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툰드라에서도 피는 꽃처럼, 아버지 이육사는 강인했습니다”

993

[이육사 탄생 118주년] 이육사 외동딸 이옥비 여사 인터뷰

“우리 아버지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로만 이야기할 분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이육사를 떠올리는 ‘공식’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이육사 선생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의 이 한 마디는 담박했고 또 예리했다. 많은 사람들은 교과서로 이육사의 ‘시’를 배웠다. 과거 획일화된 교육은 <청포도>에서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에만 집중하며 학생들의 심상(心象)을 규정하려 했다. 이육사의 생애, 이육사가 꿈꾼 세상을 ‘가슴으로’ 들여다볼 기회는 주지 않고서 말이다.

사실 이육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시’의 명성에 비해 다소 부족한 실정이다. 누구보다 강렬했던 이육사의 항일운동과 사상가적 이상에 대한 앎 또한 마찬가지다.

올해 5월로 이육사 탄생 118주년이 된다. 5년, 10년 단위로 끊어내길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기념 정서’와는 조금 맞지 않지만 형식적인 업적 나열이 아닌, 이육사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접근을 해보기에는 적절한 시점이다. 지난 9일,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자 이육사문학관 상임이사로 재직 중인 이옥비 여사(81)를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나봤다.

“내 이름은 옥비, 아버지가 살고 싶은 삶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 이옥비 여사와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 도서『한 시대 다른 삶』의 이육사 관련 부분을 보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 이육사 탄생 118주년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이육사와 ‘딸’ 이옥비의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보통 내가 무남독녀, 외동딸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삼남매의 막내예요. 큰오빠와 언니가 있었는데 둘 다 요절했죠. 큰오빠는 3살, 언니는 3개월, 홍역으로 잃었고 그 바람에 형제 중 ‘제일 못난이’인 나만 살아있는 거죠. 1941년 명륜동에서 늦둥이로 태어나서, 아버지 육사의 순국이 1944년이니 한국 나이로 4살 때까지 아버지를 본 거죠.

무척 어린 나이에 이별했지만 그래도 몇몇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일제 당시 화신백화점이 유명했잖아요? (비싸서) 자주 가기도 어려운 곳인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뭔가 예감이 있으셨던 건지 본인이 곧 돌아가실 줄 아셨던지 날 데리고 가서 원피스하고 핑크색 챙 모자, 까만 구두를 사주셨어요. 내가 그 옷을 입으면 친구들이 한 번만 입어보자 할 정도로 좋은 것들이었죠. (화신백화점: 1931년 서울 종로에 설립된 백화점. 신식 시설과 조직 등을 갖춘 근대식 백화점으로 친일파 박흥식이 경영했다. – 기자 주)

독립운동하시다가 가끔 집에 돌아와 계실 때도 아침마다 저를 불러서 놀아주셨어요. 우리 가문, 집안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서 낙관(落款) 찍는다고 도장 같은 게 많았는데 내가 그 도장을 가지고 놀면 아버지 육사가 ‘증조부 거(도장) 어디 있냐, 할아버지 거 어디 있냐’ 하시면서 놀아주고 글자 찾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사랑받았죠.

‘옥비’라는 이름도 당시치곤 예쁘잖아요. 남들이 왜 이렇게 이름이 예쁘냐고 물어보면 ‘조상을 잘 뒀다’고 웃어넘겨요. 사실 이 이름도 내가 태어나고 100일 만에 아버지가 지어주신 건데 당시 집안 어른들이 딸 이름 이렇게 저렇게 지으라면서 조언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왜 너희들이 내 딸 이름을 짓냐’ 면서 당신이 직접 ‘옥비’라고 지으셨죠. 기름질 옥(沃) 아닐 비(非), 결국 기름지지 않다는 뜻인데 아버지가 의미를 덧붙여주시길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하는 간디 같은 사람이 돼라’ 하면서 이름을 주셨다고 해요.

