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병일
화신백화점 사장인 친일파 박흥식은 반민특위 체포 1호다. 1949년 1월 8일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붙들렸다. 그가 내세운 변명 논리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자금 횡령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도 그랬다.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비행기회사를 설립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재판장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재판 다음날 발행된 1946년 3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 ‘박흥식 공판’에 따르면, 일제 당국의 계속되는 권유를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했노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박흥식과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하기 싫었지만 억지로 했다는 것이 친일파들의 일반적인 변명이다.
일본의 고급 밀정
하지만 친일파 박병일의 삶은 그런 변명이 구차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친일을 했고, 친일 때문에 손해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박병일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6권과 일본 경찰 기록에는 박용환이란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친일인명사전>과 일본 재판 기록인 <박병일 소송사건철>에는 박병일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가 태어난 것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2년 뒤인 1878년 7월 1일 경기도 광주에서였다. 그는 비교적 일찍 서양문물을 접했다. 14세 때인 1892년에 한양에서 기독교청년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한양 종로에 그의 사업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잡화상과 금융업을 경영했다.
그의 사업 무대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졌다. 사업 실패에 따른 결과였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박병일 소송사건철>에 따르면, 1917년 3월 시베리아로 이주했고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 조선인연합민회 회장으로 일했다. 39세 나이에 이국땅에서 새 삶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새로운 삶에 동반된 것이 있다. 친일매국행위가 그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펼쳐진 그의 사업은 일본을 돕는 일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일본군에게 식량과 군수품을 운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고 설명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1918년 3월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일본·미국·영국·프랑스가 러시아를 상대로 이른바 간섭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을 박병일이 돕게 됐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군수품 제공뿐 아니라 첩보 활동에서도 두드러졌다. “192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촌락에서 주민이 독립군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는 등의 정보를 주둔 일본군에 전하는 등 첩보 활동을 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이런 인물이 1921년에 조선인연합민회 부회장이 되고 그 뒤 회장까지 됐다. 이 지역을 무대로 한 항일투쟁이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차질을 빚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현지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항일조직인 한인사회당이 그를 습격한 배경 역시 이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박병일과 일본의 커넥션은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과의 연계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츠루키치와도 커넥션이 있었다. 그는 이 관계를 지속하면서 현지 정보를 총독부에 제공했다. 이 정도면 고급 밀정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총독부 경찰 총수기 저 멀리 시베리아의 박병일과 직접 소통한 배경은 박환 수원대 교수의 논문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에 언급된 한 대목에도 나타난다. 2017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에 수록된 이 논문에 이런 설명이 나온다.
“국내에서 전개된 3·1운동은 러시아 지역의 3·1운동 발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양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아울러 3·1운동 전개 이후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은 국내와 밀접한 연락 관계를 맺으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러시아 및 해외 지역의 항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처음 이주할 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이주한 뒤로 박병일은 일본과 긴밀히 연계된 행적을 밟아나갔다.
일본군 떠나자 피신
이런 존재 양식으로 인해 그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떠날 때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 말 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이 철병하자 이듬해 1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사할린 진강으로 피신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박병일은 서울 종로에서 사업에 실패해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도 실패해 사할린으로 옮겨갔다. 순수한 상업 경영으로 정면승부하지 않고 매국행위로 돌파구를 뚫으려다 시베리아에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정상적인 사업으로 곳간을 채우려 하려 하지 않고 친일 행위로 손쉽게 돈을 벌려 한 자의 모습이다.
사할린에 간 뒤로도 일본과 협력해 농지개척 사업을 벌이던 그는 1930년대에는 도쿄로 무대를 옮겼다. 사할린 활동 역시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도쿄에 거주한 이후의 박병일은 일반적인 친일파에게서 보기 힘든 이례적인 행보를 걷게 된다.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벌이게 됐다. <박병일 소송사건철>이라는 문서철이 작성된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상대로 소송
시베리아 항일운동이 조선 본토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자 총독부가 시베리아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벌인 사업이 있다. 조선인 구제사업 명목으로 식량 등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현지 한국인들이 항일세력에 기울지 않도록 하고자 그런 프로젝트를 벌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연합민회 회장이었던 박병일도 그 사업에 당연히 참여했다. 그런데 이 사업 과정에서 그의 개인 자금도 들어갔다. 박병일 사건철에 따르면 약 2만 엔의 금전 지출이 발생했다. 이 같은 지출을 보상해달라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박병일이 소송을 할 당시, 도쿄에서 객지 학생이 1개월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은 등록금을 제외하고 대략 40엔이었다. 1934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 6면 우상단에 따르면, 하숙비·점심값·책값·교통비·오락비·잡비 등으로 대략 그 정도가 들어갔다. 박병일의 친일행위로 발생한 금전 지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만한 돈을 들여 친일을 했다는 것은 그의 부역이 자발적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사업상 이익을 위해 그만한 돈을 투자했으리라는 합리적 해석을 갖게 한다. 친일이 이익을 준다는 계산이 행위에 저변에 깔려 있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에게서 나온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공허한 변명에 불과함을 박병일의 소송이 보여준다.
일본을 위해 2만엔 정도의 돈을 썼다면, 일본과의 협력으로 인해 박병일이 얻게 된 사업상 이익도 당연히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의 사업이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의 소송으로 인해 총독부가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송은 볼썽사납게 끝나지는 않았다. 재판부의 화해 권유로 결국 양측이 합의에 도달했다. 박병일이 지출했다는 금액 중에서 4500원을 총독부가 보전해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총독부는 1936년 6월까지 이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애초에 요구한 금액을 다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친일로 인한 금전 지출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전 받았다. 그런 점에서 꽤 이례적인 친일파였다고 할 수 있다. 친일활동을 하면서 금전출납 장부까지 세심히 기록하는 ‘계산적인 친일파’였던 셈이다. 그 뒤 박병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출생 연도만 나타나고 사망 연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종성 기자
<2022-08-21>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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