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현수막(懸垂幕), 결전체제를 다잡는 또 하나의 전쟁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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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82]

현수막(懸垂幕), 결전체제를 다잡는 또 하나의 전쟁무기
건물 외벽마다 시국표어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모던 경성’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식의 얘기를 하노라면 이럴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함께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경성(京城) 5대 백화점(百貨店)’의 존재이다. 이를 테면, 삼월(三越, 미츠코시; 1930년 10월 신축), 정자옥(丁子屋, 쵸지야; 1939년 9월 신축), 삼중정(三中井, 미나카이; 1933년 9월 신축), 평전(平田, 히라타; 1926년 2월 개축)과 아울러 유일한 조선인 백화점 화신(和信, 1937년 10월 신축)이 바로 그것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제강점기에 제작 배포된 경성의 거리풍경을 담은 무수한 사진엽서에는 이들 신식 건물의 빼어난 외관(外觀)을 담은 모습이 곧잘 등장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백화점 사진엽서들을 모아놓고 가만히 살펴보면, 부지불식간에 확연히 분간되는 두 가지 유형으로 가려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금세 간파하게 된다. 이때 이러한 분류의 잣대는 건물의 외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현수막(懸垂幕, 걸개, placard)’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건물의 외벽에 현수막이 여럿 내걸린 미츠코시 경성지점(三越 京城支店)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이다. 여기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애마의 날’과 ‘제30회 기념식수’라는 내용이 있고, 건물 출입구 위쪽에는 ‘일억일심’, ‘백억저축’이란 구호간판도 부착되어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소화 15년판 조선사정>(1939)에 수록된 동일은행 본점(東一銀行 本店, 남대문통 1정목 1번지)의 외관이다. 이곳에도 전면 외벽에 ‘일본정신발양’, ‘국민정신총동원 저축보국’,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가맹, 동일은행’ 등 전시체제기의 구호와 시국표어가 적힌 현수막이 가득 자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예를 들어, 여기에 미츠코시 경성지점(본정 1정목 52번지)의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엽서사진이 있다. 건물 외벽에는 여러 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보아하니 백화점 본연의 영업과 관련한 무슨 ‘바겐세일’이나 하다못해 ‘전시회’ 안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생뚱맞게도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애마의 날(愛馬の日)”과 “제30회 기념식수(記念植樹)”라는 내용이다.
우선 ‘애마의 날(애마일, 애마데이)’은 전장터에서 꼭 필요한 군마(軍馬)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일제가 새로 제정한 것으로 1939년 4월 7일에 ‘제1회 애마일’의 기념행사가 거행된 바 있다. 그리고 ‘기념식수’는 조선총독부가 한국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린다는 뜻으로 1911년 4월 3일(신무천황 제일)부터 시작한 연례적인 식목행사이며, 그러니까 제30회 기념식수일은 1940년 4월 3일에 해당한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이 사진엽서에 담긴 거리풍경은 정확하게는 1940년 4월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촬영된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건물의 중앙 출입구 위쪽에도 양쪽으로 “일억일심(一億一心)”과 “백억저축(百億貯蓄)”이라고 쓴 구호판이 또렷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구호의 등장 시기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9년 6월 15일자에 수록된 「‘일억일심 백억저축(一億一心 百億貯蓄)’, 오늘부터 저축강조주간(貯蓄强調週間) 실시(實施)」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 1939년 6월 15일자에는 백억저축장려 강조주간을 맞이하여 ‘일억일심’과 ‘백억저축’의 표어를 담아 내건 현수막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일억일심 백억저축’을 표어로 한 백억 원 저축장려의 강조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하여 오는 21일까지의 일주일간 계속하기로 하였다. 전시 아래 긴장은 저축에 있으므로 이번 전국적으로 백억 원을 저축하게 되었으며 조선서는 3억 원을 저축하게 되었는데 오늘부터 큰 회사와 공장, 기타 각 방면에서 상여금이 쏟아질 것을 계기로 하여 각 금융기관에서는 저축장려의 깃발을 높이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되었고 은행과 우편국소에서는 사변국채(事變國債)를 사라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각 우편국소에서는 오후 5시까지 예금시간을 늦추는 외에 금융조합, 저축은행 같은 데서는 토요일에도 집무시간을 늦추어 저축장려에 철저한 ‘써비스’를 하기로 된 만큼 총후봉공의 적성을 드러내는 마음으로 이번주간에 채권 사는 것과 예금하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구호나 표어는 그 자체가 전시체제의 직접적인 산물이므로, 건물 외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현수막의 존재는 바로 이 시기 전형적인 거리풍경을 나타내는 특징의 하나이기도 한것이다. 따라서 현수막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엽서는 대개 일제패망기의 막바지에 제작 배포된 것들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류의 현수막이 크게 성행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1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현수막(懸垂幕)에도 이 의기(意氣) 보이자」 제하의 기사를 통 어느 정도 그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왼쪽) <매일신보> 1941년 12월 18일자에는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이 개시되자 조선총독부 청사의 외벽에 걸린 현수막이 ‘정의필승’과 ‘단호매진’ 등의 시국구호로 바뀐 사실이 보도되고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이러한 종류의 현수막이 “지나사변(즉, 중일전쟁) 이래”로 걸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주고 있다.

