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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월 말, 건국대에 모인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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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5) 애학투련과 86년 건국대 항쟁

신군부 계엄·광주 비극 등에 충격
NL계 주도 연합체 건국대서 항쟁
경찰, 무장헬기·사과탄 등 동원해
1288명 단일사건 세계 최다 구속

“하느님께 욕된 말을 삼가라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빗나간 생활을 함으로써 죽음을 초래하지 말고 그릇된 행위로 파멸을 초래하지 말라.”(지혜서 1,11-12)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겠느냐?”(루카 14,28)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시구는 윤동주 시인의 확신과 신념입니다. 하늘을 생각하며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시인의 결단은 숭고하며 그 자체가 웅변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고비 고비마다 숱한 윤동주가 존재합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선조들과 동체감을 느낍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우리는 선조들이 겪었던 아픔과 죽음을 똑같이 체험합니다. 선조들과의 동체감이 바로 민족애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공감이 바로 신비체와 공동체의 원리이며 불의와 폭압에 맞서 싸우는 청년의 열정입니다.

1986년 10월 28일 건대항쟁 당시 참여한 학생들이 건국대 교내 호수인 일감호 옆을 행진하고 있다. 건대신문 제공

NL·PD로 갈라진 학생운동

1970년대 우리 가톨릭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어낸 이들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던 청년학생들입니다. 어느 날, 저는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민족통일에 투신한 청년학생들의 행업에 큰 감동을 받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재희 선생은 그 감흥을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셨습니다.

“신부님, 그것은 김일성과 박헌영이라는 두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해방·통일을 우선하는 김일성 사상과 노동자·농민의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기초한 박헌영의 해방운동입니다. 민족해방과 노동자·농민 해방운동 중 무엇을 우선하느냐에 따라 둘의 성격이 구분됩니다. 한마디로 민족해방(NL)은 김일성, 노동자 해방(PD)은 박헌영 노선입니다.”

저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새삼 ‘아! 뿌리를 알아야 하는구나!’를 깨달았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혁명을 통해 일제 잔재와 부르주아 현상을 깨끗이 제거하고 인민을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주체사상, 수령론을 토대로 오늘날과 같은 가부장적 종교체제의 독재국가 제도를 형성했습니다.

반면 남한은 미군정을 거치면서 반공체제에 기초해 친일 관리들을 수렴한 비정상적 국가체제를 이루었고 특히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부를 거치면서 외형상으로는 민주주의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반공독재라는 일그러진 체제를 형성합니다. 이에 항거한 지성인들이 바로 건강한 민족해방주의자, 민족주의자들입니다. 하지만 반공이 국시인 시대였기에 이들은 오직 인권, 자유 등의 부르주아적 가치만을 주창하며 활동했습니다.

대학이 주도권 장악한 민족해방계열

1970년대까지 재야 운동권이 주창한 것은 매판자본론과 종속이론, 반독재 자유주의 등에 기초한 자본주의 비판이었습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통제, 한국전쟁이 유발한 공산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1960-70년대 남한에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내건 세력도 있었고, 1960년대 총선에서 사회주의 계열 정당인 사회대중당이 의석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통일사회당이 합법 정당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10·26과 함께 서울의 봄이 도래했습니다. 민주화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학생운동 세력은 확실한 노선을 정립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전두환 군부 계엄령 철폐’를 관철하지 못한 채 결국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결정합니다. 이에 신군부는 5·17 전국 계엄령 확대 조처를 통하여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전국 대학생 대표들과 정치인 등을 모두 체포하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면서 오월 광주의 비극을 연출합니다.

일련의 상황에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정확히는 카터 행정부)의 인권 외교를 믿었고 미국을 우방으로 여겼지만 미국의 수수방관으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시민민주주의, 자유주의 민권운동에 국한된 이론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정권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공세가 강화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은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민족해방(NL) 계열의 학생운동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우선 지역별로 투쟁위원회 연합을 조직합니다. 1986년 10월 초부터 서울의 서부·동부·북부·남부 지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을 결성하고, 10월 28일에는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애학투련은 전국 8개 지역 26개 대학의 투쟁위원회가 연대한 조직으로 중앙의장단은 지역의장단의 대표들로 구성되고, 지역의장단은 지역 내 각 대학의 투쟁위원회 위원장들로 조직되었습니다.

