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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까지… 어느 친일파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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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영철

▲ 1929년 10월 16일 자 <조선일보> 광고란에 실린 친일파 박영철의 자서전 ⓒ 조선일보

일본이 굳이 권하지 않았는데 친일파가 된 사람도 있다. 그중에서도 정도가 특히 심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이 좋아, 부모님 몰래 바다를 건너기까지 했던 박영철(1879~1939)이 바로 그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10월 16일 발행된 <조선일보> 광고란에 2원 50전짜리 책 한 권이 광고돼 있다. “50년의 회고”와 “다산 박영철씨 저”라는 문구와 함께 소개된 친일파의 자서전이다.

이 책을 토대로 그의 행적을 정리한 <친일파 99인> 제2권 박영철 편은 그가 전북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미곡상이었으며 사회적 지위는 평민 수준이었다고 설명한다. 태어난 날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3년 뒤인 1879년 2월 2일이다.

이 집안이 일어난 계기는 강화도조약에 따른 대일 시장개방이다. 1993년에 박찬승 목포대 교수가 집필한 <친일파 99인> 박영철 편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미곡상은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에 따른 호경기에 힘입어 계속 번창하여 한말에 이르러서는 상당한 토지를 사모아 지주 계급으로 일어설 수 있었으며 1920년대에 가서는 만석꾼으로 불릴 정도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농업경제시대의 ‘지주’는 지금으로 치면 ‘사장’과 ‘건물주’를 합한 개념이다. 대일 미곡 수출이 박영철 집안의 경제적 지위를 획기적으로 변모시켜 놓았던 것이다.

2011년 12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행한 <문화재>에 미술사학자 김상엽의 논문 ‘<고 박영철씨 기증 서화류 전관(展觀) 목록>을 통해 본 다산 박영철(1879~1939)의 수장 활동’이 게재돼 있다.

이 논문은 “박영철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화담 서경덕의 문인인 사암 박순의 후손으로 본래는 양반이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그의 부친 박기순(1857~1935) 대에 이르러서는 중인 또는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랬던 집안이 대일 시장개방으로 급격히 일어나게 됐다.

가족 몰래 일본으로 유학

이런 집안 배경에 더해, 그가 일본에 호의적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더 있다. 10대 중반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던 그가 20세 때인 1899년에 일본어를 배우게 된 일이다. 일본인들이 전주에 세운 삼남학당에서 일본과 그의 인연이 본격화됐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해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한 뒤에 그가 일어를 공부하게 됐던 것이다.

삼남학당 수업은 그가 일본에 확 빨려 들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부모 몰래 일본으로 떠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친일파 99인>은 “여기서 만난 일본인들의 권유를 받고 1900년에 가족 몰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말한다. 일본이 좋아서 몰래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1903년 11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장교가 된 그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면서 25세 때부터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됐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까지 이기는 모습을 본 뒤에 친일파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러일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나기 전에 일본군에 가담한 박영철은 상당히 일찍 친일파가 된 사람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가족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 했지만, 일본에서 기반을 잡기보다는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는 쪽을 선택했다. 러일전쟁 참전 직후에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대한제국 군대에 정착하게 됐다.

<친일인명사전>은 “1904년 3월 대한제국 육군 기병 참위(대위)로 임관했다”고 한 뒤, 강압에 의한 군대 해산 뒤인 1907년 10월에는 한국 황제의 시종무관(황제를 경호하던 무관)이 됐다고 설명한다.

다른 군인들은 군대 해산을 거부하며 의병이 되거나 자진 순국을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군대해산 조칙 발표 3개월 뒤에 시종무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을사늑약 이전인 1904년 12월 일본의 훈장을 받은 그였다. 그랬으니 그에게는 군대 해산이 슬플 리 없었다.

박영철은 국권 침탈 2년 뒤인 1912년에는 군인에서 행정 관료로 전업했다. 일본 헌병대 사령관에게 부탁해 그해 9월 전북 익산군수로 취임하게 됐다. 그 뒤 1924년에는 강원도지사가 되고 1926년에는 함경도지사로 부임했다.

