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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르포] 조선인학살 100년째 미궁…”물에 처넣고 콘크리트 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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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쓰가와 발전소 건설현장서 벌어진 조선인 학대와 사망
학살 시사하는 복수의 증언…1년 뒤에는 간토학살 참극

조선인 한바가 있던 마을 [촬영 이세원]

(쓰난마치·도카마치시[일본 니가타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거기를 팠더니 인골이 이런 골판지 박스 하나 정도 나왔다.”

일제 강점기 일본 니가타현 산간 마을 쓰난마치(津南町)에 발전소를 만들 때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쓰난마치 주민 N씨가 역사 교사였던 사토 다이지(81) 씨에게 1983년 증언한 내용의 일부다.

1922년 무렵 나카쓰가와 상류에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때 조선인 수백 명이 투입됐는데 ‘나카쓰가와 조선인 사건 학살’이라고 불리는 참극이 실제 벌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진술이 꽤 있다.

나카쓰가와 제1발전소 [촬영 이세원]

조선인들은 중노동에 시달렸고 학대와 가혹행위가 일상적이었다는 것은 여러 경로로 파악된 바 있으나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학살에 관한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기자는 사건이 알려진 100년을 계기로 21∼22일 쓰난마치와 도카마치시 일대를 찾아갔다.

◇ “조선인을 매질한 현장에는 무너진 빈집만”

나카쓰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된 현장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토씨는 조선인을 구타하거나 괴롭히는 광경은 100년 전 마을 곳곳에서 목격됐다고 전했다.

나카쓰가와 제1발전소 전경 [촬영 이세원]

니가타에 온 조선인들은 ‘한바'(飯場·함바) 혹은 ‘감옥방’이라고 불린 합숙소에서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중노동에 시달렸다.

조선인은 전력회사-원청회사-하청회사-한바의 중층 구조 속에서 착취당했다.

공사 현장은 위험했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중간에서 떼가거나 강제저축을 시키는 바람에 손에 쥐는 월급은 약속보다 훨씬 적었다.

한바는 감독자가 조선인을 구타하고 괴롭히는 공간이었다.

그중 하나가 나카쓰가와 발전소에서 남쪽으로 300∼4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그 자리에 창고처럼 생긴 건물이 방치된 채 반쯤 무너져 있었다.

한바 있던 자리에 무너지는 건물 [촬영 이세원]

“(조선인이) 달아나거나 일하는 태도가 나쁘면 몽둥이로 후려갈겼다”, “몽둥이로 때리는 것을 나무 창문 너머로 자주 엿보았다”는 일제 강점기 목격담이 1982년 발행된 지역지 니가타일보에 실리기도 했던 곳이다.

사토씨는 당시 니가타일보 기자가 목격자를 만날 때 곁에서 함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물론 폭행을 직접 본 주민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자식이나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사토씨와 함께 목격자 중 한 명이 살던 집을 찾아갔으나 부재중인지 불러도 답이 없었다.

근처에서 나무를 자르던 노인은 마을에 사는 것은 이제 세 가구뿐이라고 말했다.

사토 다이지 [촬영 이세원]

사토씨가 1980년 무렵 어르신들을 상대로 수집한 증언을 토대로 여전히 베일에 싸인 참혹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1907년생인 한 노인은 조선인이 게으름을 피우면 현장 감독자가 시멘트 용기를 해체한 널빤지로 볼기를 때렸다면서 “거의 노예 취급”을 받았고 달아났다가 잡히면 “죽을 정도로 맞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멍석이 피로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조선인을 때리거나 흥분한 감독자가 칼을 꺼내와서 베겠다고 하는 바람에 불상사를 막기 위해 칼을 따로 맡아둔 적도 있었다고 했다.

조선인 한바가 있던 마을 [촬영 이세원]

사토씨는 도를 넘은 폭행이 “달아나면 호되게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절대 도망갈 수 없음을 절감하게 해서 어떻게든 노동력을 유지하려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토목 공사 현장이나 탄광은 일본인에게도 기피 대상이었다.