건대항쟁 직후 한 학생이 허탈한 듯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건대신문 제공

3박4일 대치 끝 1288명 구속

애학투련은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분쇄하고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족자주와 민중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전두환 일당의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하며,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철폐하고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실현’한다는 등의 투쟁 목표를 설정했습니다.(강신철 외, <80년대 학생운동사> 1988, 260∼261쪽) 애학투련의 결성식이 예고되었던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는 아침부터 많은 학생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경찰은 이미 정보를 입수했지만 학생들의 진입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오 무렵 경찰은 학교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학생들을 건물에 몰아넣은 뒤 전기와 물을 끊었습니다. 10월 말의 차가운 날씨에 첫눈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엄청난 경찰 병력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추위와 허기, 갈증까지 고스란히 견뎌 내야 했습니다. 일부는 건물 사이에 줄을 연결해 먹을 것을 나누고 옥상 물탱크의 물로 목을 축이기도 했습니다. 대치 상태는 3박 4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경찰은 관제언론을 동원해 ‘빨갱이 도시 게릴라, 공산혁명 분자의 점거 난동’으로 매도했습니다.

그리고 10월 31일 아침 9시께, 학생들이 거의 탈진해 있을 때 8500여 명의 경찰병력과 무장헬기가 동원되어 사과탄과 소이탄을 터뜨리고 고가 사다리로 최루액을 뿌리면서 도서관부터 진입했습니다. 건국대 쪽은 총장까지 나서서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와 자진해산을 전제로 경찰병력의 철수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묵살했습니다. 이날 1525명이 연행되었는데, 이 중 1288명이 구속되고 29명에게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단일 사건으로 세계 최다 구속자라는 기록을 세웠고 NL 계열의 학생운동은 극심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진압 직후 전두환 정권은 고무되었습니다. 공산분자들이 모조리 뿌리 뽑혔으니 더 이상 캠퍼스에서 시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세상일이 의도대로 되지 않듯이 건국대 항쟁도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지하 서클에서 학생운동 대중화로

우선 대규모 학생 집회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유의 경찰력을 동원해 학생운동의 초토화를 기했으나 오히려 건국대 항쟁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의 저변이 넓어지고 대중화 흐름을 타게 된 것입니다. 건국대 항쟁 전까지는 지하 서클 위주로 학생운동이 이루어졌다면, 이 사건으로 지도부가 전원 구속되자 대학의 총학생회 중심으로 운동권이 재편됩니다.

애학투련 사건은 전두환 정권 말기의 암울했던 분위기를 일신합니다. 학생들은 6·10 민주항쟁의 주축이 되었고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하였으며 1989년에는 임수경 학생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파견합니다. 1993년에는 전대협을 계승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결성되었으나 IMF 사태를 거치면서 청년학생들의 운동은 내리막길로 접어듭니다. 1980-90년대 청년학생들의 헌신을 기리며 미래 청년들의 더 아름다운 창조적 행업을 희망합니다.

건대항쟁 3주년 집회가 열린 1989년, 아이들이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상황을 구경하고 있다. 건대신문 제공

우리 시대는 이제 전두환과는 확실한 결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아직까지도 박정희와는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뿌리는 바로 박정희 유신독재입니다. 그러니 박정희와 제대로 결별해야 전두환과 완벽하게 결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느님, 2천여 년 전 로마 식민지배 시대에 예수님의 고향 팔레스틴 갈릴레아를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어부와 세리, 혁명당원들을 뽑으시어 새 하늘 새 땅을 실현하고자 하셨던 그 열정을 되새기며 병자들과 여성들, 가난한 이들과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 투신하셨던 청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기도합니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항일 독립투사들, 독재에 항거하며 민족 분단을 타파하고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 몸 바친 청년학생들의 순교적 결단을 기립니다. 이들의 초심을 간직하여 저희 모두 뜻을 모아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들의 투쟁에 함께해 아름다운 공동체, 새 하늘 새 땅을 이룩하게 하소서. 하느님, 저희 겨레를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5-30> 한겨레

☞기사원문: 10월 말, 건국대에 모인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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