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혁명군, 서세명 그리고 양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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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조선혁명군,
서세명 그리고 양세봉

김유 광동지부장

1931년 연말을 며칠 앞둔 12월 16일이었다. 일본 관동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고 그로부터 꼭 석 달이 지났으니 투쟁의 방향 및 목표를 다시 짜야 하겠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모인 서세명의 집은 무순 교외 흥경현에 있었다. 여기에서 행정부와 같은 ‘국민부’ 그리고 정치의 중심인 ‘조선혁명당’, 군 대표인 ‘조선혁명군’ 그러니까 당, 정, 군의 대표들이 모여 앞일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사람들 중에는 밀정이 있었으며 그들로 인하여 회의 사실이 누출, 일본군의 습격으로 참석하였던 중요 간부 모두는 봉천에 있는 일본 헌병대에 잡혀갔다.

그러나 대표들은 굴하지 아니하고 비상대책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국민부’의 위원장으로 양기하를,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양세봉을 다시 뽑았다. 이것은 ‘흥경사건’이라고 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그것은 먼저 서세명이라는 애국자가 있었으며, 1930년대 무장운동이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처럼 일회성 투쟁이 아니고 면면히 내려오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 양세봉은 전투에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영릉가와 통화까지 점령하고 관리하였다는 점이며, 그리고 또한 조선인으로서 나아가 ‘중국공산당’과의 최초 합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서세명의 집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상징적 장소가 된다.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양세봉이 있었다.

나는 지난여름에 서울에 있는 양세봉의 무덤을 찾았었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이라는 그의 활동무대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단출하게 ‘순국선열 양세봉의 묘’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있는 북한의 묘비에도 ‘독립군 사령’이라고만 적혀있지 ‘조선혁명군’이라는 원래 그의 소속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고 얼마 전 북한을 다녀온 인사로부터 들었다. 김일성은 해방과 동시 아버지 김형직의 의형이며 그의 은인이기도 한 양세봉의 유해를 모셔오고 새로 단장한 애국열사능에는 1986년 이장하였지만 철저히 ‘조선혁명군’이라는 말을 숨겼다. 따라서 ‘조선혁명군’이라는 말은 그의 공이 혁혁하였음에도 점차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왼쪽) 왕청문 조선족소학교에 위치한 양세봉 장군의 흉상. ‘抗日名將 梁瑞鳳’이라 새겨져 있다. (가운데) 서울 국립현충현 애국지사묘역에 소재한 ‘순국열사 양세봉의 묘 (오른쪽) 평양 애국열사능에 위치한 ‘독립군 사령’ 량세봉 선생 묘비. 양세봉 장군의 유해가 모셔져 있음

생득적으로 ‘혁명’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를 교묘히 이용하여 적을 만들고 권력을 쟁취하려 힘쓰는 사람을 이름하는 것인데 아마도 북한을 포함한 대다수 후진국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주에 김일성이 ‘조선혁명군’의 지도자였다는 그들의 말에 놀랐었다. ‘역사를 왜곡하다니? 이젠 아주 광분하는구나.’ 솔직히 친일인사가 대부분인 우리에게 근대사는 뜨거운 감자였던 데 비해 북한에게는 정통성을 주장할 좋은 재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마음놓고 역사를 왜곡하게 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양세봉은 가난한 농민 출신이고 일찍 아버지가 죽었다. 그의 부인은 생활난에 팔려오다시피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밑으로 둔 세 동생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특히 셋째동생은 같이 투쟁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가 소작농 출신답게 전투가 없는 날이면 주민들과 함께 벼농사를 지었다.그리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일제와 싸우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런 양세봉인 만큼 공산주의자가 보기에 그들 이념에 적합한 사람을 어디에서 찾을 수있겠는가. 또한 양세봉은 김형직이 죽고 난 뒤김일성이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에게는 자연히 하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말들을 한다. 양세봉이 1934년 9월 숨을 거두면서 유언으로 백두산 영의 김일성을 찾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따라서 김일성이 자연스럽게 ‘조선혁명군’을 통솔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평양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독립군 사령으로만 적혀져 있지 ‘조선혁명군’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경애하는 수령만이 ‘조선혁명군’의 수령이시고 오직 그만이 ‘혁명’이라는 말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서울에서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순국선열’이라고 하여 오히려 두루뭉술 넘어갔다. 북은 한층 더 오만해졌다. 남과 북이 짜고 고스톱을 친 셈이다. 하기사 통일에 대한 국민의 기대만 잔뜩 올려놓고서 자기네들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똑같이 독재를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하였으니까.

양세봉은 김일성을 찾아가라고 말한 적이 없다. 1932년 김일성이 ‘조선혁명군’에 입대시켜달라고 찾아온 때에도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거절한 적이 있다.

‘조선혁명군’은 1934년 양세봉의 전사 이후로 김활석이 총사령, 박대호가 부사령을 맡았다. 혁명군 내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비교적 엘리트축에 속하는 제1중대장 한검추는 나중에 변절하여 ‘조선혁명군’을 분쇄하는데 앞장섰다. 그림자처럼 양세봉을 따랐던 제2중대장 최윤구는 끝까지 ‘조선혁명군’을 지키기 위하여 동숙서식 풍찬노숙,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양세봉 사후 4년 뒤인 1938년에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결국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었다.

그리고 그해 말 길림에서 가까운 ‘소류수하자’의 산속에서 적과 교전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서 ‘조선혁명군’의 역사는 끝이 났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장장 십년이 넘는 역사였다. 참고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자진입당하였으며 공산당 지류인 ‘동북인민혁명군’을 거쳐 ‘동북항일연군’, 그러나 1940년 11월에 소련으로 피신한 바 있다.

사람의 행적이란 기묘하지 아니한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일은 생곱스리 원래 뜻하던 목표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때로는 얼토당토아니한 결론을 맺기도 한다. 서세명의 집에서 벌어진 ‘흥경사건’은 민족진영에 최초의 고초를 안겨주었으나 ‘국민부’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여 양세봉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낳게 되었다. 그로 인해 독립운동의 맥은 30년대에도 면면히 이어지게 되었다. 최윤구가 전사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마지막 숨을 다하게 되지만 끝난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정기는 우한에서 1938년 결성된‘조선의용대’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국제정세로는 조선인민만 하던 이제까지의 독립운동이 지금부터는 한국과 중국의 연합을 부르고 당시 한창이었던 공산당을 인정하게끔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서세명의 집은 독립운동과 한중연합, 길게 보면 남북분단의 아픔까지 아우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역사는 진실을 요구한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조선혁명군’을 다시 보고 양세봉을 나오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개발정책이다. 언제 어떻게 허물어질지 모르는 이 유적을 잘 간수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의 집 곧 흥경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사버릴까 고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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