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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처님 팔아 일왕 모신 승려, 죽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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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홍태욱

전쟁 반대와 평화주의를 논할 때 종종 언급되는 문구가 성경 이사야서 2장 4절이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개역개정판)라는 구절이다.

칼을 쳐서 농기구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든다는 이 구절과 정반대로 행동한 인물이 있다. 무기를 녹여 무기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무기 아닌 것을 녹여 무기로 만드는 데 조력을 제공한 친일 승려 홍태욱이 바로 그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홍태욱 편은 그가 사찰 내의 금속류를 수집해 일제 침략 전쟁에 바쳤다고 설명한다.

(1942년) 11월 봉은사 본·말사가 연합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용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철제류를 수집하여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1944년) 같은 해 11월 봉은사 본·말사에서 수집한 범종과 불구 691점 등의 금속류를 경성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 무관부에 직접 헌납했다.

홍태욱은 불교 수행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일제에 헌납했다. 부처님을 팔아 일왕(천황)에게 충성한 승려였던 것이다.

도둑이 찾아오는 승려의 집

출생 연도가 확인되지 않는 홍태욱은 3·1 운동 2년 뒤인 1921년부터 경기도 고양군 적조암, 양평군 개운사 및 용문사, 광주군 봉은사에서 주지를 역임했다. 마지막 사찰인 봉은사의 소재지는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이지만 이 당시는 경기도 광주였다.

산속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남긴 선시(禪詩) 중에는 낮잠에 관한 시들이 적지 않다. 고려시대에 몽골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으로부터 스승 예우를 받은 외교관 출신의 충지(沖止) 대사는 ‘빗속에서 자다가 일어나다(雨中睡起)’라는 시에서 “선방은 고요하고 고요해 마치 승려도 없는 듯”이라고 한 뒤 “낮잠에서 놀라 일어나니 날은 이미 저녁인데”라고 읊었다.

깊은 산속에서 수행하다가 잠자다가 하는 충지 대사의 모습은 홍태욱이 주지로 일했던 적조암의 명칭과 어느 정도 어울린다. 고요하고 정적인 상태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사유하는 적조(寂照)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데 정작 적조암의 주지였던 홍태욱은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었다. 그는 수행과 직접적 관련성이 낮은 외부 활동에 열정을 많이 투입했다. 친일 행위에 뛰어들기 전부터도 그랬다. 1922년 6월 25일 자 <동아일보> 4면 중간 기사는 6월 17일에 적조암 주지 홍태욱이 불교중흥청년회장이 된 사실을 보도했다. 1924년 6월 2일 자 <조선일보> 3면 중간은 그가 조선불교친목회 사회부 부원이 된 일을 전했다.

평정심으로 마음의 동요를 제어하는 인욕행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은 조선 후기의 해원(海源) 대사는 ‘인악 스님에게 주다(贈仁嶽師)’라는 선시에서 “배는 얕은 물에서 띄우기 힘들고, 도둑은 가난한 집에 오지 않는다”라고 읊었다. 속세로 나가 그런 부대끼는 삶을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산으로 돌아와 자줏빛 안개를 먹자”고 권유하는 시다.

승려들의 집은 도둑이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인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홍태욱의 집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집은 도둑이 찾아오는 집이었다. 그것도,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떠들썩하게 찾아오는 집이었다. 그가 개운사 승려였을 때 발행된 1925년 4월 13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 기사는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 시가 20원 이상의 의복과 물건을 훔쳐갔다고 보도했다.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가 약국 직원으로 일할 당시인 1917년에 받은 월급은 숙식 제공과 기본급 10원이었다. 1920년부터 1924년까지 용산역에서 역부·전철수·연결수로 근무할 때는 월급 40~48원을 받았다. 홍태욱 집에 있었던 의류 등이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청년회나 친목회 같은 외부 활동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집안 내부에 재물을 쌓아두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승려가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갖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홍태욱의 경우에는 의심받을 소지가 많았다. 그가 용문사 주지였던 1939년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렇다.

