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우 책임연구원
많은 사람들에게 좀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상황에서도 ‘조선어장려시험(朝鮮語獎勵試驗)’이란 것이 한창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관리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조선어 능력시험이 치러졌고 그 성적에 따라 장려수당(獎勵手當)까지 줬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일의 연원을 찾아보니까 무엇보다도 1921년 3월 9일에 제정된 칙령 제34호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관서 직원의 조선어장려수당에 관한 건(件)」이 눈에 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내지인’ 판임관(判任官) 이하의 직원으로서 조선어(朝鮮語)가 통하는 자에게는 조선총독(朝鮮總督)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분간 월액(月額) 50원(圓) 이내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21년 5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28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조선어장려규정」이 정식으로 제정되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에 속한 ‘내지인’ 판임관, 판임관대우, 고원에 대해 조선어장려시험에 합격하거나 또는 시험위원의 전형(銓衡)을 거쳐 학력(學力)을 인정받은 경우 그 종별등급(種別等級)에 따라 정해준 조선어장려수당(갑종은 4년간, 을종은 2년간)을 지급받도록” 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갑종시험은 “조선어의 통역(通譯)에 차질이 없는 정도”의 수준을 나타내며, 을종시험은 “보통의 조선어를 이해할 정도”의 여부를 측정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조선어능력을 습득할 것을 일본인 관리들에게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특별수당까지 지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매일신보> 1912년 5월 11일자에 수록된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방법(方法)」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었던 것이 눈에 띈다.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政務總監)은 각도청에 통첩(通牒)을 발하였는데 각 보통학교의 내지인 교원(內地人 敎員)으로써 조선어(朝鮮語)를 해(解)함은 민심감화(民心感化)에 완능(完能)이 유(有)할지오, 조선인 교원(朝鮮人敎員)도 내지어(內地語, 일본어)를 장려(獎勵)하여 기(其) 숙련(熟鍊)한 자(者)는 특(特)히 우대(優待)의 도(道)를여(與)한다 하였으니 일선인(日鮮人)의 교원(敎員)된 자는 필(必) 어학(語學)에 주의(注意)하려니와 기타 교외(校外)의 재(在)한 인사(人士)도 차(此) 의지(意旨)를 통량(洞諒)하여 내지인은 조선어를 투습(套習)하고 조선인은 내지어를 투습하여 동화(同化)의 속도(速度)됨을 희망하노라.
이와 아울러 1918년에 일본인 교원을 대상으로 한 조선어시험규칙의 제정과 관련하여 세키야 테이자부로 학무국장(關屋貞三郞 學務局長)이 “직접 조선인과 접촉하는 일본인 관리(官吏) 또는 교원(敎員)이 조선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행정(行政)과 교육(敎育)에 있어서 도저히 철저한 성적(成績)을 얻기 어렵다”고 언급한 대목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말인즉슨 이러한 조선어장려시험은 일본어 능통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어디까지나 원활한 식민통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의 하나로 도입된 제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시체제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나름으로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이러한 조선어장려정책은 급전직하의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중추원(中樞院), 도회(道會), 부회(府會), 읍회(邑會), 면협의회(面協議會) 등의 각종 공회(公會)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는 한편, 관공리(官公吏)에 대해 관청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일체 조선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와 함께 내선융화(內鮮融和)의 근본기조에 따라 일본어의 보급이 급선무였으므로 일본인 관리에 대한 조선어장려수당을 폐지하고 오히려 이른바 국어(國語, 일본어)에 능숙한 조선인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는 쪽이 더 합당하다는 주장이 크게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로 1937년 6월 21일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39호 「대정 10년 칙령 제34호에 의한 수당지급에 관한 건(件)」이 새롭게 제정되면서 기존의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조선어장려규정」은 폐지되었다.
