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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우리가 몰랐던 지폐 속 세종대왕 초상화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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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1TV <태종 이방원>

KBS1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세종대왕의 이미지가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묘사됐다. 훗날 세종으로 불리게 될 충녕대군(김민기 분)이 형인 양녕대군(이태리 분)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 과정을 <태종실록> 기록을 근거로 묘사했다. 그와 양녕대군 사이에서 경쟁관계가 있었으며, 그가 아버지 이방원에게 자기 능력을 적극 어필했다는 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형제 사이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의 우애관계가 실제는 없었으며 세종이 형의 양보를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의욕을 보였다는 이 드라마의 묘사는 그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리지 않는다. 세종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걷어내고 그의 참모습에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세종의 참모습에 접근하려면, 이 외에도 극복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친일파들이 만들어놓은 세종의 허구적 이미지를 걷어내는 일도 그 중 하나다. 세종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원권 지폐 속의 세종 초상화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 KBS1 <태종 이방원>한 장면. ⓒ KBS1
▲ KBS1 <태종 이방원>한 장면. ⓒ KBS1

역사 속 인물, 화가의 상상력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릴 때는 화가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상상에는, 관행적으로 지켜지는 기준이 있다. 임오군란 2년 전인 1880년에 출생한 역사학자 신채호는 “역사는 역사 자체를 위해 기록해야 한다”며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 때문에 기록해서는 안 된다”라고 <조선상고사>에 썼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예컨대,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경우를 생각해보자. 연개소문을 그릴 때는 생김새가 호걸스런 연개소문을 그려야 한다. 강감찬을 그릴 때는 몸집이 초라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어느 한쪽을 부각시키거나 억누를 목적으로 좀이라도 바꾼다면, 화가의 직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진짜 얼굴도 그릴 수 없다.”

신채호가 설명한 것처럼, 얼굴이 확인되지 않는 역사 속 인물을 그릴 때는 행적이나 업적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만원권 지폐 속의 세종 초상화는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화가 김기창의 친일 이력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해방 후 세종대왕·을지문덕·조헌·신숭겸 등의 수많은 역사 인물의 초상화와 기록화를 도맡아 제작했다”고 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특히 이 중에서 1973년 자신의 얼굴에 기초해 제작한 세종대왕 영정은 2008년 현재 한국은행 만원권 화폐의 주된 도상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일제 강점 3년 뒤인 1913년에 태어나고 1930년부터 친일화가 김은호의 문하생이 된 김기창은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추천작가가 되고 총독상 수상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친일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 미술사 학자인 이태호 전남대 교수는 1993년 발간된 공저작인 <친일파 99인> 제3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선전에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김기창은 자신의 탁월한 회화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그 영광을 가져다준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김기창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삽화를 싣기도 했다. 위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에서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고 조선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목적의 삽화를 그렸다. 이는 징병에 응해 떠나가는 장한 아들과 이를 자랑스럽게 배웅하는 늙은 노부모를 그린 것이었다. 여기서 청년은 ‘축 입영’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있어 일제의 부름에 자랑스럽게 선택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1944년 발표된 ‘총후병사’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의 경제적 지배를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의 사보인 <회심>에 그려진 이 작품은 완전 군장을 갖춘 일제 병사가 걸상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같은 해에 결전(決戰)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적진 육박’은 남양군도 밀림에서 총부리에 착검을 하고 적진을 향해 달려드는 일본 황군의 살기 어린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다. 이 시기에 그가 그려낸 작품들은 그의 ‘고객’인 일본제국주의의 기호에 부합했다.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가 해방 뒤에 세종대왕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세종대왕의 핵심 업적은 일본제국주의와 대척점에 있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은(일명 ‘말모이 사건’으로, 일본의 탄압으로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를 포함한 33명이 투옥돼 고문을 당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글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일제에 부역한 그가 세종대왕과 한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얼굴과 닮은 세종대왕 초상화?

▲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권 지폐. ⓒ 연합뉴스

한글을 창제한 임금의 초상화를 하필이면 그가 그렸다는 것은 한민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가 남긴 역사인물 초상화는 한둘이 아니다. 을지문덕, 태종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신숭겸, 의병장 조헌,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초상화도 남겼다. <친일파 99인>은 그가 “성화집 <예수의 생애>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독교화를 그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한국사뿐 아니라 기독교에 관한 그림에도 친일파의 영혼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 같은 사극을 통해 세종대왕의 참모습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어쩌면 그에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은 만원권 지폐처럼 우리 일상에 스며든 친일의 흔적으로부터 세종대왕을 구출하는 것이다.

<2022-05-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우리가 몰랐던 지폐 속 세종대왕 초상화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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