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에 자못 신성하고 남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취급된 어휘의 하나를 굳이 꼽자면, 그건 바로 ‘천장지구(天長地久)’의 몫이 아닐까 싶다. 이는 “하늘과 땅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에 나오는“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며, 하늘땅이 능히 길고도 오랜 것인 까닭은 스스로 살려하지 않음으로써 그런고로 능히 장생할 수 있다(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는 구절이 그 출전(出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쪽에서 이 말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른바 ‘천황(天皇)’이라는 존재를 떠받들고 칭송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탓이다. 이것과 흡사한 표현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천양무궁(天壤無窮)’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 또한 천황의 위상이 영구 불멸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곧잘 애용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천황의 탄생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곧 ‘천장절(天長節)’이며, 여기에는 성수무궁(聖壽無窮)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한편, 이것과 짝을 맞춰 황후의 탄생일은 ‘지구절(地久節)’로 불렀다.
명치 시기 이후 ‘천장절’과 ‘지구절’의 변천 연혁
일본에 있어서 천장절의 유래는 일찍이 광인천황(光仁天皇) 시절인 보구(寶龜) 6년(775년)에 처음 제정되었으나 그 이후에 폐지되었다가, 왕정복고(王政復古, 1867년 11월)와 더불어 명치 원년(1868년) 9월 22일(음력)로 정하여 이것이 부활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명치6년(1873년)부터는 태음력(太陰曆)이 폐지되고 태양력(太陽曆)이 채택됨에 따라 이를 ‘11월 3일’로 환산하여 봉축행사를 벌이게 되었다.
<매일신보> 1911년 12월 6일자에는 강원도 삼척에 사는 ‘얼빠진’ 양반유생들이 천황의 은사금 하사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소식 한 토막이 남아 있는데, 이 기사의 제목 자체가 「천장지구(天長地久)」로 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강원도 삼척군(江原道 三陟郡)에서 상치(尙齒)의 은전(恩典)에 욕(浴)한 최동욱(崔東昱) 외 37명의 양반유생(兩班儒生)은 성은(聖恩)의 우악(優渥)하심을 감격(感激)하여 성덕(聖德)을 만세(万世)에 전하기로 거월(去月) 3일 천장가절(天長佳節)에 복(卜)하여 동군(同郡) 읍내 서단(西端) 죽서루(竹西樓)의 측(側)에 고(高) 8척(尺) 5촌(寸), 폭(幅) 2척 4촌, 후(厚) 8촌의 기념비(紀念碑)를 건립하고 기(其) 기석(基石)은 융기(隆起)한 천연(天然)의 대반석(大盤石)을 이용하였다는데, 전면에는 ‘天長地久’ 후면에는 ‘明治 四十四年 十一月 三日 立 天皇在上 葛人西蜀命我總督 召化南國 恤窮褒節 耆老兩班 勸業省稅 臣民一體 江原道 三陟郡 兩班耆老 崔東昱 金炯國 外 三十六人’이라 서(書)하고, 건립위치(建立位置)는 풍광(風光)이 명미(明媚)하고 조망(眺望)이 절가(絶佳)한 강원도 팔경(八景) 중 유명한 처(處)이라더라.
여기에 나오는 양반 유생들은 딱 1년 전인 1910년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기로포상자(耆老褒賞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이들이었는데, 해가 바뀌어 다시 돌아오는 천장절을 맞춰 그때의 감격을 후대에 전한다는 명분으로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라고 쓴 기념비를 세웠다는 얘기이다. 이 기사는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자체가 식민지 조선에 대해 시혜를 베풀고 이를 과시하는 방편으로 사용된 흔적인 셈이다.
