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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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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6)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의사 오연상·부검의 황적준 등
박종철 죽음 사실대로 기록해
경찰의 고문살인 조작 드러나
87년 6월항쟁 도화선으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마태오 7,15-16)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마태오 10, 26)

1986년 하반기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애학투련 사건으로 뒤숭숭하고 암울했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불길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자마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박종철군 고문살인 사건입니다.

경찰이 취조하던 학생을 고문하고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은폐하고 조작하기 위하여 국가 권력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는 사실은 마치 둔기로 머리를 심하게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당시는 5공 시절로 정부의 공포 분위기와 언론 말살적 보도지침 하에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했던 정의의 수호자들 덕분입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서울대 박종철군(21.언어학과 3년)이 물고문, 구타 등으로 숨졌다. 경찰은 고문경관 5명을 2명으로 축소조작했다. 박종철의 죽음은 1987년 6월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이 가만두겠는가”

첫 번째 주인공은 당시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오연상입니다. 그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왕진을 갔을 때 박종철군은 이미 사망 상태였다고 합니다. 박종철 군의 시신이나 현장은 누가 봐도 이상했습니다. 오연상은 용산병원으로 박군을 옮기라는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자칫 고문 사망이 병원의 의료 사고로 조작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박 군은 경찰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연상은 경찰의 지속적 감시와 협박 속에서도 폐 속에 물이 고여 있었고 현장이 흥건했다는 소견서를 남깁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과장이던 부검의 황적준입니다. 경찰과 검찰 간부의 감시 속에서도 그는 경찰이 주장하는 심장 쇼크사가 아니라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매우 상세한 부검 기록을 남깁니다. 더욱이 그는 부검 전 박군의 명복을 빈다는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동아투위 기자 이부영, 교도관 한재동과 전병용, 재야인사 김정남 등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진실이라는 퍼즐의 한 부분이 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합니다.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는 이부영에게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과 은폐조작에 대해 알려주었고, 이부영은 이를 기자 정신으로 기록합니다. 교도관 한재동, 전병용 등은 소위 비둘기가 되어 재야인사인 김정남을 통해 3월 중순에 저에게 전달합니다.

그해 상반기는 호헌 대 개헌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습니다. 들끓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호헌을 고집하는 4·13 조치가 발표되자 전국에서 호헌 철폐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4월 말에 광주교구 사제들이 항의 단식을 시작하였고 이는 모든 교구 사제들의 릴레이 단식으로 이어졌습니다. 5월 초에는 고려대를 시작으로 전국 대학교수들이 연이어 성명을 발표합니다.

당시 저는 2년 전부터 서울교구 홍보국에서 일하면서 매주 발행하는 주보를 4면에서 8면으로 증면하였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진단하여 5공 시절 언론이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주보의 주제로 삼고 세상의 변혁을 꾀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께 박종철군 사건에 대해 알렸습니다. 그분께서는 “인혁당 사건을 보지 않았는가? 이를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이 가만두겠느냐?”고 하시며 매우 걱정하셨습니다.

결국 하느님 말씀대로 한 요나처럼

저도 피하고 싶은 본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꼭 해야만 한다는 양심의 명령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법정에 갈 것을 대비해 유현석, 황인철 두 변호사께 말씀드렸습니다. 유 변호사는 이부영의 편지에 기초하여 김정남이 종합한 문건을 토씨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검토하고 교정하여 성명서를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중,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쪽에서 1987년 4월 국회에서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의원의 입으로 발표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무산됩니다.

저는 당시 주일 아침 어머님을 모시고 구파발 성당에서 어린이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 5월 17일 주일 미사가 끝나자 고영구 인권 변호사의 부인과 딸이 제게 김정남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편지의 핵심은 “고문 조작사건을 사제단이 발표하면 전두환 정권은 꼭 무너집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신부님들께 달려 있습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머릿속에 예언자 요나가 떠올랐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회개하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음을 예단하고 배를 타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바다의 신이 노하기라도 한 듯이 배는 풍랑에 휩싸입니다. 이를 모면하려 바다에 제물을 바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고 요나가 뽑힙니다. 그 순간 요나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소명을 거역하고 도망가려고 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는 것을.