오른쪽) <매일신보> 1937년 12월 14일자에는 중일전쟁 당시 ‘남경함락’을 계기로 기존의 ‘황군만세’와 ‘생업보국’이라는 표어를 ‘국위선양’과 ‘견인지구’로 변경하여 시국인식(時局認識)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삼는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관청, 학교를 비롯하여 은행, 회사, 공장 같은 큰 건물 정면에는 지나사변 이래 시국에 관한 표어를 대서한 현수막(懸垂幕)이 걸려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국의 긴장을 감득케 하고 있는데 총독부의 현수막에 나타나는 표어는 그때그때 미나미 총독의 뜻을 받아서 시국에 적절한 문자로 전선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터이다. 지난 8일 개전의 쾌보가 들어오자 총독부 현수막은 곧 ‘임전체제(臨戰體制)의 완성(完成)’, ‘총력발휘 총진군(總力發揮 總進軍)’ 대신에 ‘정의필승(正義必勝)’, ‘단호매진(斷乎邁進)’으로 바뀌어 대동아전쟁이 정의에서 시작된 전쟁이니 승리는 틀림없는 일이다, 총후국민은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단호매진할 뿐이라는 총력전의 골자를 단적으로 표시하였는데 거리에는 아직도 예전 것을 그대로 달고 있어 개전 후의 현 정세에서는 기운 빠진 감을 주는 표어가 있으므로 총독부에서는 곧 현 정세에 맞는 표어로 고쳐서 달기를 요망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 대형 현수막이 길거리의 큰 건물에 내걸린 것이 1937년 7월 7일에 개시된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이래의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판국에 1941년 12월 8일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으로 침략전쟁의 양상이 확산되면서 전시총동원체제의 골이 한층 깊어지게 되자, 전쟁수행을 독려하기 위해 훨씬 더 노골적인 구호와 표어가 쏟아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야말로 가히 현수막의 전성시대로 표현해도 좋을 만한 그러한 시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른바 ‘시국표어(時局標語)’에 관한 흔적을 뒤져보니, 일찍이 만주사변(滿洲事變)과 만주국(滿洲國) 성립의 여파가 한창 진행중이던 당시에도 이러한 표어의 활용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 1932년 12월 18일에 수록된 「시국표어모집(時局標語募集), 총독부(總督府)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본부(本府)에서는 금회(今回) 좌기(左記)의 요령(要領)으로 시국(時局)에 관한 표어(標語)를 일반(一般)에게서 모집(募集)하기로 되어, 이번에 경성부(京城府)에도 그 뜻의 통첩(通牒)이 있었다.하나, 난국타개(難局打開), 자력갱생(自力更生), 정신작흥(精神作興) 등에 관한 것.
하나, 한 사람이 몇 문항이라도 차지(差支) 없음.
하나, 국어(國語, 일본어), 언문(諺文, 한글)을 가리지 않음.
하나, 체절기일(締切期日, 마감일자)은 소화(昭和) 8년 1월 20일.
하나, 응모표어(應募標語)는 주소(住所) 및 직업(職業), 씨명(氏名)을 붙여 학무국 사회과(學務局 社會課) 앞으로 송부(送付)할 것.
하나, 입선(入選)의 표어는 작자명(作者名)과 함께 적당(適當)한 방법(方法)으로 발표(發表)하고, 표어는 제1항 취지(趣旨)의 철저상(徹底上) 본부(本府)에서 이를 이용(利用)함.
하나, 입상자(入賞者)에게는 1등 1인 30원(圓), 2등 2인 각 10원, 3등 3인 기념품(記念品)을 증정(贈呈)함.

