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7) 안중근 평화연구원
박정희가 만든 안 의사 기념 ‘숭모회’
초대이사장·2대 이사장 모두 친일파
안 의사는 남북 모두에 존경받아
남북 평화와 공존의 매개체 될수도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오 5,9)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마태오 27,46)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히브 12,4)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유교적 전통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사신 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셨고 민족자강을 위해 물산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학교와 기업을 설립하여 자신의 주장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한중일 삼국 중심의 ‘동양평화론’도 주창하셨습니다. 아쉽게도 미완성 원고로 남아 있지만, 무력의 사용과 전쟁을 불가피한 수단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의 취조 문서와 재판 기록이 이를 증명합니다.
안중근 정신을 우리 시대에 맞춰 실천하는 것이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오래전,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분들도 의사의 행적을 따르고자 했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안 의사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안 의사와 함께했던 우덕순 선생은 해방 후 환국하셔서 1946년에 의열사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우덕순 선생이 사망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습니다.
현재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일이라고 하면 대부분 ‘안중근 의사 숭모회’와 숭모회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덕순 선생이 창립한 안중근기념사업회를 없애고 1963년 5월 숭모회를 만든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태생부터 음흉한 의도로 점철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운동 투옥을 전과라며 거부
군사반란에 성공한 박정희는 사회, 문화, 교육과 종교까지도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순신 장군의 영웅화입니다.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박정희가 눈독을 들인 인물이 안중근 의사입니다. 그는 이순신과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 참군인의 표상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과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병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박정희가 총탄에 죽음을 맞은 197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그날 남산의 안중근 의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가지 못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안중근 의사 숭모회의 초대 이사장은 골수 친일파로 알려진 윤치영, 2대 이사장은 친일 문학가 이은상입니다. 독립운동가의 숭모 사업을 친일파가 주도한 셈입니다. 이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모독이자 우리 겨레를 향한 역겨운 도발입니다.
친일파들이 자신의 악업을 정당화하는 데 순국선열을 이용하는 모습에서 분노와 슬픔을 느낍니다. 역대 숭모회 이사장과 그 주변 세력들은 군사 독재정권에 아부하며 안중근 정신을 훼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기고 필요에 따라 이용했습니다. 안 의사의 의로운 정신은 간데없고 형식적인 기념과 행사뿐입니다.
이에 우리는 그동안 사장되었던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를 1995년에 새롭게 발족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삶과 사상, 행업을 제대로 기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에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단체(법인)는 하나만 허용된다는 원칙이 있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주제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9년에 저희는 약 5명의 인사를 숭모회 이사로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숭모회 측은 후보자들이 전과자라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투옥 경력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기념사업회는 3월 26일 안 의사의 순국일과 10월 26일 의거일에 추모 기도회를 여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2004년에 기념사업회와 짝을 이룰 안중근 평화연구원을 설립하고 역사학자인 고려대 조광 교수를 원장으로 위촉했습니다. 평화연구원의 가장 큰 사명이자 업적이라면 안중근 의사 전집 발간입니다. 총 40권을 목표로 현재 27권까지 발간했습니다. 안중근 연구의 대가인 신운용 박사가 편찬위원장을 맡고 있고, 가톨릭 사제들과 신자들의 후원 그리고 서울시 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09년 남북 함께 안중근 기념
안중근 의사는 남과 북이 공경하는 유일한 애국지사입니다. 분단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공동의 위인이자 남북 공존과 평화를 위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북쪽의 조선종교인협의회는 2009년엔 개성과 평양에서 모임을 갖고 중국 하얼빈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0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뤼순에서 북한 대표단과 미사 등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2012년 안 의사의 고향인 해주 청계동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저희의 오랜 꿈은 안중근 의사의 묘소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나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동안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치곤 했습니다.
당시 일본쪽은 안 의사 동생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처형 후 3일 동안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묘소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서울대 법의학자에 따르면 사후 100년이 지났기에 DNA 검사로도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우리 가슴 속에 모시듯, 안중근 의사를 8천만 겨레의 가슴 속에 모시자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1985년부터 20년간 성심여대(현재 가톨릭대학교와 병합)에서 ‘종교와 사회적 책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종교를 우리의 삶, 겨레의 역사와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3월 신학기의 첫 과제로 안 의사와 관련된 자료를 읽고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의아해하던 학생들의 변화가 흥미로웠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그저 위인전에 나오는 죽은 애국자나 독립운동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요, 신앙인이며 민족의 귀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는 늘 초심을 지키면서도 신선한 발상으로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행업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행사를 청소년들이 주도하도록 하는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청년들의 가슴에 안중근 정신이 살아나고, 이를 등대 삼아 겨레의 평화와 행복한 공존을 향해 나아간다면 그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얘기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파주출판단지를 탄생시킨 이기웅 이사장입니다. 그는 출판단지를 만들 때 너무 힘들어서 안 의사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꿈결인 양 안 의사가 나타나 “그 일을 꼭 해야 되겠느냐? 그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잠시 머뭇거리다 “네!”라고 대답했고 그 후 힘을 내서 일을 완수했다고 합니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이라는 안 의사의 유묵 정신에 따라 안 의사의 흉상을 만들고 파주 출판단지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김훈 소설 ‘하얼빈’에 등장한 안중근
최근 김훈 작가가 소설 <하얼빈>을 펴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일원으로 기쁘고 고마운 마음에 책을 펼치자마자 단숨에 읽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간단한 독후감을 쓰려고 합니다. 우선 기자 출신인 작가가 기자 정신으로 정확성을 기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특히 하얼빈에 초점을 맞추어 안 의사의 삶을 제시한 것은 훌륭한 발상입니다. 안 의사의 마음을 ‘총 한 자루와 100루블’로 상징한 그 의미도 남다릅니다.