요나는 기꺼이 자신을 바다에 던집니다. 큰 고래가 요나를 통째로 삼킨 후 바다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기도와 회개는 고래 뱃속에서도 계속됩니다. 사흘 만에 고래는 요나를 밖으로 뱉어냅니다. 이것이 요나의 기적이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성서의 상징입니다. 이에 저는 하느님의 섭리를 피할 수 없으며, 이것이 사제단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편지를 품고 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1987년 1월26일 박종철씨 추모미사가 끝난 뒤 신부,수녀,신자 등이 성당 정문앞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5·18 7주기 추모미사 뒤 세상 뒤집혀

저는 김승훈 신부님에게 “내일(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 조작에 대해 꼭 발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이번엔 신부님이 책임지고 감옥 가세요, 저는 밖에서 일하겠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후 저는 서울교구 홍보국에서 성명서 1000여 장을 복사해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날 밤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가 이 모든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5·18 7주기 미사 후에 김승훈 신부님은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전년도에 계획한 일정대로 안양 성 라자로 마을 아론의 집으로 피정을 가셔서 외부와의 접촉이 모두 단절됩니다. 사제로서 이 일을 맡아서 하는 저는 당시 상황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 7면에 1단짜리로 기사가 실렸습니다. 1단 기사의 폭발력은 대단했습니다. 기자들이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고 그 후 국무총리, 안기부장, 부총리, 내무·법무·재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등이 물갈이되는 대대적 개각이 이뤄졌습니다. 치안본부장 강민창, 대공수사처장 박처원 등 조직적 범죄를 일삼았던 경찰 간부들은 이후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로 임명된 한영석 대검 중수부장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변호사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저에게 이번 기회에 중수부장이 그동안 보도된 신문들을 모두 모아서 구속된 경찰들에게 꼭 보여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천지가 개벽했다는 것을 백 마디 말이 아니라 신문이 웅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경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며칠 뒤, 고문살인 주범으로 몰려 구속된 조한경 경위의 형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모 전자회사의 사장으로 조 경위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동생 문제로 대공분실 경찰 간부들을 만났는데 이건 나라를 지키는 경찰이 아니라 조직 폭력배와 다름없었다고 큰 실망과 환멸을 제게 토로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안기부와 경찰은 오직 조작과 매수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 경위가 진실을 밝히도록 형님으로서 잘 설득하도록 권했습니다.

1987년 2월7일 ‘박종철군 추도대회’에 참석하고자 서울로 가려다 부산역에서 경찰에 이끌려 되돌아온 박군의 어머니 정차순씨와 누나 은숙씨가 부산 괴정동 사리암에서 종을 치고 있다. 이들은 “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거라”라고 울부짖으며 종을치고 또 쳤다. 〈보도사진연감〉

방조범 검찰, 피해자에 사과해야

박종철 고문살인의 주범은 분명히 경찰입니다. 그러나 검찰도 그에 못지않은 방조범입니다. 안상수 검사를 비롯한 검찰 간부들은 고문살인의 실체를 조한경 경위 등의 진술을 통해 확실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폐했습니다. 이것은 직무 유기일뿐 아니라 은폐조작에 가담한 엄청난 범죄입니다. 그런 검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기소했으니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에 남영동 대공분실과 안기부에 종속되었다고 자조했던 검찰이 비로소 자율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방조범이었던 그 검찰이 이제는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입니다. 검찰은 무엇보다도 먼저 박종철 열사를 비롯한 모든 고문 피해자들께 속죄하고 온 겨레와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검찰 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검찰의 잘못을 청산하고 정의와 역사 앞에 진솔한 법조인, 초심의 시민, 언행일치의 겸허한 실천가가 되길 바랍니다.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조작은 당시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87년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졌고 헌법 개정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박종철군 사건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직선제 개헌과 다원주의 문화 형성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의 안타까운 죽음은 1987년 민주항쟁으로 부활했습니다.

안타까움은 오늘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장엄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에게 빚을 다 갚지 못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민주주의를 우리는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바쳐 민주주의의 불씨가 되었던 수많은 청년 학생, 활동가들과 희생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서는 저희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복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 고백과 정화 과정입니다. 그런데 역사 과정에서 수많은 권력자는 불의와 불법을 저지르고 선량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은폐하고 있습니다. 희생자들의 피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아벨을 비롯한 순교자들 그리고 십자가 예수님의 피가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 이 불의한 역사 현장에 개입하시어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1987년 박종철 학생의 피가 독재자 전두환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이 고귀한 피의 증언에 함께한 부모·형제자매, 의로운 증언자들과 동료·동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제들과 교우들의 노고를 확인해주십시오. 그리고 아름다운 민주공화국과 평화공존 나아가 일치와 화합의 남북공동체를 이룩하게 해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6-06> 한겨레

☞기사원문: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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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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