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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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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임진왜란 때의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를 기려 이름을 붙인 일제시기 다리 ‘코바야카와교’의 교명주(橋名柱 : 다리 이름을 새긴 돌기둥)가 용산 한강로 대로변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코바야카와는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무장으로 임란 때 벽제관에서 명군(明軍)을 대파하는 등 명성을 얻었으나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배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잊혀졌던 이 돌기둥은 전쟁기념관 북문의 길 건너편 지금은 폐쇄된 캠프 킴(Camp Kim) 구역의 동남쪽 모서리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코바야카와교’는 일제강점기 용산 주둔 일본군 병영지 외곽에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인 오카다 코(岡田貢)가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남긴 자료에 의하면 이번에 발견된 돌기둥이 1926년 11월에 기존의 다리를 석교(石橋)로 개조하면서 조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이 다리 외에도 지금의 전쟁기념관 구역 북쪽을 따라 흐르는 소하천에도 ‘코바야카와(小早川)’라는 이름을 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 기록과 함께 이를 입증하는 사진자료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전2권)을 펴낸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출간 기념 용산 답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이 돌기둥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는 이태원 쪽에서 발원하여 미군기지 안쪽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한강로와 만나는 지점에 해당한다.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옛 둔지미와 이태원리 일대를 강제점유한 일본군은 용산병영지 곳곳에 일본의 언어 관행을 좇아 융경산(隆景山, 류케이잔)이라거나 사방견산(四方見山, 시호미야마), 선견산(船見山, 후나미야마), 월견대(月見台, 츠키미다이), 용대(勇台, 유다이), 하강(霞ケ岡, 카스미가오카), 학강(鶴ケ岡, 츠루가오카) 따위의 일본식 지명을 부여하였다. 소조천(小早川, 코바야카와)도 이런 유형의 하나이지만 임란 때의 왜장을 기념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침략기의 유형잔재들이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치욕의 역사이긴 하나 없애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역사와 교육 자료로 보존해 활용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뜻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코바야카와교’ 교명주는 용산 지역에 드물게 남아 있는 일제 침탈사의 흔적인 만큼 서둘러 해당 지점에 관련 안내판을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히면서, 이와 더불어 “부동산 대책과 관련하여 캠프 킴 지역이 아파트 건설 용지로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여 멸실 방지에 관한 대책도 시급히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참고자료]
오카다 코(岡田貢)가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남긴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와 타카카게(隆景)의 진지(陣地)」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강통(漢江通) 1정목 전차도로의 북단(北端)을, 동에서 서로 향해 도로와 직각을 이루며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다. 이 소하천은 삼각지 로터리에서 서북 3정(丁) 쯤의 지점에서 욱천(旭川, 만초천)에 합류하며, 또한 서류(西流)하여 원정 4정목에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명치 40년(1907년) 말부터 누구랄 것도 없이 이 소하천은 코바야카와(小早川)라고 속칭(俗稱)되었고, 널리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이 소하천과 한강통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옛 다리를 대정 15년(1926년) 11월 석교(石橋)로 개조준공(改造竣工)하던 때, 교명(橋名)을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로 정하여 교주(橋柱)에도 선명하게 그 이름을 새겨 넣었다. 다시 또 소화 15년(1940년)에는 종래 이 곳에 있던 정류장도 ‘코바야카와정류장(小早川停留場)’으로 개칭(改稱)하고, 그 명칭을 전주(電柱)에 써서 표시하였다. 다만 그 후 정류장은 폐쇄되었다.

[첨부 1] 용산 한강로 전쟁기념관 북문 주변의 모습이다. 전쟁기념관 구역의 북쪽 경계선을 따라 흐르는 소하천(가로등이 서 있는 지점의 지하)은 이태원 쪽에서 발원하여 만초천으로 흘러드는 지류이다. 이 하천과 한강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설치된 다리가 바로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이다.

[첨부 2] 전쟁기념관 북문 건너편으로 캠프 킴의 남서쪽 모서리 담장 아래에 남아 있는 ‘코바야카와교’ 돌기둥의 모습이다. 일본인 오카다 코가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 교명주(橋名柱)는 1926년 11월에 석교(石橋)로 개축할 때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담장 안쪽으로 들어간 쪽의 기둥표면에 다리 이름과 준공 연도가 표시된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첨부 3] ‘코바야카와교’ 돌기둥의 근접사진이다.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수록된 사진자료와 대조해보면, 동일한 석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첨부 4]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수록된 ‘코바야카와교’의 돌난간 모습이다. 교명주(橋名柱) 부분이 현재 남아 있는 돌기둥과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첨부 5]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수록된 오카다 코(岡田貢)의 ‘코바야카와교’의 유래에 관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남산 아래의 마을 쪽에 코바야카와의 진지가 있었다는 풍설에 따라 이러한 지명이 생겨났으나, 사실은 일본인들이 이태원 지역을 코바야카와의 진지로 착각한 데서 빚어진 오류라고 하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첨부 6] 1929년에 발행된 『용산시가도』(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에 수록된 용산 일본군 병영지 일대의 모습이다. 붉은 동그라미 표시가 ‘코바야카와교’가 있는 자리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이태원 쪽에서 발원하여 일본군 보병영(보병 제78연대 및 보병 제79연대) 북쪽을 끼고 흐르는 하천이 한강로와 교차하는 지점에 놓인 다리가 바로 ‘코바야카와교’이다.

[첨부 7] 『조선주차군영구병영, 관아 급 숙사 건축경과개요』(1914)에 수록된 ‘육군창고 배치도’이다. 육군창고가 있던 지역은 곧 미군기지 시절의 ‘캠프 킴(Camp Kim)’ 구역을 말한다. 오른쪽 아래 붉은 동그라미가 ‘코바야카와교’가 있던 자리이고, 그곳을 흐르는 소하천에도 ‘코바야카와(小早川)’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의 왜장이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의 이름에서 따온 일본식 지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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