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우리 모두가 아는 을사오적 이완용. 순종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려던 1928년, 이 사람이 순종 시대에 공을 세운 신하로 뽑혀 종묘에 함께 모셔질 뻔했다. 나라 팔아먹은 자에게 준엄한 질타를 하진 못할망정, 공신이라니! 하마터면 이완용이 조선 종묘의 제삿밥을 받아먹는 꼴을 볼 뻔한 것이다.
1928년 5월, 원로대신과 종친들은 총 10명의 공신 후보자를 놓고 투표하여 문헌공 송근수,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 효문공 서정순 등 4명을 뽑아 이왕직에 보고했다. 이왕직은 일제시기에 조선 왕실 사무를 담당한 곳이다. 그러나 정작 이왕직의 장관은 최고점인 김병시, 이경직을 보류하고 이완용을 넣어 3명으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 이완용은 원래 후보도 아니었는데 장관의 강요에 후보로 올랐으나 1표밖에 못 얻은 터였다.
투표에 참여한 원로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더구나 이는 이왕직의 기존 원칙과도 어긋났다. 고종의 공신에 최익현을 넣자는 얘기에, 최익현이 ‘○○공’ 같은 시호가 없다며 막아선 게 이왕직이거늘, 이번엔 시호도 없는 이완용을 넣자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왕직은 장관이 이완용계 사람이요, 실세는 이완용의 둘째 아들과 그와 친한 일본인 차관이었으니 어떤 배경으로 일이 진행된 건지 짐작할 만하다. 이렇듯 시끌시끌했던 순종의 배향공신 문제는 송근수와 서정순만 배향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넣고 싶어 한 이완용을 못 넣었으니 이왕직은 실패한 것인가? 한발 더 들어가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김병시와 이경직을 배제하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충’ 자 돌림 시호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하라. 김병시는 아관파천 이후 친러 내각의 총리대신을 맡고 온건보수의 길을 걸은 인물이고, 이경직은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와 함께 살해된 인물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충’ 자 시호를 받은 것이었으나 그 ‘충’이 일제가 바라던 것은 아니었다. 이왕직에서 이완용을 넣어 논란을 일으킨 것은 어쩌면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일종의 ‘어그로’였을 수도 있다. 그러다 되기라도 하면 금상첨화고.
이왕직에서 최익현을 고종의 공신에서 제외시켰을 때는 그가 시호가 없다는 핑계라도 붙였다. 물론 이것 역시 시호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을사늑약에 의병을 일으키고 대마도에서 단식해서 죽은 최익현을 배향공신 같은 것으로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갖다 붙인 핑계였을 뿐이다. 그런데 순종 공신을 뽑을 때는 김병시와 이경직이 왜 배제되었는지에 대한 마땅한 설명이 붙지 않았다. 그냥 이왕직에서 배제하면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 이 점에서도 이왕직은 성공한 셈이다.
이런 종류의 일은 아주 흔하다. 사람들이 모두 한곳에 몰려 싸움 구경에 빠진 사이 얼렁뚱땅 다른 일들이 처리되는 것 말이다. 제대로 된 질문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혹은 잘못된 질문에 휘둘려 딴 곳을 쳐다보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질문을 하려다가도 어떤 땐 좋은 질문이 뭔지 몰라 못하기도 하고, 어떤 땐 해야 할 질문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소용없는 짓에 에너지를 쓰기 싫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포기하는 그 순간, 질문받지 않은 잘못된 일들이 정당함을 얻고 세상을 활보하기 시작한다. 원로대신들이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 최익현이나 이경직 같은 이가 정말로 조선의 공신으로 종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될 줄 알면서도 조선의 마지막 충신들을 후보자로 올린 이 옛사람들의 꼬장꼬장함에 피식 웃음 짓게 되면서도 어떤 힘을 느낀다. 피곤하더라도 냉소하지 않고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머리 쓰기 싫어도 무엇이 좋은 질문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 살다보면 그런 게 특히 필요한 시대가 있다. 어쩌면 지금.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22-05-05> 경향신문
☞기사원문: 종묘에 모셔질 뻔한 이완용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