이때 <매일신보> 1937년 6월 22일자에 수록된 「조선어장려규정이 개정되어 21일부터 실시」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규정 개정의 취지와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미나미 총독(南總督)의 제창(提唱)인 국어(國語)의 장려방침(獎勵方針)은 전선관계(全鮮官界)에 보급철저(普低徹底)하여 가까운 장래(將來)에는 하인(何人)이든지 국어를 해(解)할 수 있는 정도(程度)에까지 진(進)하고 있는 현상(現狀)에 감(鑑)하여 총독부에서는 금회(今回) 조선어장려규정의 전면적 개정(全面的 改正)을 단행하여 21일 총독부 훈령으로써 공포 즉일(公布 卽日) 실시되었다. 즉, 종래의 조선어장려규정에 의하면 제1종(수당 20원), 제2종(수당 10원), 제3종(수당 3원)의 3종(種)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부 폐(廢)하고 새로이 갑종(甲種, 수당10원), 을종(乙種, 수당 5원)의 2종(種)에 분(分)하여 종래의 제1종 우(又)는 제2종의 합격증(合格證)은 차(此)를 갑종합격증으로 하고, 제3종 합격증은 차(此)를 을종합격증과 동등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어서 신규정(新規定)에 의한 조선어시험은 좌(左)의 표준(標準)으로써 시행하는 것이다. (하략)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비단 관계(官界)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학교 쪽이라고 해서 전혀 예외는 아니었다. 이 당시 학교에서는 이미 수업시간에 일본어의 상용화가 철저하게 강요되고 있었고, 여기에 더하여 운동시간은 물론이고 각 가정에서도 일본어 사용을 크게 독려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37년 5월 20일에 오노 로쿠이치로 정무총감(大野綠一郞 政務總監)이 내린 통첩(通牒)「학교에 있어서 국어교육(國語敎育)의 쇄신철저(刷新徹底)에 관한 건(件)」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학교에 있어서 국어교육의 철저에 관해서는 누차 통첩 및 지시한 바이기는 하지만, 국민정신진작강화(國民精神振作强化)의 요구가 더욱 긴절(緊切)함이 있는 이때, 특히 국어교육의 중대함에 비춰 좌기(左記)의 여러 점(點)에 유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유감(遺憾)이 없기를 기(期)할 지이다.
기(記)
일(一), 학교 내에서 직원(職員), 생도(生徒), 아동(兒童)의 국어사용이 수업시간 중에 있어서는 이미 이것의 철저(徹底)를 보고 있지만, 운동시간(運動時間) 중에 있어서도 아직 그 철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인 바이므로 학교 내에 있어서는 되도록 국어사용의 여행(勵行)을 기할 것.
이(二), 국어과(國語科)의 화방(話方, 회화), 철방(綴方, 작문) 지도법에는 특히 연구개선을 더하여 일층 발표능력(發表能力)의 증진을 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시킴에 덧붙여 이에 대해 적당한 지도를 행하고, 동시에 도군(道郡) 교육회(敎育會) 등에 연구회, 발표 등의 개최를 장려하여 교수능력(敎授能力)의 증진을 기할 것.
삼(三), 국어교육을 단지 국어과만의 임무로 하지 말고 각 교과목의 교수를 통해 이것의 철저를 기하며, 특히 회화와 작문 등 발표능력의 지도에 노력할 것.
사(四), 보통학교(普通學校)에서 학예회(學藝會) 등을 개최하여 회화의 연습을 철저케 함과 동시에 국어가정화(國語家庭化)의 기연(機緣, 기회)이 되게 하며, 더욱이 부형모자(父兄母姉)에 대한 국어의 강습 등을 장려할 것.
오(五), 사립학교교원(私立學校敎員)의 채용인가(採用認可)에 당(當)해서는 ‘사립학교규칙(私立學校規則)’ 제11조 단서(但書)의 규정에 불구(不拘)하고 일반교원과 동양(同樣)의 국어통달(國語通達)이라는 점을 일층 중시함과 아울러 기채용(旣採用)의 교원에 대해서도 특히 이를 독려하는 등 적당한 조치를 강구할 것.
육(六), 보통학교교원(普通學校敎員)의 국어력 증진에 대하여 강습회, 기타 적당한 시설을 할 것.