 

그 결과 “서라! 자력(自力), 펴라! 국력(國力)”, “자력(自力)보다 더 좋은 재물(財物)은 없다”, “나라에 의지 말고 나라를 져라”, “의기(義氣)다. 힘이다. 팔뚝이다!”, “땅 파는 괭이 끝에 빛나는 일본(日本)”, “일하는 사람에 걱정이 없다”와 같은 응모작품이 ‘시국표어 당선작’으로 뽑혔다. 그 이후 ‘지나사변’의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견인지구(堅引持久)’, ‘협심육력(協心戮力)’, ‘시간극복(時艱克服)’, ‘국체명징(國體明徵)’, ‘황도선양(皇道宣揚)’ 따위의 구호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또한 <매일신보> 1937년 12월 13일자에 수록된 「국위선양(國威宣揚) 견인지구(堅引持久), 제2단계(第二段階)에 들어간 시국표어(時局標語), 민중인식(民衆認識)을 일층강화(一層强化)」 제하의 기사를 보면, 그동안 사용해왔던 ‘황군만세(皇軍萬歲)’와 ‘생업보국(生業報國)’이란 것을 바꿔 새롭게 ‘국위선양(國威宣揚)’과 ‘견인지구(堅忍持久)’라는 구호로 변경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종로네거리 화신백화점 옥상에 등장한 ‘전광속보대(電光速報臺)’의 모습이 소개된 <매일신보> 1937년 12월 7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 장치는 그 직후 물자절약시책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41년 11월에 이르러 시국표어와 뉴스를 전광문자로 내보내는 기능이 부활되었다.

 

본부에서는 남경(南京, 난징) 함락을 계기(契機)로 하여 시국은 일전하여 제2단계에 발전하였으므로 반도 총후국민의 대시국 인식도 더욱 철저 시킬 필요가 있다 하여 본부에서는 이것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표어(標語) ‘황군만세(皇軍萬歲)’, ‘생업보국(生業報國)’을 12일부터 ‘국위선양(國威宣揚)’과 ‘견인지구(堅忍持久)’ 의 표어를 내걸기로 되었는데 동시에 각도에 대하여도 이와 같이 하도록 통첩을 발표하였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시국표어들이 비단 ‘현수막’의 형태로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시절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전광속보대(電光速報臺)’도 유용한 선전수단의 하나로 적극 활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1년 11월 12일자에 수록된 「총력전광신문(總力電光新聞), 연맹(聯盟)에서 화신 옥상(和信 屋上)에 설치(設置)」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장안 도심의 한복판 밤의 거리에 총력연맹의 전광신문(電光新聞)이 등장하게 되었다. 밤의 종로 일각에 우뚝 솟은 화신(和信) 백화점 옥상에서 현란히 움직이던 전광 뉴스가 전기절약이란 국책에 순응하여 자취를 감춘 이래 밤의 종로거리는 일종의 적막감을 느끼어 왔는데 다시 시국선의 각광을 입고 등장, 백만 부민의 눈을 집중시키게 된 것이다. 이것은 화신에서 총력연맹 선전부의 띄을 받아 부민들의 좌우명이 될 만한 시국적 표어 혹은 뉴쓰를 전광문자로서 알리기로 된 것으로 이번은 “민나 하다라께(ミンナハタラケ; 모두 일하자)”라는 국민개로 운동의 좌우명이다. ‘밤의 하늘’ 종로에서 현란히 발산하는 전광의 표어, 이것은 백만 부민에게 보내는 진군령(進軍令)과도 같다. (사진은 전광 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전시구호와 표어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자 이런 종류의 것들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연감(年鑑)으로 묶어내고, 이것을 참고하여 향후 효율적인 표어 제작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사실도 포착된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1년 10월 31일자에 수록된 「국책표어연감(國策標語年鑑) 정보국(情報局)서 출판(出版)」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담겨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간단명료한 표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계발선전에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음에 비추어 정보국에서는 지금까지 각 방면에서 만들어진 6만의 국책표어 중에서 우수한 것으로 4천 구를 선출하여 필요에 따라서 조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국책표어연감을 편찬하여 3천 책을 인쇄하고서 각 관청, 공공단체, 신문잡지사, 백화점 등에서 이용하도록 30일 각기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입헌(立憲)의 금수(錦繡)는 자치(自治)의 기(機)로 짠다”(대정 11년 내무성 선정)는 것으로부터 “국방(國防)으로 보라, 생산(生産)의 철진(鐵陣)”(소화 16년 정보국 선정)에 이르기까지 변천무쌍한 세태를 반영하면서 국민정신작흥, 경제강화, 국력진흥 등에 몇 마디로서 잘 효력을 발휘한 각종 표어를 모은 것이다. 이 표어 연감의 출현으로서 국책표어의 산일과 유사표어의 난출방지를 할 수 있는 외에 표어의 ‘만네리즘(매너리즘)’을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른바 ‘결전체제(決戰體制)’의 형태로 전환하면서 그동안 사용해왔던 구호와 표어 역시 한층 더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국면에서는 전쟁물자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이나 노무동원(勞務動員)에 초점을 둔 어휘들이 애용되었다. <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자에 수록된 「결전표어(決戰標語) 결정(決定)」 제하의 기사도 이러한 흔적의 하나이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전쟁 제3년을 결승[決勝]의 해로 하자”라고 말한 도죠(東條) 수상의 선언에 기하여 정보국과 대정익찬회가 협의한 결과 19년도(1944년도) 벽두를 당하여 1억 국민 전부가 전투배치에 서서 금년이야말로 기필코 적을 격멸하겠다는 결의를 더 한층 굳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표어를 만들어 신문잡지 등 모든 선전기관을 통하여 널리 선전하여 국민의 각오를 일층 철저히 하기로 되었다.
일(一), 決戰の年と 誓はん 今年こそ. [결전의 해라고 맹서하자, 금년이야말로.]
일(一), 決戰へ 全一億の體當り. [결전에 전 1억의 육탄공격.]
일(一), 作れ, 送れ, 擊て. [만들어라, 보내라, 쳐부숴라.]
일(一), 第三年 行くぞ 今度は 俺の番. [제3년 가자, 이번에는 내 차례.]
일(一), 作るぞ, 擊つぞ, 勝ち拔くぞ. [만들자, 쳐부수자, 이기자.]
일(一), 決戰へ 持場, 職場で 突擊だ. [결전에 맡은 직분, 직장에서 돌격이다.]
일(一), 決戰へ 今ぞ 一億 總突擊. [결전으로 이제 1억 총돌격.

