된 조선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밀려오게 되어 그곳에 가담하여 이르쿠츠크로 숙부 조완구 씨는 동지인 이동녕 이시영 문창범 조성환 씨와 함께 상해로 건너가시었소. 임시정부에 가담하시었다는 소식을 이르쿠츠크에서 듣고 열두 해 전에 나는 만주 목릉현에 나와 있었소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중도에서 끊고 “그러니 낯선 땅에 주인을 잃은 네 사람의 살길이 어떠하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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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구 씨 자당(慈堂)께서는 그 양반이 이르쿠츠크에 있을 때 용정에서 세상을 떠나시었고 부인과 따님 두 분은 그곳에서 숭앙하는 단군교인 대종교회와 친지들이 모아주는 것으로 생활의 부조를 받아 생활을 하다가 부인은 두 분 따님을 거느리고 고행으로 돌아와서 부인의 친정 조카인 벽초 홍명희 씨에게 세 사람의 몸이 기탁되었소이다.
그 후 큰따님은 출가하여 지금 부여에 있고 작은따님 규은(圭恩)은 사범학교를 나와 서대문 밖 천연정(天然町)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시내 덕수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외금강소학교로 모친을 모시고 전근하여 갔었는데 숙모께서는 작년 봄에 괴산 홍명희 씨 댁으로 가 계시다가 금년 봄 64세를 일기로 한많은 세상을 떠나시었소.
부인께서 몇 달만 더 생존해 계시었다면 이 기쁜 소식을 조선이 자유 해방이 되고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는 것을 아셨을 걸을…그는 다시 눈을 스르르 내려 감으면서 분휘 소리를 내면서 한숨과 함께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자유신문> 1945. 10. 8)

(4) 나라 위해 일하라신 말씀, 15년 전의 대면 기억, 조소앙씨 영질(令姪) 영제군 방문기

조선독립!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 있어 그 얼마나 큰 감격이랴. 그러나 수십 년간 망명생활로 갖은 간난을 겪어가며 오로지 조선독립이 네 글자만을 위하여 분투하여 온 혁명지사와 그 가족의 기쁨이야말로 삼천만 동포 그 누구보다 더 한층 크고 또한 기쁠 것이다. 우리는 그들 혁명지사의 눈물겹고 또 거룩한 이모저모를 독자 제씨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리고자 엄항섭 씨, 이시영 씨, 조완구 씨에 이어 기자는 중경임시정부의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 씨의 영질 조영제(趙英齊, 21세) 군을 8일 경성부내 노량진 본동정(本洞町) 138번지의 자택으로 찾았다. 노량진 전차 종점에서 하차하여 왼편 산을 올라가니 높고 푸른 봉우리 위에 사육신묘를 마주 바라보며 외따로 서있는 바라크 집이었다. 이곳이 바로 조군의 집이다. 누추하나마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이 오랫동안 갖은 고난을 겪었던 것과 그런 가운데에도 엄격한 가품(家品)이 있음을 웅변으로 말하여 준다.
반가이 맞아주는 조군과 그 자친(慈親)의 안내로 방안에 올라 “소앙 선생과 숙질간(叔姪間)이 되신다 해서 찾아뵈려 왔습니다”고 찾아온 뜻을 말하였더니 영제 군에게 소앙 씨는 둘째아버지 입니다. 제 아버지는 6형제신데 그중 네 분이 독립운동에 나서 계십니다. 제가 나기 전부터의 일이며 또한 가족이 헤어져 숨어 살다시피 해왔으므로 자세한 것은 모르나 아는 대로 말씀하겠습니다.”고 말을 내어놓는데 기자는 4형제가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그 기특한 말에 새삼스러이 옷깃을 바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주마등같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옛 기억을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어 “큰아버지는 조용하(趙鏞夏) 씨인데 23세 때부터 한국의 교관으로 독일 미국 등에 가 계셨습니다. 합병이 되자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고 수십년 간을 미국에 머무르시며 독립운동을 해오시다 약 8년 전에 귀국하시자 곧 서대문경찰서에 잡혀 8개월 간 고문을 당하신 후 결국 원한을 품으신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장남 조이제(趙利齊) 형(36세)도 조선독립군으로 상해에서 활약하다 같은 해 전사하셨습니다.”라고 말을 뱉고 슬픔을 억제하고 제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말을 이어 “둘째아버지 되시는 소앙 씨는 먼저 신문에도 발표되었지만 일찍이 관비생으로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로도 계셨고 기미년 만세 후에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외교부장으로 계시며 독립운동을 해오셨습니다. 파리평화회의에도 출석하셨고 제2차 국제사회당 대표회의에도 출석하여 조선독립을 승인받았다고 합니다.”라고 소앙 선생의 약력을 말했다.
그런 후 “제 아버지 조용한(趙鏞漢) 씨는 넷째 분인데 숙부 조용원(趙鏞元) 씨와 같이 약 20년전에 중국으로 가서 큰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와 같이 15년 전에 중국으로 건너가 5, 6년 간 있었는데 그때의 둘째아버지 모습이 역력히 생각납니다. 기골이 장대하신 분이 저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나라를 위하여 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던 그 인자하신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젖어있는 듯합니다. 나도 독립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방금 모 정당 사무에 미력이나마 다하고 있습니다.
둘째아버님의 큰아들 조재선(趙在宣, 33세)과 둘째인 조인선(趙仁宣, 29세)은 중국서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방금 조선독립군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조부모님과 두 백부의 가족과 저의 부친 그리고 여섯째 숙부의 가족 등 친척의 태반이 있으므로 하루바삐 돌아와 서로 손을 맞잡고 옛 고생과 이 독립의 기쁨을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습니다.”고 말을 마친 다음 그는 한없는 미래의 즐거움을 연상하는 듯 감개무량한 표정을 한다.
오직 우리 삼천만의 자주독립만을 위하여 이같이 모든 친척이 모든 것을 들어 바쳐온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 기자는 지사의 집 문을 나서며 혼잣말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거룩한 가정이여 부디 삼천리강산과 같이 영원히 행복하라.”(<자유신문> 194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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