나이 80이 넘은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 이름의 의미, 그게 바로 아버지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내 이름이 (한자가) 안 좋다고 바꾸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건 이 이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절대 바꿀 수 없다, 그랬죠.”

“너희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셨다, 강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1934년 6월 20일)의 이육사 신원카드 ⓒ 이육사문학관

– 이육사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선 사람들이 아직 잘 알지 못하죠. 혹시 그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독립운동 하셨다는 걸 알게 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죠. 삼촌들이 ‘너희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다. 참 강직하신 분이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옥고를 열일곱 번 치르셨다고 해요.

고문도 많이 당하셨는데 옥(獄)으로 보낸 솜바지가 매번 피로 물들었다고 하니 어머니, 할머니 가슴이 많이 아프셨겠죠. 또 일제 요시찰 인물이 되다보니 수시로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아버지부터 체포를 하는 거예요. 일제 막바지에는 눈들이(감시가) 굉장하잖아요?

어머니가 고초가 많았죠. 수시로 아버지 보러 감옥에, 옥바라지를 하셨고. 어디서 누가 ‘당신 왜 이 사람 찾아오느냐’ 캐물으면 ‘나는 소박을 당한 사람이라 잘 모른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 식구가 위급할 땐 보살핀다’,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대요.

또 듣기로는, 아버지 어디 갔냐고 말하라고 그러면서 웬 사람들이 와서 횡포를 부린 적도 있었대요. 모른다고 하니까 어머니께 의자를 집어던지고 뺨을 쳤다고 해요. 그때 어머니는 임산부였는데 말이죠. 그때 어머니가 그 횡포부리는 사람에게 ‘너희 일본법에 임산부에게 매질을 하면 안 된다고 돼 있지 않냐. 네가 나를 때렸으니 고발 하겠다’면서 꾸짖으셨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랐다 하면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 경찰, 한국인 끄나풀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일도 있었죠.”

– 이육사 선생이 중국을 오가며 의열투쟁에도 투신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경에 있는 군사학교(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가셨어요. 아버지가 윤세주 선생을 특히 존경하셨는데 그분을 알게 되면서 김원봉과 이야기가 됐고 군사학교 1기생으로 가시게 된 거죠. 아버지가 훈련 같은 걸 너무 잘하셨대요. 아버지 친구 분이 말씀하시길,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였다. 특히 권총을 잘 다뤄서 말을 타면서도 (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고 하셔요.

돌아가실 때 즈음에도 무기를 들여오려다가 체포되셨다고 해요. 아버지 형제분들은 아마도 아버지가 소련에서 무기를 구입해서 들여오려 하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때 아버지가 소련 돈을 좀 갖고 계셨거든요. 그러면서 외곽에서 독립운동 할 동지들도 모으고. (윤세주: 독립운동가. 1919년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활동을 벌였다. 이후 만주에서 의열단에 입단, 국내외를 오가며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42년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 기자 주)

체포된 아버지를, 아버지가 마지막 중국으로 끌려가실 때 청량리 역에서 그 모습을 봤어요. 원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러가는 자리에 저를 안 데리고 가려고 하셨죠. 그런데 그 당시 학덕이 높으셨던 집안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이 시기에 북경으로 압송되는 건 안 좋은 징조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부녀지간에 만나도록 해줘야 된다’ 해서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나가셨다고 해요.

청량리 역에서 아버지를 보는데 그 모습이 지금도 너무 생생해요. 아버지가 3단으로 엮어진 죄인용 용수를 쓰고… 아버지 눈만 보이더라고요. 몸은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었고. 그 모습이 네 살인 저로서는 굉장히 충격이었죠.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안겨 있는 저를 보고 한 발짝 다가오시더니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대요.” (중국에서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려던 계획을 세우고 있던 이육사는 1943년 7월 서울에서 붙잡혔다. 이후 베이징으로 이송되어 1944년 1월 16일 감옥에서 순국했다. – 기자 주)

– 선생의 독립의지와 사상이 잘 드러난 글과 문학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죠.

