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나의 8·15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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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지사와 환호하는 시민들

3천만이 한결같이 느낀 8·15의 감격은 또한 3천만이 제각기 별다르게 느낀 감격이기도 하다. 수만 리 이역에서 열혈의 전선에서 이날을 맞이한 이도 있으며 지옥의 철창 속에서 징용 일터에서 그 순간을 맞이한 이도 있고 온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 듯한 기쁨과 용기와 정열로 맞이한 혁명기도 있는가 하면 눈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은 민족 반역자도 있다. 이제 세월은 흘러 만 1주년! 무지개 같은 희망도 아침이슬같이 사라져 차디찬 현실에 몸서리치는 사람, 천길만길의 몰락을 각오했었으나 두고 보니 그렇지 않다고 웃음 짓는 친일 반역배. 8·15 돌맞이의 기분도 역시 각인각색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선민족 전체가 가장 양심적이었던 순간이 곧 1년 전 그날이 아니었던가? 성스럽기까지도 하던 8·15 그날의 회고를 오늘에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 <자유신문> 편집자

드디어 옥문은 열리고 혁명동지들과 근로인 위한 새 설계
나의 8 ·15 회고(1) 전평(全評) 허성택(許成澤) 씨

나는 청주에 있는 사상범예방구금소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일제 항복의 방송은 듣지도 못했다. 간수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중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했다. 왜적이 항복하되 9월이나 10월경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빨리 항복하리라고는 뜻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8월 17일 새벽 형무소 문앞에 몰려온 청주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철창문을 나서던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을 몸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은 역시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의복과 음식을 제공해주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동포애에 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울며 웃으며 그러나 한 시각이 급하여 그날 밤으로 청주에서 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리는 차창을 내다보면서 나의 좁은 가슴속은 감격으로 벅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앞날의 계획이 무지개 같이 스쳐갔다. 서울역에는 건준(建準)을 비롯한 각 단체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동무들이 맞아주었다. 그때의 그 광경은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그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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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견지동 중앙상과여학교에는 전국의 출옥 동지가 모여 임시로 합숙하게 되었다. 각지의 감옥에서 뛰어나온 용감한 반(反)일제투사들!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빛났다. 육체가 쇠약한 것은 모두들 잊어버렸다.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들이 이 위대한 역사적인 해방을 진실로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심 과제로 되었다. 그래서 우선 출옥자들만을 중심으로 하여 통합전선준비회를 조직하였다.

왜적들이 물러가면서 파괴한 물자를 어떻게 구하며 실업자와 직장노동자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가 제일 급한 중대한 문제였다.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자주경제를 수립해야 하며 자주경제를 위해서는 현재의 생산기관을 부흥시켜야 한다. 이 생산을 부흥시킬 사람은 근로대중 뿐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다. 이러한 보통 노동자를 목적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로 노동자상담소를 만들었다. 8.15 전부터 지하에서 노동운동하던 사람들과 투쟁 가운데서 결합하여 비로소 전평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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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설은 조선인민의 손으로서 자주적인 건설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과 자주적인 건설의 역량이 있고라야 국제적인 정당한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자체의 역량이 발전되는 척도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은 달성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주주의적 발전에 있어서는 봉건적 요소를 청소하는 것이 중요한 조건이다. 인민에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생활 각 부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 특히 여성의 평등권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근로인민대중의 권리보장과 생활양상,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자유의 모든 단체적 활동의 자유보장, 이것이 참말로 민주주의 기본과업인 것이다. 해방기념의 돌맞이를 맞는 오늘날, 아직도 민주주의의 완전한 달성에는 전도요원한 느낌을 금치 못한다. 우선 무엇보다 일제시대의 악독한 노동법을 철폐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노동법을 실시하여 노동자의 생활과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이며 산업을 파괴하는 모리배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직장에서 축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루속히 산업부흥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6.8.11.

이역(異域)에서 기쁨의 눈물, 조국에서 돌아와 맞은 한심한 1주년
나의 8 ·15 회고(2) 재미한족 도진호(都鎭浩) 씨

나는 그때 하와이에 있었다. 왜적이 무조건 항복하리라는 예보(豫報)를 듣고 정식 발표를 듣고자 단파 라디오 앞에서 밤을 새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중 새벽 3시반쯤 되어서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 방송국으로부터 확보(確報)를 들었다. 너무나 감격에 북받쳐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로 동지를 모으고 자동차를 몰아 A씨를 찾고 K군을 실어 UKC의 사무소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국민보(國民報)>라는 신문을 내려고 K군과 나는 원고를 쓰고 다른 동지들은 사방으로 연락하여 인쇄소를 얻고 종이를 사들이고 야단법석이었다. 부랴부랴 <국민보> 특별호를 만들어내어 보내니 날이 훤히 밝아왔다. 해방 자유 평화를 얻은 축복의 여명이었다.

