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며
이정아 후원회원,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이 글은 <현안과정책> 396호(2022.4.18.)에 발표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이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준 이정아 회원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편집자
2022년은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원래 어린이날은 지금의 5월 5일이 아니라 5월 1일이었다.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에서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어린이의 날’ 행사를 했다. 5월 1일 ‘어린이의 날’은 메이데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였고 노동자 해방과 같은 맥락으로 아동 해방이 필요하다는 천도교 내부의 목소리가 그 출발로 볼 수 있다. 그 이듬해 1923년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천도교소년회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하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서울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회원 1,000여 명이 모여 선언식을 했다. 4시에 어린이들이 가두 행진을 하고 전국적으로 20만장정도의 선전문이 배포되었다. 이러한 어린이날의 제정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우리는 방정환선생을 떠올릴 수 있다.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됨으로써, 방정환은 생애 큰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천도교의 종교적 수련을 경험하고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망이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도 하고 천도교의 경제적 지원으로 도쿄 유학도 경험하였다.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학을 배웠던 방정환은 그 이후 근대학교에서 수학을 했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문명 그리고 근대의식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몸 안팎에 한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계급과 귀천에 관계없이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방정환의 교육관에 입각한 자기주도적 어린이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아동존중사상 그리고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미래를 상징하는 어린이의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전통적 아동교육의 특징은 그리고 이런 특징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교육이 아동에게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어른에게 두었다는 점이다. 아동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고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한 이로 방정환을 들 수 있다.
더 이상 ‘어린이’는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과정의 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정환의 ‘어린이’는 천도교소년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방정환의 아동교육사상의 바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방정환은 아동교육의 목적을 조선왕조 시대의 성인이 되는 필요한 예절교육과 심성함양교육보다는 ‘어린이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을 하는’ 주체적인 어린이를 키우는 일에 두었다. 방정환의 새로운 아동교육관의 특징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육’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아동교육관이 기본적인 습관형성을 통해 양육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실제 사회에 나아가서 쓸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새 시대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데 공부의 목적을 두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생각하고, ‘자유, 평등, 박애, 환희, 행복의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는 서구의 민주주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방정환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이미 ‘민주주의’ 정신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꽃피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개벽사 도쿄 특파원으로 도쿄에 갔다. 그곳에서 천도교 청년들과 함께 소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의 주체로 어린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기주체의 확립은 자기주도적 삶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어린이 인권의식의 성장으로 본 어린이해방선언문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방정환은 학교교육이 아닌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방정환의 어린이 인권의식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글은 “1923년 5월 1일 소년운동협회 이름으로 나눠준 전단지 전문”을 들 수 있다. 그 중 다음 ‘소년운동의 기초’의 세 가지 선언문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禮遇)를 허(許)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無償) 또는 유상(有償)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위의 선언문에서는 ‘어린이해방’을 천명하며, 세 가지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첫째,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 둘째,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 셋째,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윤리적 억압에서의 해방’ 이라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강조했던 ‘장유유서’의 폐해에서 아동이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경제적 억압에서의 해방’은 아동들이 배우는 일보다 노동하는 일에 고된 일상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아동들에게 교육의 정신적, 물리적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린이들은 마땅히 위의 세 가지에 대한 권리를 누려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소년운동의 기초’의 세 가지 선언문은 마땅히 ‘어린이해방선언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방정환 선생과 소년들 사진출처 : <신여성> 5권 8호 1931년 9월호, 43쪽
어린이날이 5월 첫 번째 일요일 날로 바뀐 뒤의 포스터, 아래에 ‘오월첫공일’이라고 쓰여 있음.
메이데이 정신과 어린이날
‘어린이해방선언문’이 공포되기 1년 전, 1922년 천도교소년회가 5월 1일에 ‘어린이의 날’ 행사를 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5월 1일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절을 기념하는 메이데이이다. 1922년 5월 1일에 ‘오늘이 어린이의 날’이란 취지를 가두 선전하고, “10년 후의 조선을 려(慮:생각)하라”라는 선전물을 뿌리면서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였다. 2 1923년, 1924년, 1925년에도 5월 1일에 ‘어린이날’을 기념하였다. 하지만 1927년부터 어린이날이 5월 첫째주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다.
