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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한열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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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7) 영원히 살리라

87년 민주화운동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져
시청광장엔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로 가득
어머니 배은심, 아들 뜻 이어 민주화 기여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3-16)

우리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영생복락은 인간의 보편적 꿈이자 모든 종교가 확신하고 선포하는 내세의 가치입니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인간이 신의 반열에 진입하는 과정이라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앞서간 분들을 신위(神位)로 받들어 모시고 장례의식을 경건하게 지냅니다. 이는 영원한 세계로 비약하는 체험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마호메트님도 예수님도 모두 죽음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은 30대 초반에 타살을 당하셨습니다. “타살당한 청년 예수님!”,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구리 뱀의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리라 예시하셨고 더욱이 이 죽음을 통하여 부활과 영원한 삶이 실현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영원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와 기본 명제입니다. 의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삶을 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여…박종철 열사여…이한열 열사여”

로이터 보도사진전에 나온 최루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고 이한열의 모습을 찍은 사진. <로이터>의 정태원 사진기자가 1987년 6월 항쟁현장에서 촬영했다

박종철 고문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1987년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로 점철되었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한 6월 10일을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애국연세인총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 이한열. 그의 이름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고 구심점이며 당위성이 되었습니다.

6월 9일 오후 5시에 교내 행사를 마치고 교문 밖 5미터까지 진출한 시위대를 향하여 경찰은 최루탄을 발포합니다. 시위대를 향한 직사 사격으로, ‘허공을 향해 45도 발사’란 원칙을 명백히 어긴 것입니다. 교문 안으로 달아나려던 시위대 중 한 학생이 쓰러졌습니다. 이한열 군입니다. 최루탄의 금속 파편에 맞아 피 흘리는 이한열 군을 친구가 부축하는 사진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비민주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박종철 군과 이한열 군의 연이은 죽음 앞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절규가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분노는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화이트칼라들을 시위 현장으로 끌어냈습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입니다. 이한열 군의 죽음이 촉발한 6·10 항쟁의 뜨거운 불길에 놀란 군부 쿠데타 정권은 사실상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것이 피로 얻어낸 6·29 선언입니다. 두 청년의 죽음은 1987년을 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한열 군은 의식 불명 상태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이날 문익환 목사님은 연단에서 침묵기도와 함께 26명의 열사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아주 정성껏, 아주 크게, 하늘 끝까지 메아리가 닿도록 있는 힘을 다해 부르셨습니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오동근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하늘을 향한 절규와 호소는 불의한 자들을 무섭게 내리치는 몽둥이였습니다. 이날 문 목사님의 호칭기도는 비장한 장례식의 정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순교자들과 성인 성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바치는 기도를 우리는 호칭기도라고 합니다. 이날 문 목사님의 호칭기도는 열사들이 신(神)의 반열에 올랐다는 선언으로 ‘이제는 열사들이 하늘에서 우리 민족과 겨레를 돌보아주십사’ 호소한 전구입니다. ‘그분들의 영혼이 영원히 살아 우리의 용기를 북돋고 정의와 평화를 세워주십사’ 하는 간구입니다. 오늘 저는 그날의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열사들의 이름과 함께 “문익환 목사님!”을 정성껏 목청껏 부르며 열사들과 목사님을 기립니다.

1987년 6월9일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하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장례식 노제가 그해 7월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연세대에서 출발한 이씨의 운구 행렬을 시민들이 맞이하는 모습. 연합뉴스

전국 18개 시군에서 추모행사 열려

장례 행렬이 연세대학교 본관에서 신촌 로터리를 지나 아현동과 서소문을 거쳐 중앙일보사 앞에 다다른 순간, 성난 군중들은 그 건물로 쳐들어가 불태울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중앙일보사 전광판은 ‘이한열 추모 인파 100만 명 운집’이라는 큰 자막을 반복해 점멸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방송은 늘 독재정권의 나팔수였습니다. 그런데 중앙일보가 보인 이 재빠른 변신에 순간 대중들은 넋을 잃고 홀렸습니다. 종교가 아편이란 말이 있으나 지금은 언론이 바로 아편입니다.

