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문경 석달마을 사건 진상규명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씨
한국 전쟁 전후로 국가가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존재한다.
영화 <바람난 가족> 도입부에서 변호사인 황정민은 차를 몰고 어느 산골짜기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 곧이어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유가족들과 소란이 벌어진다.
이때 유가족들 중 빨간 베레모를 쓴 한 노인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보조 출연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문경 석달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자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이다.
한겨울의 토요일 오후, 문경 석달마을
1949년 12월 24일 정오 무렵, 문경 석달마을에 70여 명의 군인이 들어온다. 이들은 태백산 일대 빨치산 소탕을 위해 나선 태백산지구사령부 예하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소속이었다.
부대는 인근 지역의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더 이상 정찰대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며 집집마다 불을 지른다. 그리고 마을 앞 논으로 주민들을 불러 모은다. 곧이어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았다. 1차 사격 후 생존자들을 일으킨 다음 다시 사살한다.
잠시 후 마을 청장년 몇 명이 마을로 돌아오던 중 입구에서 몇 명의 군인들을 만났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이어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을 아이들도 이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청장년들과 아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아이들은 쓰러졌고, 몇몇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깔리며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들 중 한 명이 채의진이었다.
사건 이후, 정부의 대처
이날 마을에 있던 24채의 가옥이 모두 불탔다. 그리고 주민 127명 중 86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가까스로 살아남은 41명 중 12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불과 29명(22.8%)였다. 사실상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없앤 것이나 다름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이었다. 그리고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었는데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아기가 5명이었다. 일가족 전체가 희생된 집도 5가구였고, 6가구는 대가 끊겼다. 채의진은 9명의 가족과 친척을 잃었다.
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무장공비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보고한다. 하지만, 정부는 곧 해당 사건을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사건을 은폐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문에도 공비 70명이 마을 주민을 죽였다고 나왔고 이는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사건 직후 문경 경찰서는 자체 조사에서 석달마을은 공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조사 결과는 묵살되었다.
1950년 1월 17일, 김용 초등학교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문한다. 그는 석달마을 주민들에게 100만 원을 건넨다. 그런데 이 돈은 배상이나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이었다. 이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 사건을 계속 공비가 저지른 것으로 호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장관은 유족들과 사람들 앞에서 해당 사건은 공비가 저지른 것이며 한층 더 투철한 반공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정부의 은폐 시도 와중에도 미군은 이미 가해자가 한국군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별도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1997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다.
이 문서는 당시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의 서한철 중 일부였다. 여기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석달마을 주민들을 소총과 유탄발사기, 수류탄, 총검 등으로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문서에서는 석달마을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로 의심할 근거가 적으며 오히려 두 번이나 군경의 작전에 협조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1950년 2월 15일 미 극동군사령부의 비밀전문(NO 2176)에는 해당 사건의 책임자는 기소되어 처형될 것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뒤이어 한국군은 이 사건을 숨기길 바라고 있으며 한국 언론들도 해당 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도 사단장과 연대장을 해임했을 뿐 법적 처벌은 없었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들의 진상규명 목소리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곧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이런 목소리를 반국가 행위로 규정한다. 채의진은 수배자가 되었고 조카와 다른 유족들은 구금된다.
수배령 해제 이후 채의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21년 간 영어 교사로 재직한다. 하지만 원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1986년 교사를 그만두고 진실규명에 뛰어든다.
채의진은 누군가가 억울함을 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퇴임 후 한국해양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한국군이 민간인을 죽인 이유를 물어보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입구에서 가로막혀 결국 만나지 못했다.
1983년, 서울에서 채씨 친족 모임이 있었다. 이들은 석달마을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11대 국회의장이 된 채문식도 참석했다. 사람들은 채문식의 국회의장 취임을 축하했지만, 채의진은 학살사건을 모른 체하는 채문식에게 분노했다. 그는 채문식을 향해 ‘정부의 개’라고 소리치며 간장을 부어버린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부에 진실규명을 요구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언론에도 수 차례 제보했지만 역시 관심을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미국 언론에 사건 보도를 요청하기 위해 < UGLY SOLDIERS >라는 영문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실제 보도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채의진은 이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증거를 찾고 정리했다.
사건의 전말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에 육군 본부는 ‘전사 자료 미보유로 확인 불가’라는 무책임한 답을 반복했다. 그러자 채의진은 1995년에 직접 가해 부대를 찾아냈고 이를 <시사저널>의 정희상 기자가 보도한다. 앞서 말한 미군의 사건 조사 기록도 1997년에 채의진이 직접 미국에 가서 가져온 것이다.
채의진은 석달마을 사건을 넘어 전국 차원의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는 자신들의 사건 해결에만 집중하는 유족들을 설득하여 활동가들과 연결시켰다. 비록 직선적인 성격으로 마찰도 있었지만, 채의진의 이런 노력은 민간인 학살을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인권 유린 문제로 환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정부와 정치들에게는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많은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은 정치인들에게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채의진은 그러지 않았고 가해자인 국가를 준엄하게 꾸짖으려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피해자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진실 규명의 딜레마
진실화해위원회의 석달마을 사건 진실규명 이후 채의진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바로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하지만 유족들 상당수는 긴 싸움으로 지쳐서 소송에는 채의진을 비롯한 네 명만 참여한다.
1심과 2심에서는 유족들이 패했는데, 그 근거는 공소시효의 만료였다. 하지만 이는 2011년 대법원에서 뒤집힌다. 국가의 억압으로 인해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자체를 제기할 수 없었던 상황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이후부터 공소시효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판결 직후 국가는 배상금을 지급한다.
이렇게 싸움은 끝난 듯했지만 국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고, 정부는 배상금이 과도하다며 반환 소송을 걸었다.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지급한 배상금을 다시 빼앗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5년, 대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준다.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규명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바로 국가가 가해자이면서 진실 규명의 주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여전히 가해자와 그 추종 세력들이 정부와 국회에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권에 상관없이 국가는 진실 규명에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스스로 증거를 찾고 이를 국가에 인정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바람난 가족>의 도입부에서 땅을 파다가 유골이 나오자 유족들이 던지는 대사는 이런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죽인 적이 없다고? 안 죽였는데 여기 왜 나와?”
국가는 끝까지 비겁했고, 채의진은 2016년 6월 28일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오마이뉴스, <민간인학살 희생자 목숨 값 깎는 대법원>, 2014. 6. 12
정희상, 최빛, <채의진 평전, 빨간 베레모>, 시사IN북
진실화해위원회, <문경석달사건>
한성훈, <학살, 그 이후의 삶과 정치>, 산처럼
박기철(rocky8088)
<2022-05-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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