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반민특위가 패망하던 날의 비극
김상돈 민의원 의원
글은 1949년 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 의원이 <진상(眞相)> 1957년 12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김상돈 의원은 반민특위 설치 초부터 1949년 6월 6일 특경대 습격 때까지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위정 당국자의 맹성(猛省)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1949년 1월 8일부터 기소 만료일인 8월 31일까지 반민특위가 체포, 소환한 친일파는 688명이고 이 중에서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자는 293명이었다.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까지 판결 받은 자는 78명이고 미결수가 215명이었다. 78명 중 징역 1년 이상의 금고형(禁錮刑)을 받은 자는 10명뿐이고 나머지는 집행유예, 공민권정지, 무죄, 형면제, 공소기각으로 미약한 처벌을 받거나 무죄 방면되었다. 금고형을 받은 자들도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모두 풀려나 실제로 온전히 처벌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편집자 주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설치되었던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자못 컸었다. 그러나 당초에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는 듯 하더니 나중에는 자취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제 당시의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金相敦) 씨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선수(先手)를 쓰는 친일파
정부가 수립되자 국가와 민족의 기강을 살리기 위해 지극한 소수 악질 친일파들을 일단 숙청하여야 된다는 것이 국민들의 공통된 여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그리 조급하게 처리할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조사에 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해괴한 것은 반민법에 저촉되고 있는 특수 악질자들 중에는 근신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선수를 써서 1억원의 거액을 들여 대지구락부(大地俱樂部)라는 것을 형성하고 기염을 토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확대하는 동시에 정부 요직에 들어앉으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제헌국회에서는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방관시할 리 만무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여론이 차츰 비등했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반민법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뜻하지 아니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1948년 10월 중순경에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소위 ‘반공(反共)대회’였다. 이 반공대회의 명목은 뚜렷했다. 국민들의 반공의식을 더욱 앙양시키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씨가 중심이 되었는데 정부에서는 수십 대의 트럭을 대여했으며 상당히 많은 광목도 특배(特配)했다. 군중동원에 있어서도 경찰을 동원시켜 매호당 한 사람씩 나오게 하였으니 대회는 여하간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대회는 당시 국회에서 제정중이던 반민법을 방해키 위한 가장(假裝)의 모임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어떠한 자들의 흉계였던지 대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반민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각양각색의 삐라가 수없이 대회장에 살포되었다. 그와 동시에 시내 도처에 망민법(亡民法) 제정을 반대한다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것은 반민법에 저촉되는 이종형(李鍾滎)의 행동이었다. 그는 모처의 후원으로 대동신문(大東新聞)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기화로 신문지상을 통하여 “신성한 의정단상에 망민법 제정을 주장하는 개새끼들이 있다. 김상돈 곽상훈(郭尙勳) 정준(鄭濬) 등을 몰아내라”는 등의 내용으로 대서특필, 욕설을 퍼붓던 것이었다.
이 대동신문의 망동은 국회의원들을 격분케 하였다. 즉시로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 씨를 국회로 불렀다. 신성한 법을 제정하는데 있어 이러한 망동을 한 그를 어떻게 할 것이며 그 신문을 그대로 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폐간시킬 용의가 있는가? 라고 신랄하게 그 취할 바 조처를 추궁했다. 그리 하였더니 김동성 씨는 즉석에서 유감의 뜻을 표했으며 대동신문을 폐간시켰다.
정당을 이용한 친일파
반민법은 그 시초부터 갖은 방해를 당하면서도 민족의 끊임없는 지원하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계속해서 반민특위로 구성되었으나 또 다시 새로운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정부에서 비협조적인 행동으로 나오므로 행동 착수에 2, 3개월이나 지연되었다. 첫째로 청사의 알선이 없었으며 예산은 계상되었으나 현금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49년 1월에야 중앙청 안에 겨우 연락사무실을 두고 지필(紙筆)을 구걸하다시피 하면서 사무를 개시하였다.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김상덕(金尙德) 씨, 부위원장에는 나였으며 재판장에 김병로(金炳魯) 씨, 검사장에 권승렬(權承烈) 씨가 취임하였다.