그때 대중들은 ‘100만 명’이란 숫자에 놀라서 박수 치며 ‘아!’ 하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역사학자 안병욱 교수는 언론의 묘한 속임수에 대중은 늘 속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전문가의 지적에 따라 100만이라는 숫자가 허구임을 밝힙니다. 서울 시청광장 인근 골목까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꽉 찬다 해도 절대로 20만 명을 넘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0만 또는 15만 인파가 모였다고 해야 합리적입니다. 역사에서 과장은 매우 위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한열 장례에 모인 인파는 15만 정도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당시 시청광장과 광화문을 가득 채운 군중들의 도도한 물결은 독재자와 독재자를 꿈꾸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해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인근 성공회 성당 구내로 피신했습니다. 전투경찰 2개 중대가 사과탄 등을 난사해 주교관 입구와 창문이 부서졌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난입해 수많은 시민이 다쳤습니다. 20여명이 연행되어 성공회 사제단 48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이한열 군의 명복을 비는 추모행사가 서울을 비롯해 부산, 광주, 인천, 제주 등 전국 18개 시군에서 크게 열렸습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날 신었던 운동화가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이한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옷과 신발은 세월의 흐름에 풍화돼 의류 보존과 운동화 복원 작업을 했다. 옷과 신발은 이 열사의 둘째 누나가 보관하다가 지난 2005년 기증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422일간 국회 앞 천막농성한 어머니

이한열 군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2남 3녀 중 장남(넷째)입니다. 비보를 듣고 광주에서 상경한 이한열 군의 부모님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하려고 했던 일, 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한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그 후 전국의 집회와 시위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했고,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회(유가협)의 회장도 맡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은 청년 학생이었지만 그 뒤를 받쳐준 것은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배은심 여사 역시 아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여 전국의 어머니들을 규합했습니다. 이렇듯 아들이 어머니를 움직이는 모습에서 저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떠올렸습니다.

1998년 배은심 여사는 국회 앞 천막 농성을 무려 422일 동안 이어 간 끝에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을 이끌어냅니다. 2009년에는 용산참사 범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2020년 6월에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그간의 민주화와 인권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습니다. 국민훈장이 가슴에 자식을 묻은 어머니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으로 인해 위로받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사회장이 열린 1월 11일 광주 북구 망월묘지공원 남편 이병섭씨(왼쪽 묘) 곁에 고인의 유해가 안장되고 있다. 아들 묘에선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져 있다. 광주/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35년 흐른 지금, 민주주의 위치는

2022년 1월 9일, 배은심 여사는 82살의 나이로 선종합니다. 세상을 뜨기 몇 달 전까지도 민주화유공법 제정을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열사의 어머니, 아니 스스로 열사가 되었던 어머니는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이제 아들 곁으로 갔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아드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시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이한열 군이 세상을 떠난 후, 다양한 추모사업이 진행되어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1987년에 이한열 추모사업회가 발족하였고 연대 학생회관 옆 동산에 추모비가 건립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이한열 장학회를 만들었습니다. 2010년엔 사단법인 이한열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매년 6월 9일 이한열 문화제를 열고 망월동 묘지에서 추모 예배를 거행합니다.

극적이었던 1987년으로부터 어느새 35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1980년대의 민주화 주역들은 이제 정치무대에서 낡은 세대라고 공격받고 심지어 퇴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공과를 논할 자리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저는 그 시절 그들의 꿈과 열정, 선의를 믿습니다. 목숨 걸고 독재와 폭압에 맞섰던 민주화 운동을 희화화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화 운동의 극점이었던 1980년대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뒤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1987년에서 몇 발자국이나 앞으로 나아갔을까요? 저는 권인숙, 박종철, 이한열의 용기와 혼이 정치인들 안에서 갱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그들의 삶이 오늘에 구현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는 신망애(信望愛) 삼덕(三德)과 함께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예수님, 사랑의 성령님을 고백하며 영원한 삶을 확신합니다. 1987년 민주항쟁의 주역 박종철과 이한열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문익환 목사의 장엄한 호칭기도를 떠올리며 단군 성조와 함께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위인들,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에 맞서 싸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항일 투사들,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헌신한 모든 열사와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특히 1987년 민주항쟁의 불꽃이 된 주님의 충실한 아들 이한열과 그의 모친 배은심 성도를 기리며 정성껏 기도드립니다. 이 모자의 헌신과 염원을 굽어살피시어 우리나라에 평화와 안녕을 주시며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이룩해 주시고 천상영광의 영원한 삶을 보장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6-13> 한겨레

☞기사원문: 이한열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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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연재]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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