1902년생인 한 주민이 남긴 증언에서 100년 전 사회 질서는 현대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는 나무에 조선인 시신이 매달려 있는 것을 숲속에서 몇 번이나 봤다면서 “그렇지만 일일이 경찰에 신고하는 일은 없었다. 관련되는 것이 싫었고 무정부 (상태) 같았다”고 말했다.

◇ “물속에 처넣고 콘크리트 흘려”…학살 시사하는 증언도

학대와 폭력은 죽음을 부르기도 했다.

1922년 7월 29일 나카쓰가와 조선인 학살 사건을 처음 알린 요미우리신문을 보면 ‘학살된 조선인의 시신이 강을 따라 자꾸 흘러내려 온다’는 취지의 설명이 실려 있다. 파문이 확산하면서 조선인 조사단이 서울과 도쿄에서 파견됐다.

동아일보는 1922년 8월 초 편집국장 이상협을 현지로 보내 연재 기사를 싣기도 했다.

발전소 공사장 인근의 마을 [촬영 이세원]

조선인들은 지독한 감시와 폭력의 실태를 폭로했으나 조선인 조사단은 일제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보도관제 등 어려움 속에 학살의 결정적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대신 조사단은 조선인이 학대로 숨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학대치사) 10여 건을 당국에 제출했다.

1980년 무렵부터 주민들을 상대로 청취조사에 나선 사토씨는 학살이 실제로 벌어졌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증언을 꽤 수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N씨의 진술이다.

1972년에 발전량을 확대함에 따라 나카쓰가와 제1발전소 위쪽에 있는 고노야마(高野山)댐 재개발 및 발전소 수차가 있는 곳까지 물을 공급하는 수압철관을 증설하는 공사가 실시됐다. 그 무렵 일대를 팠더니 많은 유골이 나왔다는 것이 당시 증언의 요지다.

나카쓰카와 제1발전소에 물공급하는 수압철관 [촬영 이세원]

N씨는 “지금 파헤쳐봐도 그런 것이 나올 것이므로 당시에 잔학한 짓을 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 아니겠냐”며 “거기는 낙반 사고가 있었던 장소가 아니고 파낸 구멍에서 (뼈가) 나온 것이므로 당시 신문 등에 실린 (학살)사건이 정말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비슷한 목격담도 전해진다.

사토씨가 접촉했던 다른 주민은 “철관로를 떠받치는 가장 아래의 콘크리트를 팠더니 갑자기 구멍이 뚫리고 백골이 나왔다. 인골은 시신(살)이 썩었기 때문에 뼈 주변에 틈이 생긴 것 같다”고 댐 확장 공사를 했던 업체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급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수압철관 [촬영 이세원]

사람 뼈가 한 박스 정도 나왔다고 목격자들이 지목한 곳은 고노야마댐 제방과 수압철관 사이를 말하는 것 같다고 사토씨는 추정했다.

어떤 주민은 “제방을 쌓아 올린 곳에 (조선인이) 재물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속에 처넣고 콘크리트를 흘려 넣거나…공사장 감독인지 누군지의 명령으로 ‘아이고 맙소사’라고 하며 했을 것이다. 꽤 많이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현대의 상식으로는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나카쓰가와 [촬영 이세원]

이상협이 1922년에 쓴 기사를 보면 우덕동, 우윤성, 우인찬 등 달아나다 붙잡힌 조선인 세 명을 겨울에 발가벗겨 찬물 속에 넣어 괴롭히거나 꿇어 앉힌 상태로 돌과 시멘트 반죽을 섞어 붓기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료들이 애원해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했다고 돼 있으나 사토씨가 주민들에게서 들은 것과 수법이 유사하다.

