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맞는 6월 6일은 전몰장병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기념일인 ‘현충일(顯忠日)’이다. 반기(半旗, 조기)를 다는 공휴일에다 오전 10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일제히 묵념을 하는 날로 기억되며, 특히 전국의 유흥업소도 이날만큼은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삼간다는 뜻에서 경찰당국의 요청 및 지도에 따라 관례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6월 6일이라고 하면 비단 ‘현충일’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폭거가 있었던 날이기도 한데, 1949년 6월 6일에 친일경찰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반민특위 사무소 습격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7일자에 수록된 「경찰(警察) 돌연(突然) ‘특위(特委)’를 포위(包圍), 무기압수(武器押收), 20명(名)을 인치(引致)」 제하의 기사에는 이날의 사건 진행이 이렇게 채록되어 있다.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최운하(崔雲霞) 사찰과장이 반민특위에 피검된 지 하루를 경과한 5일 오후에 이르러 440여 명의 경찰관이 사표를 제출하고 오후 2시부터는 사찰과원 전체가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까지 하고 있었으며 4, 5 양일간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모종 중요한 협의를 한 바 있어 그 결과 여하가 주목되고 있던바 작 6일 오전 8시 반 경 돌연 중부서(中部署) 윤기병(尹箕炳) 서장 지휘 하에 중부서원을 주동으로 하는 각 서원 약 80여명은 남대문로 있는 특위를 포위하고 때마침 출근하는 조사관 및 직원들이 휴대하고 있던 권총을 압수하는 한편 특경대원(特警隊員) 20여 명을 인치하여 갔다.
그런데 이에 앞서 작 6일 아침 7시부터 8시 사이에도 특별조사위원 박우경(朴愚京), 특별검찰관 서성달(徐成達), 동 서용길(徐容吉) 씨 댁에 무장경찰관이 와서 무기의 유무를 묻고 호위경관들을 대동해 갔으며 각 조사관들 집에도 경관들이 예비조사가 있었다 하며 6일 특위가 포위당하였을 때에는 때마침 그곳에 와있던 검찰총장 겸 반민특위 검찰부장 권승렬(權承烈) 씨도 역시 경관에게 포위당하여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압수당하였다한다. (하략)
1948년 9월 7일에 제정된 법률 제3호 「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의 제5조에는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날 습격사건의 주동자인 윤기병(尹箕炳, 창씨명, 平沼昇, 1908~1999) 중부경찰서장은 그 자신이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출신인데다 일제 치하에서 경부(警部, 1943.2.2. 임명)의 직위까지 올랐던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공격행위가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이들의 폭거에 대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李承晩 大統領)은 “자신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며 이를 비호(庇護)하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그러한 발언의 내용은 <경향신문> 1949년 6월 8일자에 수록된 「‘특경해산(特警解散) 내가 명령(命令)’, 반민체포(反民逮捕)는 한꺼번에 하라, 이 대통령(李大統領) AP기자(記者)에 언명(言明)」 제하의 기사에 잘 채록되어 있다.
지난 6일 40여 명의 경관이 반민특위를 포위 수색하여 특경대원을 일시 체포한 바 있었는데 이에 관하여 이 대통령은 ‘에이 피’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특위 습격이 있은 후 국회의원 대표단이 나를 찾아와서 특경해산을 연기하라고 요구하였으나 나는 헌법(憲法)은 다만 행정 부문만이 경찰권을 가지는 것을 용허하고 있기 때문에 특경해산을 명령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특별경찰대는 앞서 국립경찰의 노련한 형사인 최운하(崔雲霞) 씨와 조응선(趙應善) 씨를 체포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6일 석방되었다. 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 위협은 국립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국회(國會)에 대하여 특위가 기소(起訴)될 자의 비밀명부를 작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명부에 백 명의 이름이 오르든 천 명의 이름이 오르든 간에 거기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다만 그들이 이와 같은 명부를 우리에게 제출해주면 우리는 기소자를 전부 체포하여 한꺼번에 사태를 청결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이와 같이 그렇게 문제를 오래 갈 수는 없다.”
