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

728

[검찰실록③] 부친 민병기와 ‘친일인명사전’ 오른 민복기, 그리고 박승준·이태희·정창운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검찰공화국’이 만들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검찰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역사의 질곡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과거의 기록, 그리고 ‘서초동’에는 어떤 역사가 담겨 있을까. 그 이야기들로 오늘의 검찰을 들여다본다.[편집자말]

▲ 5대 총장 민복기(사진 상단 좌측), 7대 총장 박승준(상단 우측), 8대 총장 이태희(하단 좌측), 10대 총장 정창운(하단 우측) ⓒ 검찰청 홈페이지 게시 사진 재편집

민복기, 박승준, 이태희, 정창운.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 초반까지 각각 대한민국 5대, 7대, 8대, 10대 검찰총장을 지낸 이들의 명단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불편한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4인 모두 ‘일제강점기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에 참여한 이력’을 이유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민복기(1913~2007) :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돼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각종 재판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된 이초생 재판에, 같은 달 28일에는 비밀결사 상록회를 조직한 남궁태·이찬우·문세현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고,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친 뒤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박승준(1896~1967) : 1928년 11월 쇼와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을 선고받은 박제영의 재판과 공갑룡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조병철, 유용희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1936년 4월 훈6등서보장을 받았다. 해방 후인 46년 9월 진주지청 검사장에 임명됐다. 48년 11월 대구지검 검사장에, 49년 11월 대검 차장검사에, 52년 4월 광주고검 검사장에, 57년 10월 서울고검 검사장을 거쳐 58년 3월부터 60년 5월까지 대검 검찰총장을 지냈다.

이태희(1911~1999) : 1941년 1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됐으며, 41년 8월부터 12월까지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를 겸했다. 43년 해주지법 검사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해당 기간 중 ‘예방구금위원회’의 위원도 맡았다. 해당 위원회는 일제에 반하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마련한 조직이다.

해방 후인 45년 11월부터 법무국 특별검찰청 검사에 임명됐다. 정부수립 후인 48년 11월 대검 검사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법무부 검찰국장과 서울지검 검사장도 맡았다. 50년 6월부터 51년 8월까지 부산지검 검사장을 맡으며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군검경 합동조사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이화여대 법정대학 교수를 지낸 뒤 1960년 4.19혁명으로 출범한 허정 내각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5.16쿠데타 후 공직에서 밀려나 변호사로 활동했다.

정창운(1906~1968) : 1940년 1월 평양지법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된 뒤 평양지법 검사대리를 겸했다. 41년 10월 경성지법 검사국 예비검사를 거쳐 42년 3월 경성지법 검사에 임명됐다. 43년 3월 광주지법 장흥지청 검사로 옮겨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45녀 11월부터 광주지법 순천지원 검사, 정부수립 후인 48년 11월부터 대검 검사, 52년 4월 대검 차장검사, 55년 10월 대구고검 검사장, 58년 3월 서울고검 검사장을 역임하다 60년 5월 퇴직했다. 퇴직 후 동국대에서 교수를 지내다 63년 2월 검찰에 복귀해 대검 검찰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검찰청 홈페이지 ‘역대총장’ 소개란에는 재임기간, 주요업적 등의 내용만 강조됐을 뿐 역대 총장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대를 이은 친일행위, 5대 총장 민복기를 주목하는 이유

▲ 박정희 정권 당시 최장수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 ⓒ 자료사진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4명의 검찰총장 중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은 5대 총장을 역임한 민복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해방 후 눈을 감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권력의 최중심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 독재정부와 박정희 군사정부, 전두환 신군부를 거칠수록 더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해방 직후 미군정에 의해 경성지방재판소 부장판사에 임명됐다. 이듬해인 1946년 7월에는 미군정청 사법부 법률기초국장 겸 법률심의국장이 됐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에는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승만 정권이 탄생한 뒤에는 사법부 핵심 요직인 법무부 검찰국장(이사관) 겸 대검찰청 검사에 임명됐고, 1951년 12월부터는 법무부 차관이 돼 활동했다. 이듬해인 1952년 5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55년 9월 마침내 검찰의 가장 높은 자리인 검찰총장에 마흔둘 나이로 임명돼 56년 7월까지 재직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탄생한 후에는 말 그대로 막힘이 없이 승승장구했다.

이승만 정권 후반부 잠시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했지만 1961년 9월 대법관으로 임명돼 1963년 4월까지 활동하다 바로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뒤 1966년 9월까지 역임했다. 이후 1968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10년 2개월 동안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으로 활동했다.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엔 ‘국가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국토통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 헌정제도연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민병석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민병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인물로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의 사돈으로 알려졌다. 그 역시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엔 조선귀족회 회장으로도 활동하며 일제로부터 각종 훈장을 받았다. 당시 10만 원에 달하는 은사금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참고로 1920~30년대 경성에서 수준 높은 기와집 한 채 가격은 1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민병석은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다. 1858년생인 민병석은 쉰다섯 늦은 나이에 둘째 아들 민복기를 봤다.

▲ 민복기 부친이자 국가공인 친일파로 이름 올린 민병석. ⓒ 자료사진

민복기, ‘대한민국 사법사상 최악의 날’ 만든 주인공

일생동안 승승장구한 민복기도 죽는 그 순간까지 따라다닌 꼬리표가 있었다. 훗날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불리게 된, 그가 대법원장 재임 시절인 1975년 4월 8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공판에서 일어난 사법살인 때문이다.

재판장이었던 민복기는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피고인은 물론 변호인조차 출석하지 않은 가운데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등 39명에 대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어내려 간 뒤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을 끝으로 재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도예종·서도원·송상진·김용원·하재원·우홍선·이수병·여정남 등 8명은 민복기가 발표한 판결문에 의거해 사형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고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시신을 화장시켜 버렸다.

인혁당 사건은 사건 발생 30년 만인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에 의해 재조사가 이뤄져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 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으로 밝혀졌다. 2009년 9월 사법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이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등을 확정하는 판결문을 읽고 있는 모습. ⓒ 자료사진

앞서 민복기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뿌리가 되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도 역사에 길이 남을 욕된 행동을 한다.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위기 돌파책으로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이들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런데 당시 ‘인혁당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부(부장 이용훈)는 20여 일 간의 수사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라고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이때 나선 것이 당시 검찰총장 출신 법무장관이었던 민복기다. 그는 ‘상명하복의 검찰 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김형욱 부장 밑에서 차장을 지내고 검찰총장으로 부임한 신직수가 당직검사를 바꿔가며 1차 인혁당 사건의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던 이용훈 등 검사들은 옷을 벗었다.

이후는 앞서 살핀 바와 같다. 검찰총장 출신 법무부장관 민복기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됐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최고 권력의 지근 거리에서 영화를 누리다 2007년 7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두환씨로부터 국민훈장 1등급인 무궁화장을 받는다. 민복기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18번)에 안장됐다.

1910년 8월 29일은 우리나라가 국가적 치욕(경술국치)을 당한 날이다. 민복기의 아버지는 한일합병조약 강제 체결에 앞장서 그로 인해 부를 쌓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그의 아들 또한 정의를 외면하고 평생 승승장구했다. 박승준, 이태희, 정창운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해방 후 검찰총장 자리에 있었다는 것, 대한민국 검찰의 수치스러운 역사임에 분명하다.

김종훈 기자

<2022-08-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