‘친일파 명예의 전당’ 중추원 참의에 임명

▲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소개된 박영철의 친일 행적.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그의 전업은 1929년에도 있었다. 식민지 하에서 한국인이 갈 수 있는 최상위 관직까지 승진한 그는 이번에는 산업계로 이직했다. 식민지 수탈 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가 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삼남은행 두취(은행장)가 되고, 그 뒤 각종 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미곡창고주식회사·조선철도주식회사·조선신탁주식회사·조선맥주주식회사 등의 취체역(이사)으로도 활동했다.

직업은 바뀌었지만, 친일파라는 인생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1933년 6월에는 ‘친일파 명예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다. 매년 1800원의 수당이 나오는 이 직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는 박영철이 받은 금전적 혜택으로, 1910년부터 2년간 일본군 소좌(소령)으로 근무하면서 받은 750~850원의 연봉, 1908년에 러일전쟁 종군기념장과 함께 받은 은사금 500원, 익산군수 때부터 함북지사 때까지 받은 1000~6000원의 연봉, 중추원 참의 시절 받은 연수당 1800원을 열거했다. 그런 뒤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재산으로 시가 3211만 원 상당의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곡리 부동산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혜택이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았다.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1904년 3월부터 대한제국 장교로 근무했고, 동일한 배경에 힘입어 1929년부터 재계 활동을 했으므로 1910년 이전과 1929년 이후의 수입도 친일재산 범주에 넣는 게 이치에 맞다.

위에서 소개한 ‘<고 박영철씨 기증 서화류 전관 목록>을 통해 본 다산 박영철(1879~1939)의 수장 활동’이라는 논문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일제강점기의 주요 미술품 수장가였다. 이 논문은 “사후에 수장품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여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한다. 그가 수집한 미술품을 상대로도 친일행위와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게 타당하다.

박영철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국방헌금 1만 원을 헌납했다. 도지사 연봉인 6000원을 훨씬 넘는 거액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8년 8월에는 경성부를 방문해 ‘국가적으로 귀중한 금을 개인이 소장할 수 없다’며 금컵 2개, 금줄 1개, 금비녀 1개, 금단추 1벌 등을 기부했다. 이런 예시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일본에 아낌없이 바쳤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받은 것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세상 떠나자 훈장 하사한 일본

일본의 혜택을 많이 받은 인물이라는 점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협박성 글을 발표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때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이 독립해봤자 “구(舊)한국 악정의 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2년 전에 볼셰비키 혁명을 겪은 “러시아의 현상과 같은 비참한 지경에 빠질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에 불만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탄원하라면서, 만세 시위로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하면 각처에 주둔한 일본군이 “용서 없이 병력을 쓰기로” 돼 있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도쿄에서 집필한 ‘내선융화책 사견’이라는 글에서는 ‘조선인은 무능하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으므로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일본도 이런 조선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라며 한·일 두 민족의 융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꾸짖고 일본의 분발을 촉구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일본 사랑을 드러냈다.

일본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으며 일본과 융합해야 한국은 잘될 수 있다는 박영철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 극우세력에게서도 나온다. 수요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과 소녀상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박영철과 한국 극우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혜택을 본 한국인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인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식민지배는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재벌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한국의 대중은 처음부터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수의 한국인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은 이들의 협력 없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었던 일본 지배자들의 사정에 기인한다. 박영철과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며 한국 대중을 답답해하지만 실상은 이들이 답답한 사람들이다. 소수의 한국인에게 혜택을 주면서 다수의 한국 대중을 착취한 일본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받은 게 떡고물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 채 박영철은 1939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일, 일본은 그에게 욱일중수장을 비롯한 훈장과 상품을 하사했다.

김종성 기자

<2022-08-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국인들에게 이런 말까지… 어느 친일파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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