이러한 결과로 친일청산의 대의를 내건 ‘반민특위’의 활동은 불과 반 년 사이에 무력화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곧이어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공소시효 축소와 반민특위 해체 등의 내용을 담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잇따른 개정으로 인해 여전히 친일세력이 득세하는 세상은 지속되었고, 더구나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체제의 고착화는 온전한 친일청산의 기회를 더욱 멀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무려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1999년 9월 20일, 반민특위 해산 50주기를 되새기는 뜻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반민특위 터’ 표석의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표석의 설치장소는 서울 남대문로 대로변에 자리한 당시 국민은행 명동 본점의 측면 출입구 앞이었다.
반민특위는 출범과 더불어 중앙청(中央廳)의 방 몇 곳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있었으나 그 공간이 협소한 탓에 별도의 청사를 찾고 있던 상태였는데,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李範奭 國務總理)의 특명으로 1949년 1월 21일 옛 제국은행 경성지점 자리(남대문로 2가 9번지)로 옮겨 터를 잡게 되었다. 그 시절 이 건물은 군정청 상무부 이래 상공부의 소관이었으며, 그나마 이 건물로 옮기는 과정조차도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경향신문> 1949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또 이 무슨 추태(醜態), 특위청사(特委廳舍)인 구 제국은행(舊 帝國銀行)에 임장관(任長官), 돌연(突然) 명도령(明渡令)」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제국은행(帝國銀行)을 에워싸고 상공부와 반민특별조사위원회 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중앙청 205호실을 사용하고 있던 반민조위는 청사 협잡으로 사무의 지장이 다대함에 비추어 그간 국무총리에 건의하여 비어 있던 제국은행의 사용의 허가를 얻어 21일 일부 사무를 중지하고 이사를 시작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그 후 짐을 완전히 옮겨 사무에 착수하려던바 돌연 상공장관의 명령으로 특허국(特許局)의 가옥으로 사용하겠으니 비워달라는 통고에 놀란 반민조위 간부와 직원 일동은 정부책임자의 명령을 무시하는 이러한 개인적인 조처는 부당하다고 물의가 분분하며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해결은 짓지 못하고 집 잃은 특조위는 갈팡질팡 하고 있다 한다.
여기에 나오는 제국은행(帝國銀行)은 일제패망기인 1943년 4월 1일에 이르러 전시금융통제정책에 따라 기존의 제일은행(第一銀行)과 미츠이은행(三井銀行)을 합병한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뿌리는 어디까지나 제일은행 쪽에 맞닿아 있었다. 실제로 반민특위 청사로 사용된 제국은행 건물은 원래 제일은행 경성지점의 용도로 신축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월 15일자에 수록된 「제일은행(第一銀行) 신건물(新建物)에 이전(移轉), 24일부터」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결과로 주식회사 제일은행은 “1921년 1월 24일부로 종래 경성부 본정 2정목 89번지에 있던 경성지점의 위치를 경성부 남대문통 2정목 9번지로 이전한다”는 내용의 등기를 완료하기도 했다.
제일은행 지점은 이번에 신축 낙성을 보고 오는 24일부터 남대문통 새로 건축한 데 이전하여 집무하기로 되었는데 그 까닭에 동 은행은 오는 16일 열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에 관계자를 초대하여 새 건축물의 내부를 관람케 한다더라.