2 이재철, 「한국 어린이 운동이 걸어 온 길- 그 역사적 흐름을 중심으로-」, <색동동화> 제2호, 2001, 23쪽
이주희의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아동보호일 제정과 그 성격」이란 최근 논문에서 보면, 조선총독부는 1927년 5월 5일을 ‘아동보호일’로 제정한다. 또한 ‘아동보호일’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것은 1926년 2월 2일부터 4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전국아동보호사업대회 결의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식민지 내 아동보호를 목적으로 제국신민을 양성하고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아동보호일’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27년 어린이날이 공휴일이 된 점은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열기에는 평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하는 소년단체 측의 자발적 결정이었다는 이유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메이데이와 겹치고 일제가 장악하고 있는 교육기관이 어린이날 행사를 방해하여 5월 첫째 주 공휴일이 어린이날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부터는 어린이날 행사가 아예 중단이 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듬해 1946년 5월 5일에는 어린이날 기념식이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김안서, 윤석중, 정홍교 등이 모여 광복 후 첫째 5월, 첫 일요일인 5월 5일로 어린이날을 확정지었다.3 추후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고,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5월 1일 메이데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린이날’의 기념일이 식민지하에서 바뀌는 과정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인간해방이라는 큰 틀에서 노동자해방은 어린이해방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이념문제와 일제의 감시로 어린이날 행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어린이를 주체로 세웠던 본래 어린이날 취지와 무관하게 어린이날 날짜가 휴일로 바뀌면서,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해서 어린이날의 격을 떨어뜨렸다. 예를 들면 일제는 어린이날을 5월 첫 공휴일로 만들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어린이날에 무료 개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업화된 어린이날 선물과 유희적 놀이로 어린이들의 해방정신을 약화시켰다. 일제는 ‘아동애호주간’을 만들어 철저하게 독립된 주체로 세우기 위한 ‘어린이날’의 원래적 의미를 퇴색시켰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그만큼 초기 어린이날이 가진 의미가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린이해방’을 근거로 ‘어린이인권의식’을 성장시키고자 했던 초기 어린이날 정신의 의미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
3 이재철, 「한국 어린이 운동이 걸어 온 길- 그 역사적 흐름을 중심으로-」, <색동동화> 제2호, 2001.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의 현재적 의미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던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은 지금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완전한 인격체’로 여전히 살고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입시 경쟁 속에서 부모들은 아이의 온전한 성장을 간과하고 ‘공부’ 한 가지로 평가의 준거를 삼고 있다. 이러한 ‘학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한 아이들은 여전히 ‘주체’를 잊게 된다. 최근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의 <인정투쟁>에 관한 논의가 많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격 나’와 대상화되지 않는 어떤 자발성으로서의 ‘주격 나’의 긴장관계를 전제”4로 개인의 ‘정체성’형성과정을 해석한다. 사회적 투쟁이 상호인정이라는 주관적 관계가 된다는 점인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작동한다. “자신의 사랑을 유지한다는 감정의 확실성 없이 사랑하는 주체가 사랑받는 사람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5 상대의 반응을 자신 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된 인격체가 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동의 자기주도적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 방정환의 교육관은 현재도 그 의미가 크다.
둘째, 어린이인권 성장의 측면에서 우리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이제 빨간불이라는 점이다. 방정환재단에서는 2009년부터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함께 OECD국가와 비교하여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행복지수를 조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는 내용은 주관적 만족도와 행복도 지수가 OECD국가 중에 꼴찌라는 점이다.6 국가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이렇게 바닥이라는 점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중에 행복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회복탄력성은 아이들에게 즐겁고 기쁜 정신적, 물리적 환경이 조성될 때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해방, 경제적 해방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 조성 또한 중요하다. 이는 100년 전 ‘어린이해방선언’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AI와 제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이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화된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성품과 마음을 닦는 일이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방정환이 보여주었던 주체성을 지닌 어린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래성을 돌아간다는 것은 지식위주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OECD에서 2018년도에 제시하였던 Education 2030의 학습틀인 지식, 기능, 태도 및 가치의 통합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이제 우리는 1922년 첫 어린이날 기념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2년 어린이날을 곧 앞두고 있다. 전통적 교육의 한계였던 어른이 중심이 된 교육이 아닌 어린이가 주체로 선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제 어린이는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행복하며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가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되어야 할 때이다.
4 문성훈, 이현재 옮김, <인정투쟁-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사월의 책, 16쪽.
5 문성훈, 이현재 옮김, <인정투쟁-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사월의 책, 210~211쪽.
6 [BBS 뉴스와 사람들] 이상경 방정환재단이사장 “소파 방정환, 그 시대의 BTS” 최선호 기자. 2019.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