 

<매일신보> 1940년 5월 1일자에는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문루에 내걸린 ‘국민건강주간’ 현수막과 ‘건강보국’, ‘아동애호’ 등 구호판의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이를 통해 대형건물이건 고적유물이건 간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일제에 의해 이러한 종류의 시국 선전물이 부착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성일보> 1943년 12월 17일자에는 다양한 종류의 결전구호와 선전물이 포함된 현수막이 줄줄이 걸려 있는 경성부청 청사의 외관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결전저축총궐기운동’, ‘후생사업강조주간’, ‘특별호별세 등 납부’와 아울러 전쟁물자조달을 위한 ‘금속공출일’과 같은 전시동원체제의 일상사와 관련한 내용들이 두루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이 가운데 “작, 송, 격(作, 送, 擊)”이라는 표현은 종종 “조, 송, 승(造, 送, 勝)”이라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했는데, <조광(朝光)> 1944년 6월호에 게재된 이건혁(李建赫)의 수필 「조·송·승(造·送·勝)」에는 이 글자에 대해 “만들자, 보내자, 이기자”도 되고 “만들어서 보내면 이긴다”는 말도 된다고 설명한 구절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어가 나타나게 된 진의(眞意)는 ‘비행기(飛行機)’를 얼른 많이 만들어 보내자는 말인 것 같다고 하면서, 결전(決戰)의 결전(決戰)인 지금에 가장 급(急)하고 긴(緊)한 것이 비행기 생산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덧붙이기도 했다.
거듭된 침략전쟁의 뒤끝에 마주하게 되는 물자부족과 인력부족이라는 사태가 단순히 시국표어나 전시구호와 같은 몇 마디 말로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그것이 식민지 조선인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수탈하고 속박하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자니 대형 건물의 외벽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현수막, 확실히 그것은 결전체제를 다잡는 또 하나의 전쟁무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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