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배정자
연예인 이상의 주목을 끈 친일파가 있다. 사회적 지탄도 받았지만, 그 이상의 관심을 끌었다. 1966년에 배우 김지미가 그를 연기했고, 2012년에 배우 한채아가 그를 연상시키는 배역을 연기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요녀’로 지칭한 배정자가 바로 그다.
김지미 영화인 <요화 배정자>는 요화로 불렀지만, 임시정부 기관지는 요녀로 불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선언에 따라 대한민국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고 있고, 임시정부의 기관지는 그를 요녀로 지칭했다.
‘요녀’로 불린 친일파
본명이 배분남인 배정자는 고종 임금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실질적 군주가 되기 3년 전인 1870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했다. 김해 아전 배지홍의 딸인 그는 네 살 때 아버지가 역모죄로 처형되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역모죄인이 된 것은 흥선대원군과 연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구한말 역사서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운현궁 쪽 사람으로 지목되면 풀 베듯 잘라버렸다”고 전한다. 흥선대원군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의 광풍 속에서 배정자의 아버지가 역모죄에 걸렸던 것이다.
가족이 역모죄인 되면 나머지 가족은 원칙상 관노비가 돼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과 함께 달아났고, 9년 뒤인 1883년 배정자를 경남 양산 통도사에 맡겼다. 승려가 되기 싫었던 13세 소녀 배정자는 1년 뒤 도주해 주점에서 일하다 경남 밀양에서 체포됐다. 관노비가 될 처지에 놓였던 그는 아버지의 지인인 밀양부사 정병하의 도움으로 달아날 수 있게 됐다.
정병하는 일본 상인이자 첩보원인 마쓰노 히코노스케(松尾彦之助)에게 배정자를 부탁했고, 마쓰노는 그를 일본행 선박에 태워줬다. 1885년에 있었던 이 일은 배정자가 갑신정변 망명객인 김옥균을 만나고, 1887년에 김옥균의 소개로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재임 1885~1888)를 만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17세 조선 소녀에게 이끌린 이토는 그를 가사도우미 겸 양녀로 삼았다.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란 이름도 지어줬다. 데이코란 이름 때문에 그 뒤 그는 한국에서 배정자로 불리게 됐다.
이토는 배정자에게 수영·승마·자전거·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신문명인 자전거 운전술까지 가르치며 특수 첩자로 키웠던 것이다. 그 뒤 조선에 투입된 배정자는 조선 왕실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하며 일제 침략에 앞장섰다. 또 중국·만주·시베리아 등지에서 현지 일본 영사관과 협조해 한국인들의 동향을 정탐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데도 가담했다.
독립운동가 색출하던 스파이
그는 고종 황제에게도 접근했다. 후궁 엄귀인의 친척을 통해 엄귀인과 고종에게 순차적으로 접근해 고종의 마음을 끈 뒤에는, 고종의 친러시아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49년 발행된 <민족정기의 심판>에 따르면, 배정자는 고종이 무심코 내뱉은 발언을 흘려듣지 않고 일본공사관에 보고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과 친일파들의 죄목을 정리한 이 책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추진 중이던 고종이 배정자 앞에서 “내가 러시아에 가게 되면 정자도 동행하는 게 어떨꼬?”라고 물어봤고, 배정자의 보고를 받은 일본은 고종의 계획을 신속히 무산시켰다.
배정자가 첩보 분야에서만 일본에 충성한 것은 아니다. 여성들을 제국주의 희생물로 전락시키는 데도 간여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에는 조선 여성을 동원해 일본군 위문대를 조직한 후 남양군도에서 위문 활동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1941년이면 그의 나이 71세일 때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후광을 입었을 뿐 아니라 조선 총독과도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일본이 무리하게 강요하기는 힘들었다. 위문대 활동은 그가 그때까지 해온 분야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가 원치 않았다면 일본이 시키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손녀뻘 소녀나 처녀들을 일본군 위안 활동에 동원했다는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도 매우 몰인정했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는 조선총독부 촉탁직 직함을 갖고 활동할 때가 많았다. 여기서 생기는 수당 외에, 굵직한 사건을 처리한 뒤에 보너스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하얼빈에서 조선인들을 설득해 일을 원만히 해결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1000원, 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600원을 기밀비로 받았다”고 설명한다.
3·1운동 뒤에 일본영사관의 공작 활동을 도와주고 1600원을 받았던 것이다. 191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는 상점 점원들이 식사 제공에 월급 10원을 받는 일이 흔했다. 그런 노동자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배정자가 받은 돈은 160명의 월급에 해당한다.
160명 월급에 해당되는 돈을 친일 보너스로
그는 다른 루트로도 일본 자금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21년에 만주 지역 친일무장단체인 만주보민회의 창설을 돕고자 일본 외무성에서 200만원을 끌어다 쓴 사실은 그가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친일행위가 그에게는 수지맞는 장사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지명으로 인천부 신화수리에 거주하는 김삼수라는 독자가 <동아일보>에 질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는 “잇다금식 들리는 배뎡자라는 여자는 엇더한 인물임닛가?”라고 문의했다.
1925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 좌단에 답변을 게재한 기자는 “배뎡자 가튼 분을 물어주셔서 쓰기가 고약합니다”라고 한 뒤 배정자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했다.
이 설명을 들어보면 그의 첩보 활동을 지원하고자 일본 정부가 내준 비밀자금이 의외의 용도로 쓰이는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쓰기가 고약”하다는 위 기자는 1925년 당시 55세인 배정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금 나희가 륙십에 갓가운 쉰일곱이나 되어 머리가 흿검흿검하여 가지고도 행세하기는 마흔여섯이라고 하며, 죽은 그의 아들 뎐유화(田有華, 37)보다도 젊은 삼십 가량된 리광수(춘원은 아니오)라는 새파란 청년과 함께 락텬 생활을 한다고 하며, 방금 동소문 안 엇던 곳에 일간 초당을 새로 짓고 산다는데”
<동아일보> 기자는 33세인 춘원 이광수로 착각하지 말라고 한 뒤 배정자가 30세 남짓의 이광수라는 청년과 함께 즐겁고 안락한 낙천(樂天)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금의 서울 대학로 근처인 동소문 안쪽에 초당을 짓고 조만간 거기서 살게 된다고 설명했다. 친일행위로 벌어들인 돈이 새로운 남성과 함께 살게 될 초당 건축에 쓰였던 것이다. 기사의 뒷부분에는 이런 일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뒤따랐다. 중국·만주·시베리아에서 한국인들을 밀고해 벌어들인 돈이 그렇게 쓰였던 것이다.
돈을 펑펑 쓰긴 했지만,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49년에 남상용 서울 종로세무서장이 반민특위 재판부에 보고한 <재산 조사의 관한 건>에 따르면, 해방 뒤에도 서울 성북동에 배정자 명의의 대지가 있었다. 항상 어느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 수입이 뒷받침됐던 것이다.
1949년 2월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경찰인 특경대에 체포된 배정자는 79세라는 고령을 이유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27일이다.
배정자의 주 수입원은 독립투사들을 고발하거나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밀고해 월급이나 기밀비를 받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무절제하게 소비했다. 언론에 보도될 정도의 낭비벽을 보였다. 한때는 재산을 거의 탕진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재정적으로 항상 되살아났고. 죽기 3년 전에도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2022-05-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연예인급 주목받은 여성 친일파, 왜 ‘요녀’로 불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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