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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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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대신 빵을 먹고 나라를 지켜라
–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첫번 째, 세번 째 :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양우회 조선본부·경성제빵조합에서 제작한 대용식 빵 배급 홍보물 / 두번 째 : 이 빵을 먹고 체위를 향상하여 동아시아를 굳게 지켜라 / 네번 째 : 영양을 향상시켜 총후銃後에 힘쓰라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혹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 오히려 빵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가정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밥’이라고 하면 주로 쌀과 국, 그리고 밑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을 연상한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밥이 보약’이라는 말에서 보듯 쌀은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약으로 여겨 제때 밥을 챙겨 먹는 생활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단지에 넣어 신神으로 모시기도 했고, 심지어 흩뿌려 점卜을 보기도 하는 등 쌀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식량이었다. 쌀이 이토록 중요한 식량이었지만, 봉건시대에는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은데다가 지배 계급의 수탈로 인하여 일반 백성들이 날마다 먹기는 힘든 양곡이었다.

매일신보(1942년 10월)에 연재된 <代用食閒談대용식이야기>. 메뚜기를 시작으로 개구리, 번데기, 아기벌蜂子, 잠자리, 도토리, 칡뿌리, 버섯종류上·下 등 각종 대용식이 수차례에 걸쳐 기사로 작성되었다. 양곡 공출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별의별 대용식이 장려된 것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많은 땅을 차지하였고, 그 땅을 일본인 지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했다.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전락한 조선은 수확량에 비해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만주, 북중국 등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조선의 식량수탈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식민지조선의 백성에게 ‘쌀밥’은 그야말로 먹기 힘든 ‘귀한 식량’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증산과 함께 공출에 심혈을 기울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곡뿐만 아니라 주요 식료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못해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자 일본 정부는 전시통제경제로 전환하여 각종 임시응급조치들을 실시하기 위해 각종 법을 제정하였는데 특히 국가가 식량을 관리하는 체제로 만들었다.

이에 발맞추어 조선총독부도 1943년 8월 9일 <조선식량관리령>을 공포해 조선에서도 국가가 식량을 관리하였다. 이 법령에 의하면 주로 쌀, 맥류, 조를 비롯하여 잡곡, 전분, 곡분, 고구마, 감자 및 그 가공품, 면류, 빵 등 주요 식량 전부가 통제대상이었다. 또한 생필품 배급제를 실시해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에게 극한의 궁핍한 생활을 강요했다.

또한 친일파들을 앞세워 채권을 사도록 강요하여 가난한 민중의 주머니까지 쥐어짰다. 성신여학교장 이숙종李淑鍾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여성의 전쟁협력을 강조하면서 대용식 장려와 함께 ‘절식節食을 힘써서 당국에 협력하는 것이 전시하 주부의 명심해야 될 일’(<조광>, 1943년 1월호)이라고 주부들을 독려했다. 조선인들은 남은 보리종자 헌납하기, 부인회에서 한집에 보리쌀 1되씩 모아 바치기, 매월 1전씩 모아 바치기 등 헌금과 헌납도 강요받았다.

그러나 총독부는 식량 부족과 춘궁春窮이 전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만성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배급을 통해 균등한 식량 분배가 이루어져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식량소비가 이루어졌다고 선전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알고 있다. 홍보물로 접하는 빵조각도 먹지 못하는 식민지 조선 민중의 궁핍한 삶은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전쟁의 결과라는 사실을. 세계인을 고통스럽게 만든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민중들의 희생과 동원을 강요했던 사실을 말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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