반민자에 대한 조사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드디어 발동하게 되었다. 제1차의 대상자는 주로 소위 거물급이었다. 박중양(朴重陽), 이종형, 노덕술(盧德述) 등 무려 수십 명에 달했다. 그들의 죄상은 어느 것 하나 할 것 없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 동기에 대해서 다소 참작할 사람도 있기는 하였으나 이종형 같은 자는 만주에서 우리애국투사들을 무려 23명이나 살해한 악질적인 일제의 주구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확한 사실은 자신이 스스로 자백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특히 검사였던 곽상훈 씨는 추상같은 논고문을 낭독한 뒤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조사와 그에 병행한 공판은 차츰 본궤도에 오를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업을 수행하는 데에는 가지가지의 방해공작이 가로막고 있었다. 교묘한 최고 악질인 지능범이었던 해당자 중에는 금력(金力)으로 관력(官力)을 사며 심지어는 정치력을 사서 저들의 안신책(安身策)을 도모하려고 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또한 당시의 우리 반민특위 자신도 사람이 하는 이상 실수가 있어 비난의 소리를 들을 만한 일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 거족적인 사업을 마땅히 이해, 협조할 줄로 믿었던 우익정당에서 사실을 고의로 왜곡 악평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반민특위를 혹평한 진의는 반민법 운영의 지연과 방해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당은 당시 국회의원이었으며 상공부 장관이던 임영신(任永信) 씨가 당수인 여자국민당(女子國民黨)1이었다. 일부 악질 반민자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민족적 죄악을 반성은커녕 이와 같이 여자국민당에 교묘하게 접근하여 반민특위 사업을 중상모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반민특위에만 도전한 것이 아니라 전 민족에게 대들었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해할 수 없었던 고위층 태도
반민특위에 대한 중상모략이 심해가더니 나중에는 고위층에서의 압력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정부에서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여전하였다.
반민법에 저촉되는 노덕술이 있었다. 이자는 과거 일제시 소위 고등경찰로 있으면서 수많은 애국투사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경찰의 주요 간부로서 등용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 유명한 수도경찰청의 ‘고문치사사건’으로 경찰에서 지명수배를 하였으나 노덕술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에서는 그들 반민 피의자로서 지명수배를 하였는데 수사를 개시한 지 불과 수일 만에 체포할 수가 있었다. 용산구 청파동 모 고위층 사택에 잠복하고 있다는 유력한 단서를 포착하고 급습하여 체포하게 되었는데 체포 직전의 그의 주위환경을 목격하고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2명의 무장한 호위경관이 따라다녔으며 심지어는 지프차까지 대여받고 있었다. 이러한 반민특위의 거사에 당시의 국민들은 쾌재의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때에 벌써 그러한 처사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즈음이었다. 정부 고위층2에서 반민특위 위원들을 만나자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임영신·이은혜(異恩惠)·김선(金善) 등과 각 도의 대표 1명씩이 모여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창립 당시‘조선여자국민당’이었으나, 정부 수립으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되자, ‘대한여자국민당’으로 개칭하였다. 창당 동기는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건국준비위원회의 독주에 대한 반대,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지지 및 신여성들의 정치참여에서 비롯되었다. 이 당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반대운동과 1946년 1월 남북협상을 위한 미소공동회의 항의데모에 앞장섰다. 임영신이 상공부장관, 국회의원 당선 등 상당히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이 당은 자유당의 외곽단체로 기능하다가 1960년 소멸되었다.
2 반민특위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기서의 고위층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기 직전인 1949년 5월말에 관사로 이박사가 직접 온 적이 있습니다. 이박사는 경무대로 아버지를 여
러 차례 부르셨답니다. 이런 사람 없으면 치안 보장 안된다 풀어줘라, 그게 일제경찰 노덕술이에요. 독립운동가들을 혹독하게 고문해서 승승장구한 사람인데 방면하면 처벌법이 의미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초대 대통령인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방면하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이박사를 설득하려 했답니다. 5월말에 경무대서 은밀히 아버지를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어요. 밤에 갈 테니까 관사에서 만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다 부르더라구요.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라. 집 오른편 방에 경호실이 있는데 그 경호실 경찰관까지 내 방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경무대 경호팀이 접수한 거지요. 나중에 아버지 수행비서가 전해주길 아버지를 회유하려 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굉장히 불쾌하게 거절
했으니 이박사가 화가 나서 돌아간 거예요. 그리고는 6월 6일에 반민특위 사무실로 경찰이 쳐들어왔어요. 직원들을 무장해제하고 서류를 탈취하고, 급보를 받고 달려온 검찰총장까지 순경이 무장해제를 시켰다고 합니다.”(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 선생 증언)
당초에 우리들 위원 10명은 다대한 흥미와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실지 대면하고 보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위층에서 하는 말이 노덕술은 유능한 기술자이니 석방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자의 정의(定義)를 말했다. 기술자라면 메카닉을 의미하는 것이고 문제의 노덕술은 악질적
인 반민족 행동의 경험뿐인데 신생 대한민국에 그러한 경험의 기술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대답했다. 동시에 이러한 자를 석방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과거 쓰라린 체험을 한 국민들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위층은 그의 석방을 재차 요구하였다. 때의 반민특위 위원 김명동(金明東) 씨는 분연히 “그렇게 노덕술을 석방시킬 필요를 느낀다면 정식으로 국회에 석방 동의 요청서를 내어 주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 하였더니 고위층은 화를 버럭 내면서 “맘대로 하라… 나는 나대로 할 터이니!” 라고 말하며 일종의 선전포고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요구에 순종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법이 있는 이상 염려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응수하고 돌아왔다.