그런데 바로 이 제일은행은 대한제국 시기 화폐주권을 침탈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일본 제일은행권 무단 유통사건(1902년)’의 당사자였던 것으로도 기억되는 금융기관이었다. 또한 1905년 1월에는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주도로 대한제국의 국고금 취급은행이 되는 한편 화폐정리사무의 위탁까지 받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 전역에 제일은행권이 강제 유통되는 상황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제일은행은 사실상 발권은행으로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차지했으며, 이러한 기능은 1909년 10월에 한국은행(韓國銀行; 1911년 8월 15일에 ‘조선은행’으로 개칭)이 정식으로 설립될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1907년 11월에 착공하여 4년 3개월 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12년 1월 10일에 낙성식을 거행한 바 있는 한국은행 본점 청사 역시 원래는 제일은행 한국총지점(第一銀行韓國總支店)의 용도로 건립된 것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제일은행 경성지점의 건물 신축으로 인하여 남대문통 2정목(지금의 남대문로 2가) 일대는 일본생명(日本生命; 남대문통 2정목 1번지), 경성전기 경성지점(京城電氣 京城支店; 남대문통 2정목 5번지), 스즈키상점 경성지점(鈴木商店 京城支店; 남대문통 2정목 5-3번지), 치요다생명(千代田生命, 남대문통 2정목 10번지) 등의 근대식 건물이 즐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 시기가 되면서 이들 가운데 몇 곳은 군정청의 소관으로 접수되었는데, 가령 <경향신문> 1947년 5월 8일자에 수록된 「군정청 상무부 이전(軍政廳 商務部 移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소식이 담겨 있다.
군정청 상무부는 6일 본청으로부터 남대문로 2가 전 제국은행 지점(帝國銀行 支店)과 치요다(千代田) 삘딩에 나누어 이전하였는데 모든 사무는 7일부터 신청사에서 계속하였다.
이때 군정청 상무부의 점유공간으로 귀속된 제국은행 지점 자리가 곧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상공부의 소관을 거쳐 ‘반민특위 청사’가 되는 바로 그 빌딩인 것이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이후에는 한때 ‘중앙경찰병원(中央警察病院)’으로 사용된 시절도 있었고,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10월 이후 1958년 정초에 이르기까지 한국저축은행 본점이 이곳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동아일보> 1950년 10월 5일자에 수록된 ‘정부환도와 관련한 은행 업무개시 안내광고’를 보면, 한국은행 본점의 주소지가 “서울시 충무로 입구(저축은행 내)”라고 표기되어 있고 그 대신에 한국저축은행은 “서울시 남대문로 2가(구 상공부 자리)”로 적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은 짐작컨대 전시폭격으로 한국은행 건물이 지붕이 무너질 정도로 파괴되자 그 건너편으로 건물 규모도 크고 별다른 피해도 없이 남아 있던 저축은행 건물(1935년 12월 2일 신축 낙성)이 한국은행 임시본점으로 넘겨진 반면, 저축은행은 그 대체공간으로 옛 상공부 청사를 얻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1962년 2월 1일에 발족한 국민은행(國民銀行; 한국무진이 중앙무진을 흡수합병)이 이곳을 본점으로 삼아 자리하였다가 1972년 10월 25일에 이르러 옛 건물을 헌 자리에 본점을 신축준공하였다. 그러니까 1999년에 ‘반민특위 터’ 표석이 국민은행 자리에 세워진 것은 이러한 공간내력 탓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비록 표석은 세워졌을지언정 정작 그 관리는 푸대접에 가까웠다는 사실이었다. 표석의 설치 지점이 애당초 건물 측면 출입구에 세워진 것부터가 그러하고, 그 이후에는 관리상의 이유로 주차장 입구 쪽 후미진 구석 자리로 재배치되어 거의 방치 상태나 다를바 없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국민은행 본점 건물은 매각 처리와 동시에 철거공사가 진행되면서 ‘반민특위 터’ 표석은 그 자리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센터포인트 명동’ 빌딩신축공사가 본격 개시된 2018년 10월 이후에는 용산 청파동에 자리한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임시 보관되고 있는 상황이다.
듣자하니 국민은행 본점 자리에는 그럭저럭 새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의당 ‘제자리를 잃은’ 반민특위 터 표석도 지체 없이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