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재심 끝에…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 서훈

93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결정… “당연한 일, 가슴 벅차게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워”

▲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벌인 김명시(1907~1949), 김형윤(1910~?) 형제. ⓒ 윤성효

드디어, 아니 이제야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金命時, 1907~1949) 장군이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가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 장군에게 ‘국민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고 12일 밝혔다.

경남 창원마산 출신인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 중국 화복지역에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여성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여 ‘조선의 잔다르크’ 내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김명시 장군은 1925년(18세)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했고, 1927년 재학 중 상하이로 파견돼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을 조직했으며,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을 주도했다.

장군은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돼 7년간 복역했고, 1939년 출옥한 뒤 중국으로 탈출해 ‘팔로군’에 들어가 천진, 제남, 북경, 태원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광복 후 장군은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 서울지부 의장단에 이어, 1947년 6월 29일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군정청을 방문해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했다. 이후 1949년 10월 10일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했다.

김명시 장군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해왔고, 해방 이후에는 ‘신탁 통치 반대’ 활동을 벌였지만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독립유공 서훈도 쉽지 않았다.

공적심사 탈락… 시민단체가 자료 찾은 끝에 재심

▲ 국가보훈처가 열린사회희망연대에 보낸 김명시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 안내문. ⓒ 윤성효

2000년대 들어 시민사회단체가 나서면서 김명시 장군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흉상 건립과 생가터 표지판 제작에 이어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나선 것이다.

이 단체는 2018년 12월 ‘김명시 장군 흉상 건립’을 제안한 데 이어 ‘김명시 장군 친인척 찾기 신문광고’를 냈다. 이듬해 8월 21일 이 단체가 찾아낸 친인척들과 함께 창원마산 오동동 생가터 옆에서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과정은 어려웠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9년 1월 국가보훈처에 포상 신청을 했지만 국가보훈처는 그해 11월 ‘공적심사 탈락’이라고 회신했다. 사유는 ‘사망 경위 및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이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심사 탈락 사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완‧반박 자료를 찾아 나섰다.

이 단체는 김명시 장군이 광복 후 ‘북로당 정치위원’이었다는 주장 때문에 심사에서 탈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김명시 장군이 부천경찰서에서 사망하자, 당시 김효석 내무부 장관은 ‘김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이고 유치장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사로 남아 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북로당 정치위원이 사실이었는지부터 살폈다. 이들은 “우리나라 국토통일원에서 1988년에 펴낸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 자료집>을 보면 김명시 장군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들어 가 있지 않았고, 중앙위원‧감찰위원 명단에도 없다”며 정치위원회라는 조직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이들은 1948년 3~4월 평양에서 열린 ‘북로당 2차대회’ 관련 자료에도 김명시 장군이 언급돼 있지 않았고, 북한 국립묘지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도 김 장군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밖에 사망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국가기록원, 경기남부경찰청(부천경찰서)에 행정정보공개를 요청했는데, “해당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21년 7월 국가보훈처에 재심을 신청했다. 이후 국가보훈처 학예연구사가 같은 해 11월 열린사회희망연대를 찾아 김명시 장군의 친인척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가보훈처는 김명시 장군에 대해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기로 하고, 이는 지난 9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자라면서 ‘빨갱이 집안’ 소리 들을까 싶어 숨겼다”

▲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김명시 장군의 친인척들이 서훈 소식을 듣고, 8월 10일 오후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김영만 상임고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2남 3녀의 셋째로 태어났던 김명시 장군은 오빠(김형선), 남동생(김형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장군의 직계 후손은 없고, 친인척들이 서울과 창원, 거제 등지에 살고 있다.

이는 열린사회희망연대가 2018년 12월 친인척 찾기 신문 광고과 언론 홍보 과정에서 친인척들이 나타나며 파악했다.

10일 오후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 만난 몇몇 친인척들은 독립유공자 서훈 소식에 반가워하면서도 그동안 어려움을 털어 놓았다.