선하심 후하심(先何心後何心)3
반민특위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무렵에 나에게 있어서는 전율을 느낄 음모를 하고 있는 사실을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즉 당시 경찰 간부로 있던 최모(崔某) 홍모(洪某) 박모(朴某) 등이 백민태(白民泰)라는 청년을 교사하여 나와 몇몇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흉계가 꾸며져 가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하수인으로 지명했던 전기 백민태의 고백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백민태는 현금 10만원과 수류탄과 권총을 입수하고 즉시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겼다고 말했다. 그는 자진해서 반민특위 사무실에 나타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이는 소위 실력으로써 반민특위를 위협한 사건이었는데 고위층에서도 반민특위를 비난하였다. 그것은 반민 해당자들을 고문 난타하였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어찌 그러한 고문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대뜸 신문지상에 사실을 밝혔다. “그것은 사실과 상반되는 말이다. 고문한 일은 전혀 없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제시대에 그들의 주구로서 애국자들을 못살게 하던 그런 극소수의 악질분자들을 좀 고문 난타했기로서니 무엇이 그리 안됐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3 먼저는 무슨 마음이고 나중에는 무슨 마음이냐 라는 뜻으로 ‘변덕스러운 마음’을 일컬음.
고위층은 소수 악질자를 위한 위정자이던가?”라고 논박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행정부의 고위층은 친일파를 용허해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하고 있으니 ‘산하심후하심’인고…
특경대(特警隊)의 해산
반민특위에 드디어 최악의 경우가 다가왔다. 반민특위에는 특경대라는 것이 있었는데 내무장관의 동의를 얻어 금명간에 정식 발령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이 특경대에 해산명령이 내렸던 것이다. 그 당시의 중부경찰서장 윤기병(尹箕柄) 씨(현재 변호사)는 무장한 수십 명의 경찰관을 대동하고 을지로 입구 반민특위 본부(현재 저축은행)에 나타났다. 그것은 일종의 습격태세와도 흡사했다. 그리하여 민족의 기강을 세우려고 들어온 의용병과 같은 특경대 청년 20명은 피체 구금되었다. 그들은 시내 각 경찰서에 분산 유치되었다.
왜 그들을 체포하였을까? 또한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들을 고문 난타하였는지? 심지어는 전기고문까지 하였는데 어찌나도 지독했던지 바지에 똥을 싼 청년이 있었으니 그 정상(情狀)은 과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의 전원이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입원 치료를 시키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후 적십자병원에서는 입원료를 13만 5600원을 반민특위에 청구하여 왔었다. 그때 나는 반민특위는 피해자요 가해자는 경찰이니 내무부장관 김효석(金孝錫)한테서 받으라고 돌려보냈다.
거기에 당시 반민특위의 형편을 여실히 말해주는 한 가지의 실례가 있다. 어떻게 질서와 법의 존엄성을 잘 지킨 행정부의 처사였던지 일개 순경이 자기의 몇 층 직속상관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검찰총장 권승렬 씨의 가슴에다 칼빈 총구를 겨누면서 그의 호신용 권총을 탈취하였던 것이다.
위정 당국자는 맹성하라
사태가 이쯤 되었으니 어찌 하는 수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불법성을 폭로하면서 우리는 총사퇴를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국회에서는 반민특위 위원들을 보선하여 업무를 계속시켰으나 얼마 안 가서 유야무야로 폐지케 되었다.
그 결과 살아난 것은 악질 친일분자들이고 울분을 풀지 못한 것은 온 민족이었다. 나는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반민자의 수사가 한창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나의 아들’ ‘나의 남편’ ‘나의 아버지’ 원수를 갚아달라고 통곡하면서 호소하던 국민들의 모습이. 아침에 출근하면 매일같이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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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가 어지러워진 것도 그 당시에 반민자들을 철저히 처단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고위층이 방귀를 뀌어도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한 위인을, 8·15 전 이력서를 국민 앞에 내놓지 못하는 위인을, 또 국민 최대의 권리인 선거권을 유린한 반민족 겸 반민주 인사가 일국의 수석장관의 자리에 앉은 바도 있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실책이었다. 상전에는 아부하고 국민에게는 권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결과적으로 “귀하신 몸이 어찌 혼자 오셨나이까” 4 등의 새로운 유행어가 발생하게끔 되었다.
이제라도 늦지는 않았다. 위정 당국자는 가장 민주적이요 새로운 정치를 하여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과를 국민 앞에 진사(陳謝)하며 국리민복을 도모하여 주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다.
4 1957년 8월말 대구·경북 지역에서 벌어진 가짜 이강석(李康石) 소동을 희화화한 유행어다. 1957년 8월 30일 어떤 청년이 경주경찰서 서장실로 전화해 자기가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라 주장했다. 경주서장은 즉시 그 청년이 기다리는 다방에 가서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다음날 경주 관광지로 직접 안내했다. 이후 영천, 안동, 대구 등지에서도 이강석을 사칭하여 환대를 받았고 거금까지 챙겼다. 9월 1일 경북도지사 관사에서 묵게 되었는데 도지사가 이강석과 동기동창인 아들을 불러 확인한 결과 가짜임이 들통났다. 이 사건으로 ‘귀하신 몸’이 유행어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