그런데 천장절이라는 것은 오로지 재위중(在位中)인 ‘당대(當代)’ 천황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개념이므로,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면 그의 탄생일에 맞춰 다시 천장절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세상을 뜬 ‘선대(先代)’ 천황의 천장절은 휴일 목록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에 ‘○○천황제’이라고 하여 직전 천황의 제일(祭日, 제삿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정해진 절차이다. 이른바 ‘명치천황(明治天皇, 1852~1912)’이 숨지고 ‘대정천황(大正天皇, 1879~1926)’이 그 자리를 물려받은 직후에 새로 만들어진 칙령 제19호 「휴일(休日)에 관한 건(件)」(1912년 9월 3일 제정)에는 이러한 변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목록을 살펴보면 일본제국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천황제 국가이니만큼 그야말로 모든 휴일은 하나같이 역대 천황과 관련한 축일(祝日)이나 제일(祭日)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1912년 9월 3일 제정 「휴일(休日)에 관한 건」에 포함된 각종 제일(祭日)과 축일(祝日)
이때의 칙령 제정으로 기존의 천장절(11월 3일)은 폐지되고 ‘8월 31일’로 날짜가 변경된 새로운 천장절이 휴일의 하나로 공포되었다. 이와 동시에 명치천황이 죽은 ‘7월 30일’은 명치천황제(明治天皇祭)라는 이름으로 이 목록에 새로 추가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 약간 특징적인 사항의 하나는 천장절과는 별도로 제정된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이라는 휴일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대정천황의 탄생일이 혹서기(酷暑期)에 해당하는 ‘8월 31일’인 탓에 여러 가지 봉축행사를 거행하기 어려운 계절이었으므로, 가을철에 공기 맑고 국화꽃 향기가 그득한 날(10월 31일)을 따로 택하여 이를 축하휴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소화천황(昭和天皇, 1901~1989)’이 등극하였을 때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다. 1927년 3월 3일에 개정된 칙령 제25호 「휴일(休日)에 관한 건(件)」을 살펴보면 우선 기존의 천장절(8월 31일)은 물론이고 천장절축일(10월 31일)도 한꺼번에 폐지되고 ‘4월 29일’로 날짜가 변경된 새로운 천장절이 휴일의 하나로 공포되었다. 그리고 대정천황이 죽은 ‘12월 25일’은 대정천황제(大正天皇祭)라는 이름으로 휴일의 목록에 새로 추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3월 3일 개정 「휴일(休日)에 관한 건」에 따른 변동 내역
한 가지 기억할 만한 대목으로는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명치절(明治節, 11월 3일)’이라는 휴일이 변칙적으로 새롭게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천황의 자리가 바뀌면 직전 천황이 죽은 날짜를 ‘○○천황제’라는 이름의 휴일로 삼다가 또 다른 후대 천황이 등극하는 순간 그마저 폐지되는 순서를 따르는 것이 통례(通例)였다.
하지만 명치천황의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명치천황의 대업(大業)을 영구히 기념하도록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와 관련한 축제일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옛 천장절(11월 3일)에 해당하는 날짜를 ‘명치절’로 명명하여 이를 새로운 휴일로 부활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역을 담고 있는 칙령 「휴일(休日)에 관한 건」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 1948년 7월 20일에 이르러 일본국 법률 제178호 「국민(國民)의 축일(祝日)에 관한 법률(法律)」이 제정되면서 그 부칙(附則) 조항에 따라 일괄 폐지되었다. 종래의 천장절이 ‘천황탄생일’로 개칭된 것을 포함하여 외견상 천황과 관련한 축일과 제일은 휴일의 목록에서 대다수 사라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휴일 가운데 이른바 ‘문화의 날(文化の 日)’은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평화헌법)이 공포된 날을 기리는 뜻에서 제정되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애당초 명치천황의 탄생일에 맞춰 새 헌법의 공포일을 선택하였던 것이므로, 결국 옛 ‘명치절’은 ‘문화의 날’로 둔갑하여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식민지 시절에 이 땅에서 통용되었던 각종 휴일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고 보니,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의 존재이다. 이것은 1910년 9월 29일에 제정된 칙령 제354호 「조선총독부관제(朝鮮總督府官制)」의 부칙에 따라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총독정치가 개시된 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원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집어 삼킨 직후 여러 해 동안 큰 비중을 두어 기념축하행사를 벌인 날은 다름 아닌 ‘병합기념일(倂合記念日, 8월 29일)’이었다. 예를 들어, 이 날은 조선은행을 비롯한 모든 은행지점이 일괄 ‘임시휴업일(臨時休業日)’로 삼을 정도로 그들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병합의 대업(大業)”을 이룬 더할 나위 없이 굉장한 의미를 지낸 행사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15년에 이르러 시정기념일이 공식적으로 제정되고, 더구나 이날을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휴무일로 정하면서 이러한 상황은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6월 26일자에 수록된 관통첩 제201호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의 건(件)」에는 이러한 결정의 취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6월 26일 본부 고시(本府 告示) 제151호로써 ‘시정기념일의 건’이 고시되었는바 이에 관한 취지(趣旨)를 별지(別紙)에 통첩(通牒)하나이다.