“우리 아버지,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로만 이야기할 분이 아니에요. 군사학교를 나온 뒤로는 글을 통해 싸우자는 마음을 먹고 집중하셨죠. 무기로만은 독립이 안 되겠다. 그래서 ‘필(筆)로 싸우겠다. 물러서지 않겠다, 유언 같은 것도 남기지 않겠다’ 이런 수기(‘계절의 오행’, <조선일보>, 1938.12.28.)를 남겨놓으시기도 했죠. 어쨌거나 총과는 달리 글은 영원히 남는 거잖아요?

사상적으로도 아버지는 좀 달랐어요. 아버지는 독립만 되면 ‘유토피아적인’ 그런 세계가 올 것을 꿈꿨다고 해요. 누구나 평등하게 나눌 수 있다,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과격하지 않은 좀 유화적인 사상이죠. 그런 이야기들을 형제분들과 밤새워 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중국의 그 유명한 루쉰(魯迅) 선생과도 교류가 있었죠. 아버지가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기도 했고. 루쉰 선생 돌아가신 다음에는 그 추도문을 쓸 만큼 존경했으니 사상도 영향을 받았겠죠. 제가 아버지 관련 답사를, 아버지 흔적이 있는 곳을 여러군데 다녔는데 중국 상해에도 갔어요. 거기 어딘가에서 아버지와 루쉰이 만나 공원 같은 곳을 함께 걷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감명이 깊어지더라고요.” (루쉰: 중국의 문학자이자 사상가. <아큐정전(阿Q正傳)>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의 작품으로 특히 유명하다. 문학활동, 비평을 통해 중국 사회의 폐단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 기자 주)

“아버지는 백범 김구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걸으셨을 것 같아요”

이 여사는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 이육사 본인이었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이육사라는 인물을 단지 ‘시인’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닌, 독립운동가, 사상가 그리고 아버지로서 바라봤던 깊은 이해에서 나온 해석으로 보인다.

– 하지만 선생은 자신이 꿈꿨던 유토피아, 즉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셨습니다. 해방을 불과 1년여를 남기고 돌아가셨는데요. 주위의 안타까움도 컸겠습니다.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특히 우리 삼촌이 나만 보면 그렇게 서럽게 우셨어요. 저를 붙들고 볼을 비비면서 ‘우리 형님이 1년만 더 살아계셨으면 독립을 봤을 텐데’ 그러시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하얀 옷만 입으셨죠. ‘내가 죄인이다’ 그랬어요. 계속 그렇게 흰 옷만 입으시다가 제가 결혼하고 옷 해드렸을 때야 겨우 회색 옷을 입으시더군요.

어머니는 혼자 (집안을 건사한다고) 안 하는 게 없었어요. 국수 장사, 건어물 장사, 바느질… 직업이 열다섯 개는 됐을 거예요. 상록수적인 기질이 있으신 분이죠. 1984년, 78세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이 기억나요. ‘잘 났다고도 못 났다고도 생각하지 마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문단에서 아버지랑 가장 친하셨던 신석초 선생님은 ‘육사와 겨울이 되면 홍릉의 눈을 답설(踏雪)하자고 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켰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내가 중학교 때 쯤일까. 제가 신석초 선생님한테 물어봤어요. 우리 아버지 독립운동하신 거 아셨냐, 왜 물어보시지 않으셨냐고. 그러니 ‘나는 너희 아버지처럼 강직하지 못하다. 내가 체포되면, 그래서 토설(吐說)하면 친구 잃고 나라 잃고 그렇게 될 테니까’ 그러시더라고요.”

▲ 이육사 선생 부인 안일양 여사. 장소는 이육사 시비 앞 ⓒ 이육사문학관

– 만약 선생이 해방 후까지 살아계셨다면 어떤 인생을 사셨을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 아버지는 백범 김구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걸으셨을 것 같아요. 중국 쪽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백범 선생을 많이 믿었고. 그런데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먼저 들어왔죠. (이승만 박사가) 좋은 점도 많았지만 관료들을 다 친일적인 사람을 썼죠. 그러니까 그게 지금 친일청산이 안 되고 있잖아요.

