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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학살자는 국립묘지에, 피해자는 구덩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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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48] 상반된 무덤, 대전현충원과 대전 산내 골령골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의 맨 아래부터 110계단을 올라가면 맨 위쪽 8번째에 함병선 중장의 묘(장군 제1-8)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 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북촌 학살사건은 1949년 1월 17일, 한날한시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 4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집단 총살 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제2연대는 1946년 2월 28일 대전에서 창설된 부대로, 1948년 12월 29일에 제주 제9연대와 교체해 제주에 주둔했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임재근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는 구체적으로 제2연대 3대대다. 3대대는 비밀리에 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해 이른바 ‘서청대대’라 불리었다. 대전현충원에는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던 인물도 안장되어 있다. 바로 서북청년회 초대위원장을 지낸 선우기성(독립유공자 1-85)과 서북청년회 중앙본부 위원장을 지낸 문봉제(경찰1-501-8)다.

4.3 사건 당시 3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은 대전형무소로 끌려왔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모두 학살됐다. 이들은 70여 년 동안 대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의 땅속 긴 구덩이 속에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4.3사건의 가해 책임자들은 정반대 편, 대전의 서북쪽에 위치한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에 주둔하기 직전 제2연대는 여수에서 봉기한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순천과 여수에 투입되었다. 제2연대(1, 2대대, 3대대 일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 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한 뒤 북국민학교와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으로 취조했고, 건물 뒤편에서 집단 사살했다.

제2연대는 여수에서 협력자 색출에도 주력했다. 여수 사람들을 서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우익청년단원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협력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 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협력자로 분류하였다. 일명 ‘손가락총’이다. 협력자로 분류된 사람은 학교 뒤 밭의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로 즉결 처형되었다.

일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오동도, 만성리 등에서 학살되었으며, 무기징역, 20년 징역, 5년 징역 등을 선고받은 사람은 전주, 대전, 대구, 김천 형무소에 수형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이 학살되었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임재근

여수와 순천 진압군으로 제3연대도 투입되었는데,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은 여수지구계엄사령관을 맡으면서 여수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지휘 책임을 갖게 되었다. 송석하도 1955년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해 사후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1-93)에 안장되어 있다.

송석하는 친일 인물이기도 하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고,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어,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됐다. 만주국군 중위·간도특설대 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백선엽도 여순사건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국장으로,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한 인물이지만 대전현충원 장군묘역(2-555)에 안장됐다.

대전현충원에는 여순사건 때 사망한 민간인도 함께 안장되어 있는데, ‘김영준’이란 인물이다. 김영준은 일제강점기 사상범의 보호관찰 업무를 담당하던 촉탁보호사 활동을 했고, 군용기 구입비와 국방금품 헌납 등 친일활동에 앞장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김영준은 여순사건 과정에서 친일이력과 우익활동을 이유로 ‘여수 인민위원회’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애국단원 신분으로 대전현충원 경찰묘역(경찰2-511-2384)에 안장됐다. 묘비에는 ‘전사’로 표기되어 있지만, 김영준은 당시 50살로 경찰이 아니었고, 전투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 여순사건 희생자의 유가족이 지난 2020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을 지켜보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임재근

여순사건도 4.3사건과 마찬가지로 가해 책임자 또는 우익희생자는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묻힌 반면, 피해자들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학살됐다.

또 다른 가해자 중 한명이 오제도 검사도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8번)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국민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전국 각지에서 예비검속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는데 특히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요 희생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임재근(seocheon)

<2022-05-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학살자는 국립묘지에, 피해자는 구덩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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