이밖에 겨울에 조선인의 손을 뒤로 묶고 차가운 강물에 넣어 숨지게 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여러 명이 조선인 학살에 관한 증언을 남겼음에도 당국은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 기록을 남기는 것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나카쓰가와 제1발전소 [촬영 이세원]

쓰난초사(津南町史) 조사집필위원이던 사토씨는 일련의 증언을 포함한 논문을 1984년 간행된 역사서 ‘쓰난초사 편집자료’에 실으려고 했으나 지자체가 거부했다.

나카쓰가와 조선인 학살사건 1년 뒤에는 간토 학살이 벌어진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의 혼란 속에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확산하고 일본인 자경단·경찰·군인 등이 재일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을 학살했다.

간토 학살 역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으며 희생자가 6천 명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 눈에 보이는 조선인의 흔적은 ‘학살’ 아닌 ‘순직’

니가타현 각지에 설치된 비석에는 ‘학살’이 아닌 ‘순직’이 새겨져 있었다.

도카치마치시에 있는 미야나카취수(取水)댐 근처에 가니 ‘순직자 위령의 비’가 있었다.

비석 아래에 설치된 석판에 희생자의 이름과 사망 당시 나이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히로타 고토 무라야마 료이치(廣田事村山鐐一) 36세’, ‘가와다 고토 스즈키 류조(川田事鈴木留造) 17세’라고 특이한 방식으로 기재된 이들이 2명 있었다.

고토는 어떤 인물의 통칭(통명)이나 아호 등을 표기할 때 본명 앞에 붙이는 말이다.

순난자 조혼비 곁에 핀 무궁화 [촬영 이세원]

사토씨는 히로타 고토 무라야마 료이치에 대해 “히로타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무라야마 료이치였다는 의미다. 일본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일부러 ‘누구누구 고토’라고 하지 않는다”며 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설명했다.

출신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단언할 수는 없었다.

차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 신사 곁 작은 공동묘지에는 ‘순난자 조혼비’에서 조선인 가능성이 더 큰 성명이 확인됐다.

비석에 새겨진 ‘도천선득'(道川先得) [촬영 이세원]

‘도천선득'(道川先得), ‘도변용진'(渡邊用鎭)이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미치카와 센토쿠’, ‘와타나베 요진’이겠지만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선득’, ‘용진’이라고 조선식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조선인이 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사실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순직비’는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센주발전소 근처에 있다.

비석 뒷면에 ‘제1기 방수로(放水路) 공사 쇼와 12년(1937년) 9월 준공’이라고 적혀 있었고 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안칠복’ 새겨진 순직비 [촬영 이세원]

이 가운데 한 명이 ‘안칠복'(安七伏)이었다.

조선인이 일제의 사회기반 시설 건설에 동원됐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는 인적이 드문 벌판에 숨겨져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 시절 만연했던 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감시를 고려하면 고인이 ‘순직’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중국인 위한 비석에 “역사적 책임”…피해자 183명 이름 새겨

근처의 절에는 니시마쓰건설이 중국인 강제 연행 피해자들과 화해하면서 낸 돈으로 2016년 11월 건립한 ‘평화 우호의 비’가 있다.

중국인 강제연행 피해자를 위한 평화우호비 [촬영 이세원]

일본이 2차 대전 말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각의 결정에 따라 약 4만 명의 중국인을 일본 각지의 사업소에 연행해 고역(苦役)을 강요했다”는 것과 니시마쓰건설이 연행된 중국인 183명을 시나노가와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부렸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또 피해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벌였고 니시마쓰건설은 “기업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인정했다”고 명시했다. 비석 뒷면에는 피해자 183명의 이름도 새겼다.

비석의 크기와 설치 장소는 물론 설명문도 조선인의 흔적을 담은 순직비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 측이 가해 행위와 관련해 중국과 한국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이세원 기자 sewonlee@yna.co.kr

<2022-07-27> 연합뉴스

☞기사원문: [르포] 조선인학살 100년째 미궁…”물에 처넣고 콘크리트 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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