이와는 별도로 지명(地名)이나 인명(人名) 등의 고유명사(固有名詞)에 대해 조선어식 한자음으로 읽는 것은 일체 삼가하고 이를 이른바 ‘국어한문(國語漢文, 일본어식 발음)’으로 통용케 하라는 방침이 시달되기도 했다. 1937년 8월 30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31호 「고등보통학교규정(개정)」에 따라 기존의 ‘조선어급한문(朝鮮語及漢文)’이라는 과목에서 ‘한문’은 폐지되고 단지 ‘조선어’만 남게 된 것이 이러한 조치의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에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특히 여러 사립학교(私立學校)에서 사용하는 우리말가사의 교가(校歌)도 역시 전부 일본어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37년 10월 13일자에 수록된 「사립교(私立校)의 교가 경정(校歌 更正), 종래(從來)의 조선어(朝鮮語)를 전부(全部) 국어(國語)로, 위선(爲先) 경기도(京畿道)부터 실시(實施)」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총독부에서는 전조선 각 사립학교의 교가(校歌)를 조사하여 보았던 바 그 가사(歌詞)가 대부분이 조선문으로 되었고 또 불온한 점도 없지 않다 하여 금후 국어를 더욱 장려하는 의미에서 우선 경기도 관하의 수개 중등학교의 교가를 전부 국어로 고쳐 부르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 조선에도 이 방침에 따르도록 하리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때마침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의 개정이 시도되자 이것과 맞물려 종전에 사용하던 교가(校歌), 교기(校旗), 응원가(應援歌), 모표(帽標) 등 전반에 걸쳐 이를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의 정체성에 맞게 대대적으로 일본식으로 변경하는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표의 도안에 한글, 영문 이니셜, 무궁화, 태극, 십자가 등의 문양이 들어간 경우에는 예외 없이 이를 변경하도록 강요되었다.
<동아일보> 1938년 5월 6일자에 수록된 「종래(從來)의 교기 교가(校旗 校歌) 일신(一新)을 각도(各道)에 통첩(通牒)」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4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하여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되고 고등보통학교가 중학교로 명칭을 전부 개정하였는데 이 명칭과 적합하지 않는 재래의 교기, 교가, 응원가, 모표, 이밖에 학교의 제반 시설을 통하여 완전히 전 것을 버리고 명실이 함께 새로운 기분을 나타내도록 하는데 그 개정에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로마문자, 외국어 등으로써 표시하는 것을 피하고 ‘황국일본’의 기분을 나타내도록 하라고 학무국에서 4일부로 각도지사에 통첩하였다
그리고 앞서 사립학교 교가의 조선어 가사를 일체 일본어로 교체토록 지시한 데에 이어 관공립소학교(官公立小學校)의 교가도 전면적인 심사대상으로 삼아 이를 인가제로 전환하기로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9년 4월 19일자에 수록된 「황국신민 정신고조(皇國臣民 精神高調), 교가(校歌)에도 인가제(認可制), 본부(本府)서 위원회(委員會) 열고 81교가 심사(校歌 審査)」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교풍을 자랑하며 학원생활을 구가(謳歌)하는 전조선 관공립소학교에 교가(校歌)는 종래로 각 학교에서 마음대로 가사와 곡조를 만들어 그 중에는 소학생의 어린이로서는 정도에 너무 높은 것도 있고 또는 가사 내용이 빈약하여 정조교육상에 상서롭지 못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지 아니하므로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교육령 개정에 주지를 철저히 시키기위하여 교가에 인가제(認可制)를 설정하고 검정(檢定)을 받지 아니한 교가는 단연 폐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가심사위원회를 설정하고 지난 6일 제1회 위원회를 총독부 편집과(編輯課)에서 연 다음 여섯 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전조선 3천여 교로부터 모인 대표학교 81교의 교가를 심사하기로 되어 17일 제1회 심사를 마치었다. 그 심사의 결과 27교는 훌륭하나 나머지 54교는 작곡과 가사가 적당치 아니한 것으로 인정되어 단연 고쳐지을 것을 명하게 되었다. 특히 새 교가를 제정하는 경우에는 황국신민의 정신을 고조하는 용장한 작곡을 강조하는데 한하여 심사 후에 인가할 방침으로 장래는 중등교의 교가도 다시 검토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인 관리들에게 조선어장려시험이랍시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것도 결국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을 뿐 진정으로 그들이 조선어를 받아드릴 심산은 전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이마저도 전시체제기가 지속되고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다수의 일본어 능통자들이 속출하자 오랜 속내를 드러내어 그들의 편의대로 조선어는 금지하고 이른바 ‘국어상용(國語常用)’의 기치를 드높이는 쪽으로 돌변하였는데, 이러한 행태야말로 식민통치자들이 지닌 어찌할 수 없는 본성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