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5) 금송아지를 부수어야
사람 아닌 자본을 좇는 현대사회
일그러진 사회·경제·정치의 모습
“모세는 진영에 가까이와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과 수송아지를 보자 화가 나서 손에 들었던 돌판들을 산 밑에 내던져 깨버렸다. 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탈출기32, 19-20)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놓았다. 그런데 이 일이 죄가 되었다.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예배하러 베텔과 단까지 갔다.” (1열왕12, 26-30)
2011년 12월, 제가 청구 성당에서 은퇴하기 직전에 손석춘 교수와 두 차례의 대담을 가졌습니다. 은퇴를 기념해 이를 정리해 책으로 엮기로 한 것입니다. 대담을 하고 며칠 뒤 정리된 내용을 이메일로 받았는데 상당히 원색적이고 거친 표현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많은 부분을 교정하고 종합했습니다. 그리고 책 제목은 ‘금송아지를 부수어야’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손 교수는 좋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여 뒤에 출판사 대표 등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청년 100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금송아지를 부순다’라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핵심이 같은지라 저도 기쁘게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금송아지를 부수어야’를 끝까지 주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역사기도를 붓글씨로 쓰면서 이 글귀를 선택한 이유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왜 그렇게 우매했나
되돌아보면 오히려 그때 이 글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0여 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일 올해 새 책을 낸다면 이것을 제목으로 쓸까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구약학을 전공한 선배 사제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오늘날 그 제목은 좀 진부하지 않은가? 요즘 금송아지를 부수자면 누가 수긍하겠는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 메시지는 ‘금송아지를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금송아지에 종속되지 않고 넘어서야 한다’라는 것이지만, 한마디 말로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탈출기(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하느님과 상봉합니다. 백성들은 그 기간이 너무 길고 답답해 아론에게 몰려갔습니다. “일어나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온 저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탈출기12, 1) 이에 아론이 여인들의 귀걸이를 모아 수송아지 상을 만들고 그 신상 앞에 번제물과 친교제물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 분노하셨고 모세가 급히 산에서 내려와 그 금송아지 상을 부수고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이 마시게 했다는 일화입니다. 일종의 보속과 속죄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역사적 사실처럼 생각하고 얘기합니다.
저는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그렇게 우매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그 큰 은혜를 받고서 하느님을 배반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사제 중의 사제, 대 사제입니다. 아론이 어찌 그리 미련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저는 이 이야기를 현실과 연계해 묵상하며 이 말씀을 일종의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자,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십계명을 잘 지키겠다고 성대하게 다짐하지만 언젠가는 하느님 대신 금송아지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금송아지를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섬길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를 예견해서 성서 작가가 이 얘기를 집필한 것이니 여러분은 그 핵심을 잘 파악해 하느님을 망각하고 돈과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것이 저의 설명입니다.
성전 단에 베텔에 금송아지상
자본주의가 바로 현대판 금송아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금송아지 얘기를 듣고서 비웃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본에 머리 숙이고 자본에 예속되어있는 우리 자신, 우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교우들과 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때로는 좋은 선물과 예물도 받습니다. 수도자들도 한가지입니다. 이때에 터득한 것이 통로 역할입니다. 교우와 은인들이 사제에게 정성껏 선물을 바치면 그것을 사양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 그것을 더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하는 나눔과 매개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하나의 통로입니다. 만일 선물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썩게 마련입니다.
한 정치인이 “이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냄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모두 궁금해하니 그는 “돈 썩는 냄새”라고 답했습니다. 그때 농담 잘하는 한 형제가 “고약해도 좋으니 돈 썩는 방석에 한 번 앉아 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응수해 모두가 웃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웃음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묵상과 기도 그리고 자기 성찰입니다.
외경 묵시록이 묘사한 지옥은 ‘세상에서 호화롭게 살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벌 받는 곳’입니다. 돈방석에 앉아 있던 부정부패한 정치인들과 재물에 눈이 먼 부자들이 지옥에서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12,13-21)의 교훈도 다르지 않습니다. 돈방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돈을 넣어둘 새 창고를 지으려 했는데 바로 그날 밤에 하느님께서 부르시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비유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교훈입니다.
탈출기의 금송아지 사건은 기원전 9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유다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됩니다. 남쪽은 다윗 왕조를 이은 유다왕국이고, 북쪽은 예로보암이 초대 왕에 오른 이스라엘 왕국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주민들이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고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까. 북쪽 왕은 예루살렘 성전의 거릅 천사상과 버금가는 상징으로 단과 베텔에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숭배하고 기도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간 것과 똑같다고 선언했습니다.
정치적 묘안으로 포장되었지만 사실상 종교적 분열과 타락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송아지 숭배의 배경입니다. 왕의 명령에 순응한 백성들과 달리, 예언자들은 “아니요!”라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왕과 권력자에 맞선 예언자들의 하느님 사랑, 우상 항거 운동입니다. 예언자들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 정책을 무섭게 비판합니다. 뜻있는 성서 작가들은 이 사건을 300여 년 전 모세의 시대로 끌고 올라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아론을 비롯한 사제들이 엉뚱한 일을 벌였을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보지 않았느냐’라는 의도입니다. 따라서 금송아지는 모세 시대에 아론이 지은 죄가 아닙니다. 300년 후인 북이스라엘의 왕과 사제들의 가증스러운 행업을 꾸짖기 위한 역사적 재구성입니다.
실제로 이집트의 황소 신 아피스(Apis) 등, 중동 여러 나라에서 소는 힘을 상징하며 종교적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 전통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 반드시 암송아지를 봉헌했습니다. 금으로 만든 수송아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질타와 함께 조롱의 의미도 담겨 있는 셈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예언자의 호소
여기서 잠시 여성 신학의 주제를 얘기하려고 합니다. 몇 달 전에 어느 수녀님이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소식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수컷들이란…. (용서하시라, 순전히 여성주의자인 나의 표현 방식이다.) 영역을 표시하고 확장하는 동물 왕국의 수컷들처럼 건물을 확장하고 치적과 경쟁에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인다. 성지를 크게 짓는 것만이 순교자를 공경하고 영성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일까?” 저는 편집자에게 원색적이고 거친 ‘수컷’이라는 단어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송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암송아지만이 하느님께 합당한 제물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시대에 하느님께 암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성별이 아니라 내면의 자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동물의 제사와 향불을 역겨워하신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역겹다는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닌 제물을 바치는 이들의 지향과 자세를 말합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너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 11-17) 오늘날 종교인들 특히 가톨릭의 경우에는 주교와 사제, 개신교의 경우에는 감독과 목사 등 모든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심장에 되새기고 심장을 찢으며 뉘우쳐야 합니다.
“금송아지를 부수어야”라는 교훈은 여전히 살아 계신 하느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여의도 금융센터와 뉴욕 금융센터 앞에는 황소 금상이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부수라는 것은 황소 금상이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만들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금융 마피아와 정상배 집단 때문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는 사람들이여, 금송아지를 숭배하지 말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보살피고 무엇보다 하느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금송아지를 부수어야’의 교훈입니다. 조상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오랜 우리 전통이 알려주는 기본 도리입니다. 이것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이 기본 원리를 짓밟고 깬 장본인이 독재자들이며, 그에 기생한 이들이 재벌과 공직자들, 검찰 졸개 무리입니다. 한시바삐 금송아지를 부수어야 할 이유입니다. 또한 이것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일그러진 종교체제를 부수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예언자의 기도와 호소 그리고 외침입니다.
하느님, 저희 모두 본질은 찾고 깨닫고 실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2022-08-08> 한겨레
☞기사원문: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들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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