[별지]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설치(設置)와 더불어 신정(新政)을 개시(開始)했던 날이다. 병합조약(倂合條約)의 체결 및 그 실시에 있어서 추호(秋毫)의 분요(紛擾)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정(旣定)의 방침(方針) 및 계획(計畫)에 따라 전부 원활(圓滑)히 제반(諸般)의 정무(政務)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명(聖名)의 위덕(威德)과 시운(時�)의 추세(趨勢)에서 기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독부 개시 이래자(玆)에 5주년(五周年) 질서(秩序)의 회복(回復), 제도(制度)의 정리(整理)는 물론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백반(百般)의 시설 경영도 또한 점차 그 서(緖, 발단)에 들었으며, 홍택(洪澤)의 점윤(漸潤)하는 바 상하만상(上下萬象) 각기 안도(安堵)하고 치평(治平)의 경(慶)에 욕(浴)하여 조선통치(朝鮮統治)의 기초는 이미 확립되어 시정의 방침은 오래도록 넘쳐나는 것이 될 것인즉, 이제 자금(自今) 매년 10월 1일로써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로 정하여 영구히 이러한 성사(盛事)를 명간(銘肝, 명심)하고 일층(一層) 여정노력(勵精努力)하여 제국(帝國)의 강운(降運)에 공헌(貢獻)토록 하려는 소이(所以)이다.
이에 따라 경성신사와 같은 곳에서도 종래 병합기념일에 올리던 항례(恒例)를 시정기념일로 바꿔 거행하기로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15년 8월 27일자에 수록된 「기념제일(記念祭日) 변경(變更)」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경성신사(京城神社)에서는 매년의 항례(恒例)로 8월 29일 일한병합기념제(日韓倂合記念祭)를 집행하더니 본년 6월 총독부 고시 151호로서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로 정하였으므로 동신사(同神社)에서 내(來) 29일의 병합기념일제를 개(改)하여 10월 1일의 시정기념일제를 집행하기로 하였더라.
이처럼 병합기념일을 제치고 시정기념일이 그 자리를 차지한 까닭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그 이유가 공표된 적은 없었으나, 짐작컨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이날이 곧 조선인들에게는 ‘국치기념일(國恥記念日)’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여성독립운동가 지복영(池福榮, 1919~2007) 여사가 남긴 증언에는 “이날은 우리 교포 어느 집을 막론하고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는 구절 한 토막이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비분강개(悲憤慷慨)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날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식민통치자들에게 이날만큼은 신경과민(神經過敏)에 가까울 정도로 경계태세를 늦출 수 없고, 그저 평온무사(平穩無事)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날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굳이 조선인들의 민심을 자극할 ‘병합기념일’에 왁자지껄하게 축하기념행사를 벌이기보다는 새로운 총독정치의 성과를 과시한다는 명분으로 ‘시정기념일’ 쪽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