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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NEWS][특파원 리포트] ‘노예란 바로 이런 것’ 여든여덟 日 할머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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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2시간 남짓. 후지산에서 멀지 않은 야마나시(山梨)현의 한 작은 마을로 향했습니다. 어렵게 찾아간 노지와 마사코(野澤真砂子) 씨의 집에 모인 3명의 여성을 만났습니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출간된 일제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의 자서전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을 함께 읽은 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의 자서전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이어가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기억들. 이들은 책을 읽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의 자서전 ‘빼앗긴 청춘 뻬앗긴 인생’

아무것도 모르는 앳된 소녀들을 일본이 전쟁에 동원했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웠고, 지금까지 이런 역사를 잘 몰랐다는 것도 충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평생을 힘겹게 싸워온 할머니들이 온 힘을 다해 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고 전했습니다.

할머니들의 자서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일본인들

여든여덟 고령의 나이에도 책을 하룻밤에 다 읽고 말았다는 노자와 씨.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 대신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라도 전하기로 했습니다.

빼앗긴 청춘 빼앗긴 인생을 읽고 원고지에 자작시를 쓰는 노자와 마사코 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평소 취미로 해 오던 시와 단가를 쓰는 것뿐. 노자와 씨는 ‘할머니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할머니들에게 보내왔습니다.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과 비슷한 나이인 노자와 씨는 시에서 할머니들을 ‘이웃나라 소녀’라고 표현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 땅에서 전쟁을 겪은 그 소녀들은 자신의 눈에도 ‘노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머니의 노래>

송두리째 빼앗겼네 꽃다운 청춘
할머니 글은 서글픈 기록의 바다

이웃 나라 소녀들이 끌려온 전쟁은
슬픔을 쏟아내는 평생의 상처로다

자서전 속 풍기는 인간의 향기
되돌리는 외침에 얼얼한 깊은 밤

노예란 바로 이러한 것이려나
끌려온 이웃나라 소녀들의 진실한 기록

빼앗긴 청춘, 청춘이려니
일본 전쟁에 일조하는 소녀 노예들

속아서 끌려 온 꽃다운 청춘들
슬픔 토하는 기록 읽는 그대여!
잠 못 이루는 밤이로구나

노자와 씨는 할머니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냐고 묻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신 할머니들께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쉽지 않은 인생,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노자와 씨와 함께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마을의 다른 이들도 감상문 보내기에 동참했습니다.

이들이 사죄와 반성의 뜻을 담아 적어 보낸 글은 일본의 시민단체 ‘나고야소송지원회’와 한국의 시민단체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을 통해 할머니들에게도 전달됐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로부터 할머니의 ‘자서전’이 도착해 단번에 다 읽었습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사실에 몸이 떨렸습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역사의 진실을 은폐 왜곡하고, 교과서 검열은 물론 강제연행 사실을 감추고 사도광산(佐渡の金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하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한 권의 귀중한 책을 만났습니다. 할머니의 ‘자서전’은 살아있는 증언, 역사의 진실을 전하는 실로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마다 히로미(山田弘美)

이렇게 끔찍한 짓을 했다니 일본인으로서 마음이 아프고, 그날 밤은 잠들지 못할 정도의 충격이었습니다.
세 분의 수기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일본 정부가 사과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라고만 생각했을 뿐, 더 이상 생각해보는 일 없이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70여 년 동안 (계속)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야자키 노부코(矢崎信子)

피해 할머니들의 소송으로 인해 한국 내 ‘자산 현금화’가 예고돼 있는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에 직접 항의의 편지를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야시 야스자와 씨는 “할머니들의 자서전을 읽어보고 사죄와 배상에 나서라”며 미쓰비시중공업 사장 앞으로 지금까지 다섯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재일교포 하야시 야스자와 씨가 강제징용 사죄를 촉구하며 미쓰비시 중공업 사장에게 보낸 편지

강제징용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편지 보내기’는 그동안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금요행동’ 집회를 열어 온 나고야 소송지원회가 코로나 19 확산으로 인해 집회가 어려워지며 시작됐습니다.

평범한 일본인들의 소중한 목소리인 만큼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도 이들이 보내 온 편지를 하나하나 모아 널리 알려 나가기로 했습니다.

지종익 기자 jigu@kbs.co.kr

<2022-05-31> KBS NEWS

☞기사원문: [특파원 리포트] ‘노예란 바로 이런 것’ 여든여덟 日 할머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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