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뜨겁고 의로운 이름, ‘미스터 션샤인’

1994

1908년에 발간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 실린 의병 모습. 촬영자 맥켄지는 종군기자로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의 침략과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면서 그 침략상을 비판하고 민중들의 고초와 항일 의병의 모습을 기록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오.”

2018년 7월부터 9월까지 tvN에서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 최종회의 한 장면. 맥켄지가 촬영한 의병 사진을 드라마로 연출하였다.

어린 소년부터 장년까지 가지각색의 복장을 착용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어설프게 집총執銃했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도서에서는 어디서나 한 번쯤은 마주한 대표적인 의병 사진이다. 이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가 남긴 것으로,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한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을 인터뷰하면서 찍었다.

의병은 일제가 이 땅을 유린蹂躪하기 시작한 때부터 해방이 찾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였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일본 군경에 잡혀 일제의 ‘성과기념’으로 기록된 사진이다. ‘영롱한 눈과 자신만만한 미소’라고 표현한 결의에 찬 의병의 모습은 맥켄지가 촬영한 장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변복한 일본군에게 체포된 의병 이능권의 모습, <병합기념조선의 경무기관>, 1911
이능권은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로 향하던 이준(李儁) 일행을 호위하여 국외로 호송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군인 30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어 강화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접전을 벌이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순국하였다.

박제되어 책으로만 접하던 이 사진 한 장이 201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방송사에서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무명의 의병들’이라는 기획으로 ‘의병 사진’을 소재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제작해 방영한 것이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볼거리 많은 연출로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몇 가지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기 직전의 암울한 대한제국 시기, ‘자유’를 위해 이름도 없이 싸우다 사라진 이들의 기록을 극화한 경우가 드물었고, 다양한 계층이 저마다의 이유로 ‘의병’이 되어 항전하는 모습에 많은 공감을 얻었다.

드라마는 신미양요(1871년)가 발생하는 시점부터 시작하지만 주요 내용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후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군대 해산 등 다양한 사건과 연계하여 극을 전개해 나간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항세력들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위해 투쟁하는, 의병들의 슬픈 싸움을 보여준다.

순국충령봉안회가 조사한 신돌석의 공적조사원고 용지
경북 영해군(현재 영덕군) 출신 의병장으로 동해안 일대의 왜적을 토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의 토벌대에 잡힌 16인의 호남 의병 모습,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 영인본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 간 진행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의 결과물로 ‘기념사진첩’을 제작하였다. 작전 수행에 참여한 일본군과 체포된 의병들, 노획한 무기, 작전 지역 등 ‘토벌의 성과’를 기록하였다.
노획된 무기들,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 영인본
‘폭도들이 사용한 병기’로 기재된 의병들의 무기다.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의병들은 화승총, 칼, 농기구 등 열악한 병기를 가지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들과 맞서 싸웠다.

 

 

 

 

 

 

 

 

 

 

 

 

 

 

항일의병은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상투를 자르도록 공포한 단발령으로 전국 각 지방의 유생들이 왜적과 그 앞잡이들을 처단하자는 취지의 창의문을 내걸면서 봉기한 을미의병으로 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특히 1905년 외교권을 빼앗겨 국가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을사늑약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드라마의 주요 시대적 배경 역시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1905년 이후다. 실제로 강원도 원주의 원용팔 부대를 시작으로, 충청도 홍주의 민종식, 전라도 태인의 최익현, 경상도 영천의 정용기 부대 등 각지에서 을사의병의 불길이 타올랐다. 평민층 의병지도자였던 신돌석(신태호)은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상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는 장면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들의 의병 결합으로 항일투쟁은 전면적으로 확대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그러나 국권회복의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그 의기를 뒷받침할 만한 무기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의병봉기 초기에는 불을 붙여 발사하기까지 30초나 걸리는 짧은 사정거리의 화승총(火繩銃)과 논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의 농기구에 불과했다.

긴 사정거리에 1초에 한발씩 발사되는 스나이더 소총, 무라타 소총을 보유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에는 형편없는 무기였다. 무엇보다 책을 읽던 양반 유생이나 농기구를 만졌던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제의 헌병이나 경찰,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악전고투가 아닐 수 없었다. 무기는 군대해산 후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점차 개선되었다. 그러나 결국 의병은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2개월에 걸친 ‘토벌’작전으로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그 외곽 일대는 살육·방화·약탈·폭행으로 생지옥이 되었다. 일제가 기록한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2,819회의 교전이 있었으며, 14만여 명의 의병이 참전하여 1만 7,688명이 순국했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제의 의병소탕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만주로 이동하여 저항할 것을 다짐한다. 결말에서는 만주로 떠나는 연인이자 동지인 두 사람이 기차 안에서 신분이 탄로나 위기에 빠지지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무사히 만주에 도착한다.

그리고 항일독립군 교관이 되어 태극기 휘날리는 벌판에서 훈련하며 앞으로의 투쟁을 다짐하며 끝을 맺는다. 목숨을 바치면서 가열찬 투쟁을 했지만 결국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긴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이 먼 훗날의 ‘햇살같은 희망’으로 이어가는 열린 결말을 보여준다.

이후 항일의병은 1915년까지 소규모이지만 항쟁을 지속했고 일부는 러시아령 연해주나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해외 독립군 기지를 건설함으로써 1920년대 국외 무장항일투쟁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의’를 위해 뜨겁게 전진했던 의병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목숨을 내놓고 결사 항전을 벌였다. 그러한 정신은 기나긴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촛불혁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불의에 저항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은 민중의 힘은 ‘어둠 속의 션샤인’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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