외사촌 김필두(85)씨는 “누나를 직접 본 적은 없고 사진으로만 봤다. 어머니께서 장롱 속에 신문지로 감싼 사진을 꽁꽁 숨겨 놓았고, 어릴 때 무슨 사진이냐고 물으면 ‘몰라도 된다’고만 했다”며 “세월이 흐르고 나서 나중에 어머니께서 ‘사촌 누나인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면서 ‘명시 누나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더라”고 기억했다.

김필두씨는 “자라면서 ‘빨갱이 집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 누나 이야기를 밖에는 못하고, 가족들만 알고 지냈다”며 “몇 해 전부터 열린사회희망연대가 나서서 재조명에다 서훈 추진을 하면서 힘을 얻게 됐고, 그래서 사진도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필두씨는 김명시 장군이 모스크바 유학 가기 전에 동생(김형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가 2019년 공개했다.

그는 “누나가 하루에도 몇 백리를 걸어 다니면서 독립투쟁을 했다는 소리를 부모로부터 들었다”며 “누나가 부천경찰서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당시 우리는 가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못 받았다”고 했다. 김명시 장군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김명시 장군의 종조카(5촌) 김미라(63)씨는 “아버지는 김명시 장군이 훌륭하고 똑똑했다고 기억하셨다. 남자들도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을 여성으로서 했다고 하시더라.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김명시 장군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는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순경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고, ‘연좌제’로 오빠들은 신원조회를 당해 공직에도 나아가지 못했다”며 “그래서 그런지 몇 해 전에 친인척을 찾는다는 기사를 보고 처음에는 망설였다”고 털어놨다.

김필두씨는 “처음에 서훈이 안됐다고 했을 때 국가를 원망했다”며 “이번에 서훈을 받게 돼 다행이다”고 말했다. 김미라(종조카)씨는 “서훈 신청이나 자료를 찾는 작업은 개인이 할 수 없는데, 열린사회희망연대에서 나서서 해줘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은 “친인척 찾기를 하면서 연락을 받고 많이 놀랐다. 바로 우리 곁에 수십년 동안 사셨는데 까마득하게 몰랐던 것이다”며 “그만큼 친인척들은 ‘연좌제’가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촌인 고 김형도 선생을 생전에 만났더니 누나에 대해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 고문은 “김명시 장군은 우리 동네 출신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향 출신 중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있으면 찾아내고 기리는 일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일은 친족만이 할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해야 하는 것”이라며 “김명시 장군의 서훈 작업은 문재인정부 때 황기철 보훈처장이 있을 때부터 시작이 되어 이번에 결정이 된 것”이라고 했다.

김명시 장군 형제의 독립운동을 조사해온 이춘 작가는 “김명시 장군이 고향인 창원마산에서조차 알려진 게 얼마 되지 않는다. 김영만 고문이 서훈 신청 작업을 집요하게 해오셨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민간단체가 한 셈이다”며 “오빠와 남동생의 독립운동도 새롭게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명시 장군 독립유공자 서훈 추서 환영”

▲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했던 김명시 장군의 친척들이 2019년 8월 21일 생가터인 창원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쪽에 모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윤성효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입장문을 통해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가슴 벅찬 반가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하나 된 조국을 갈망했던 김명시 장군은 1949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해 생을 마감했다. 개인과 가족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며 “이후 김명시라는 이름은 가까운 친족들의 입에서조차 올릴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고향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운동가를 세상에 알리고 그 공적을 인정받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며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동포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독립운동이 민족주의 입장이건 사회주의 입장이건 최소한 해방되는 그날까지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그동안 김명시 장군의 친족이라는 말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고 살아온 가까운 친인척 여러분들께도 축하드린다”며 “김명시 장군 명예회복과 선양사업에 동참하고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창원시와 시민들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고 인사했다.

<2022-08-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재심 끝에…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 서훈

※관련기사

☞연합뉴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독립유공자 인정…”늦었지만 환영”

☞뉴스1: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재심 끝에 독립유공자 인정

☞경남신문: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재심 끝에 독립유공자 인정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