다만 상세하게 묘사된 전반부의 시대적 배경보다는 안 의사의 내면적 결단과 고뇌에 초점이 맞춰졌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또한 일본이란 침략자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침탈당하게 된 우리 내부의 사정을 좀 더 상세히 다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바깥의 도둑보다 집안 도둑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저는 당시 고종과 그 주변 인물들을 무겁게 비판합니다. 왕으로서 역사와 공동체 앞에서 무책임했던 그 행업이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에 그대로 이식되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김훈 작가는 저자 후기에서 두 청년, 안중근과 우덕순의 삶을 ‘포수, 무직, 날품팔이’라는 주제어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검사 앞에서 두 청년이 당당하게 밝힌 자신의 직업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이 주제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기 잡은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하셨습니다. 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꾸면, 우리는 짐승 잡는 포수가 아니라 사람을 잡는 포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무직이었고 예수님도 무직이셨습니다. 모든 종교인은 이를 닮아 무직이어야 합니다. 다만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날품팔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할 것이다.’(마태오 6,34)라는 복음 말씀을 떠올리며 묵상합니다.
김훈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마음에 품었던 안중근 의사를 50여 년이 지나 소설로 그려냈습니다. 대단한 집념입니다. 저는 이 작품이 작가의 고백록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사정이 허락해 두 번째 고백록을 낼 수 있다면, 짧지만 강렬했던 안중근의 생애를 내적 삶, 신앙적 고뇌의 관점에서 써 주셨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이 있습니다. 청년 안중근이 오늘 이 자리에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했을지 그 가치관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김훈 작가는 뮈텔 주교님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하려고 애썼습니다. 제 해석이지만, 빌렘 신부님은 안 의사를 여순 감옥에서 사흘간 만나고 크게 감명받았을 것입니다. 안 의사 순국 다음 해인 1911년 9월 황해도에 큰 수해가 덮쳤을 때 빌렘 신부님은 프랑스 교우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1912년 3월 19일 편지에서 청년 안중근의 삶을 상세히 증언하셨습니다. 빌렘 신부님은 독일계 프랑스인입니다. 고향인 알자스 로렌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으로, 오늘은 프랑스령이었다가 며칠 후엔 독일령이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으로 안 의사를 더 깊이 마음에 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저는 뮈텔 주교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가톨릭의 구원관과 교회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육신과 세상, 마귀를 삼구(三仇)라 하면서 신앙적 관점에서 늘 끊어버릴 대상으로 봤습니다. 벨기에 출신 지정환(Didier t’Serstevens: 1931~2019) 신부님은 뮈텔 주교의 난해한 불어 일기빌를 판독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뮈텔 주교님은 프랑스인도 한국인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만 사람의 영혼만을 사랑하셨습니다.
역사와 다른 내용의 소설 아쉬워
저는 지정환 신부님이 밝힌 뮈텔 주교의 구원관이 그의 행업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Florete flores martyrum)’가 그분의 주교 표어입니다. 순교자들을 드높인 것은 분명 사실이고 훌륭한 일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닌 사람의 영혼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김훈 작가는 뮈텔 주교님을 매개로 황사영 순교자와 안중근 의사를 연계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입니다. 소설은 논문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바른 신관, 바른 인간관, 바른 역사관에 기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뮈텔은 황사영 백서의 순교 증언만 곶감처럼 빼먹고, 황사영도 안중근도 버렸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헤아리기 어렵다’라는 대목은 작가의 아름다운 신앙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을 하기까지의 전제와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뮈텔은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를 이용했을 뿐입니다. 당시 조선에 주재한 프랑스 외교관들조차 뮈텔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황사영은 장엄한 순교자이지만 역적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양 군함의 개입과 청나라가 관여하는 조선의 간접 통치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숙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실은 참으로 비겁한 짓을 합니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청나라의 개입이었는데, 청나라 얘기는 쏙 뺀 채 서양 함대 요청 건만 크게 부각하여 황사영을 역적으로 내몬 것입니다. 최근 학자들이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기대가 됩니다.
안중근은 죽는 순간까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고백했습니다. 안 의사는 단 한 번도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당대 선교사들의 기계적 교회관과 제도교회를 넘어서서 민족과 나라를 가슴에 품었습니다. 안 의사는 주교와 사제를 능가한 평신도 신학자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당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해도 성당을 찾아가 기도를 바쳤습니다. 아들 분도에게는 사제가 되라고 유언했고, 자신을 배척한 뮈텔 주교에게도 정중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한국 교회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기도 바친 의로운 순교자입니다.
황사영과 안중근은 둘이 아니라 한 실체의 양면입니다. 황사영은 외세를 빌려서라도 불의한 왕권을 타파하고자 했고, 안중근은 최후의 방법인 무력으로 불의한 침략자를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황사영 순교자의 재현이며 승계자입니다. 두 분 모두 나라와 백성, 교회와 국가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소설 <하얼빈>을 읽고 나서 이틀 동안 묵상한 내용을 적어봤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신념과 신앙을 담은 김훈 작가의 속편을 기대합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확인해야 할 부분은 전문가와 함께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님의 영육 간의 건강을 기원하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되새기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들을 기립니다. 오늘은 특히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하얼빈의 의사들을 기리며 저희 모두 깨어 있는 시대의 일꾼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저희 모두 우리 시대의 새로운 청년 안중근이 되게 해 주소서.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함세웅 신부 _ 1968년 천주교 신부가 된 뒤 줄곧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1974년)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2012년 현역 은퇴 뒤에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의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현대사와 관련해 쓴 글과 붓글씨를 싣는다.
<2022-08-22>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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