우리 삼촌들도 아버지랑 비슷하셨어요. 삼촌들도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해방 후) 친일파를 등용하고 하니까 거기에 분개해서 6.25 직전에 월북을 하셨죠. 그런걸 보면 아버지도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고 그런 걸 보고 분개하시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극단적인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뭐, 저도 의문이죠.

저는 친일청산은 빨리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춘원 이광수 같은 사람은 용서 안 되죠. 이광수 <무정> 같은 작품은 좋은 작품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그런 부분은 따로 연구를 하자, 이런 얘기들도 하는데, 저로서는 잘 호응이 안돼요. 마음으로는 (친일이) 용서가 되지만 아직 (친일청산을)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이옥비’의 인생은 어땠나요?

“이육사의 딸로 사는 건 피곤했어요(웃음). 중학교 때까지는 정말 피곤했어요. 어떻게 아는지 이육사 선생 딸이라고 <청포도> 외워봐라 <광야> 외워봐라, 이 시를 어떻게 쓰신 거냐… 늘 그렇게 물어서 담임 선생님한테 저는 문예반에 안 들겠다, 요리를 좋아하니까 가사반에 보내 달라 그랬죠. 그런데 뭐 그냥 글 쓰면 입선도 하고 그랬는데(웃음).

나중에는 국문학을 하긴 했어요. 어쨌거나 중학교까지는 밝은 아이가 아니었죠. 그러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담임 선생님을 너무 잘 만났어요. 그분이 아버지에 대한 긍지를 키워주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그랬어요. 그 담임 선생님, 언젠가 제가 동창회에 나가서 알아보니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고) 지금도 그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바로 설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행복할 때는 결혼해서 남편 따라 서울에 살 때였어요. 남편이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제 기를 다 살려줬죠. 강직한 사람이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사람들이 와서 남편하고 같이 근무했다고 그러면서 인사도 하고. 욕심 없는 사람, 금(金)방석이라도 싫다 그럴 사람이에요.

남편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간다는 게 어쩌다 일본으로 가게 됐어요. 제가 마침 궁중요리를 했는데 일본 총영사관에 요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간 거죠. 이육사 딸이라는 건 말 안했죠. 그러다가 2004년 ‘이육사문학관’ 개관하면서 내가 일본에 있다는 연락이 총영사관에 갔나봐요. 총영사관이 뒤집혔죠. 아침에 출근하니까 사람들이 와서 ‘혹시나 이육사 선생님 아세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안다고 해도 제가 여기 온 거는 잡(job)으로 온 거다’ 그렇게 딱 잘라 얘기했죠. 그때부터 미안해선지 저한테 엄청 잘해주더라고요.(웃음)”

– 여사님 평생에 아버지 이육사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참 좋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뭐 이 나이에 월급 받는 사람도 없잖아요? (이옥비 여사는 이육사문학관의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제가 또 대학을 2년제를 나왔는데 아이들 키운다고 공부를 더 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재작년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됐죠. 처음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이육사 선생이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받으라고 어떤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일리가 있다 생각해서 받았고. 다른 좋은 상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가 내게 많은 걸 남겨주고 가셨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하늘의 별이 되고 싶다 생각했는데, 우리 아버지 덕분에 내가 지금 별(스타)이 돼 있네’ (웃음)”

이옥비 여사는 이육사가 낸 시작(詩作)들 중에서도 <꽃>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반해 이육사가 이야기하는 ‘꽃’은 “툰드라 얼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강인한 꽃”이기 때문이란다.

덧붙이는 글 | *해당 인터뷰는 추후 민족문제연구소 월간지 <민족사랑>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minjokorkr)

<2022-05-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툰드라에서도 피는 꽃처럼, 아버지 이육사는 강인했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