‘용문사 주지가 수종사에서 보물을 훔쳐 내다팔고 있다’라는 투서가 그해 하반기에 일제 경찰에 접수됐다. 용문사 주지 홍태욱이 자신이 함께 관리 중인 남양주 수종사에서 보물을 훔쳐다 팔고 있다는 제보였다.

그해 11월 11일 자 <동아일보> 2면 하단에 따르면, 일제 당국은 수종사에 있었던 고려자기와 사리함 등을 그가 따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총독부는 800년 된 이 고려자기를 국보급으로 판정했다.

▲ 홍태욱이 갖고 있었던 수종사 보물을 소개한 1939년 11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그런데도 일제 경찰은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수종사가 퇴락되어 이 보물이 도난될 염려가 잇으므로 특별히 보관하고 잇엇다”라는 홍태욱의 말도 안 되는 진술을 사실로 인정해준 결과였다. 홍태욱과 일제 경찰 혹은 총독부 사이의 커넥션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다.

이 일이 있은 뒤에 봉은사 주지로 자리를 옮긴 홍태욱은 상당히 인상적인 친일 행적을 남겼다. 사찰에서 범종을 떼어내고 불구를 모아다가 침략전쟁에 바친 것을 포함해, 불교 승려답지 않은 친일 행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일제에 바친 것이 많았다. 일장기가 그려진 부채 2000개를 제작해 위문품으로 보냈다. 심지어는 비행기 구입 대금까지 헌납했다. 봉은사 재정으로 그 돈을 바쳤던 것이다.

돈뿐 아니라 글로도 친일을 했다. <불교시보>에 쓴 글에서 ‘황군’의 무운을 기원하고 히로히토 일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또 친일 불교의식도 많이 거행했다. 일본군을 위한 위령제도 열고, 중일전쟁 4주년 기념법회도 열었다. 봉은사 입구에 일본군을 위한 충령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징병제를 축하하는 강연회도 열었다. 친일파 이광수를 초청하는 강연회도 열고, 만주 사찰의 주지인 친일 승려 김태흡을 초청하는 시국강연회도 열었다.

동료 승려들 손에 피살

그가 1939년에 수종사 보물을 훔친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면, 자기 재산이든 불교 재산이든 더 이상 관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해 친일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 친일행위를 하면서 기존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했으니, 일본 정부로부터 상금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의 재산은 친일과 관련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재산을 1945년 12월 28일 이후로는 더 이상 지키지 못했다. 8·15 해방 4개월 뒤인 이날, 그는 동료 승려들의 손에 피살됐다. 1946년 8월 22일 자 <조선일보> 2면 하단에 따르면, 재판부는 승려들이 그의 주지직을 빼앗고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이 승려들 역시 홍태욱이 가진 것들을 욕심냈던 것이다.

살인범 중 하나는 1943년에 홍태욱이 강사로 초빙했던 친일파 김태흡이었다. 만주 관음사 주지인 김태흡은 그해 7월 봉은사에서 ‘황도 불교와 국체 관념, 일본 정신’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랬던 그가 해방 4개월 뒤에 홍태욱의 것을 빼앗는 일에 가담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친일파들은 일제 패망과 관계없이 재산을 지켜냈다. 개중에는 재산을 크게 불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 혹은 귀속재산을 미군정 승인 하에 헐값으로 사들여 훨씬 부유해진 친일파들도 있었다.

이들과 달리 홍태욱은 해방 이후 4개월밖에 재산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집에 도둑이 들고 그의 재산 축적을 고발하는 투서가 나온 데서 느낄 수 있듯이, 그 이전부터 그의 재산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이 일제 패망 4개월 뒤에 더 이상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비명횡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 볼 수 있다.

<2022-05-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처님 팔아 일왕 모신 승려, 죽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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