우리들은 자동차에 태극기를 달고 거리로 나왔다. 각 신문사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너도나도 다투어 호외를 사는 백차 밀치듯 하는 사람 틈에 끼어 나도 신문 한 뭉텅이를 들었다. 일반시민과 영문(營門)으로부터 나오는 군인 청년들의 환호성은 하늘을 뒤덮을 것 같고 트럭 승용차 등의 꽁무니에는 양철 깡통 무어라 할 것 없이 소리 나는 것을 전부 달아 덜컹거리며 거리를 쏘다녔다. 육해 군인, 적십자사 간호부를 비롯하여 남녀 시민들은 뛰며 노래하고 얼싸안고 키스하고 웃고 우는 등 실로 흥분의 절정에 다다른 이날 광경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혼잡한 가운데서도 조선 의복을 입은 우리 동포 부녀들을 군데군데 만날 수 있었다. 우리들은 함께 기쁨을 나누며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곳보다 더 흥분과 환희 그리고 엄숙한 시민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이슬로 사라진 선열들에게 경건한 추도의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8월 18일 우리들은 공식으로 승전 축하 행렬식을 흰 저고리에 흰치마를 입은 마흔두 명의 우리 동포 부녀들이 선두로 행렬을 지어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때 길거리 양편에 모여든 그곳 군중들은 소리를 합쳐 ‘조선의 해방! 자유! 독립!’을 불러주며 은전과 지폐를 행렬을 향하여 기울여 던져주었다. 조선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축복하는 국제적 관심이 이처럼 컸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앞을 가렸다. 그때 동지들의 모임이 즉 재미한족연합회였다. 우리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국에 돌아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조금이나마 건국에 이바지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갖은 애를 쓴 끝에 몽매간(夢寐間)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해방된 지 1년인 오늘날까지도 38선으로 나라는 양단되었고 미소공동위원회는 언제 열릴 지도 모르고 민중들의 생활은 점점 도탄에 빠져있는데 소위 지도자들은 민중은 어찌 되었든 간에 정치 유희만을 향락하고 있음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그들은 오로지 엄정한 자기비판을 양심에 가하기 바란다. 나는 지도자층에 이러한 제언을 하고 싶다.
1. 특수계급이나 개인의 전략을 위하여 시대의 역행되는 반동공작을 하지 말 것
2. 국민경제를 파탄시키는 모리배들을 숙청할 것
3. 국제정세를 악용하여 국민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언사를 삼갈 것
4. 하루바삐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노력하고 완전독립을 완성시킬 것
이러한 것을 8.15를 기하여 3천만 대중 앞에서 굳게 명세해야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6.8.12.

통곡으로 맞은 그날 밤, 일제와 싸우던 기개를 환기하자
나의 8 ·15 회고(3) 부녀총동맹 박진홍(朴鎭洪) 씨

나는 고국에서 근 만리 떨어진 항일투쟁의 아성 연안(延安)서의 감격의 날을 맞이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와 채찍 밑에서도 일루(一縷)의 희망만은 잃지 않고 영어(囹圄)와 지하의 동지와 연락해오다가 국제정세로 보아 일본의 패배는 단지 시간문제임을 결정적으로 확신하게 되자 3천만 인민이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는 최후로 무력투쟁이 남았음을 깨닫고 유격전에 있어 탁월한 전술을 가진 연안 팔로군을 찾아 1년간 게릴라 전술을 습득하고 다시 귀국하여 실천할 결심을 가지고 1944년 11월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일제경찰의 눈을 피하여가며 그 이듬해 4월 5일 대망하던 연안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연안에는 시가지로부터 약 10리 떨어진 곳에 조선인 마을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우리의 선배동지 약 300명(그중 여자 50명)이 독립동맹을 중추기관으로 하고 모든 생산을 자급자족하여 가며 끊임없는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도 그 일원으로 가입을 인정받아 별천지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매일 찾아들어오는 것은 연합군의 전승의 축보였다. 국내 동포들이 아직도 왜놈의 허위보도에 속고 있을 생각을 하면 초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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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국제정보가 빠른 연안에는 8월 9일 예상외로 빨리 우방인 소련군의 조선 진주설이 들려왔다. 이것이 정말일까? 벌써인가? 모두가 의아했었으며 기쁨보다도 그 진위를 알기에 애썼다. 8월 13일이다. 그날도 역시 다른 날과 다름없이 우리가 사는 동굴 쪽에선 희미한 칸데라(등불의 일종)를 가운데 놓고 몇몇 동지들이 밤 12시까지 중국과 비교해가며 조선문제를 토론하다가 어슴푸레 막 잠이 들려고 했을 때였다. 군정학교 학생이 동굴 밖에서 ‘일본군 무조건 항복’이라 외치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일어났다. 처음에는 잠결에 꿈속에서 들은 줄 알았으나 외치는 소리는 역연히 동굴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앞뒤를 가릴 여가없이 빤쓰 바람으로 걸었던 칸데라를 쥐고 동굴 밖에 좇아 나가보니 뛰어나오는 사람마다 누구나 거지반 반나체였다. 우리는 그렇게 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밤새워 춤과 노래를 부르고 장기항전용으로 저장하였던 모든 음식을 진탕 먹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추어보지 못하던 춤, 불러보지 않던 노래, 비록 가사와 곡조가 맞지 않을망정 마음만은 일심이었다. 저쪽을 보니 허정숙(許貞淑. 許憲 씨의 따님) 동무도 춤을 추고 있다. 이날에 한하여 연안의 밤이 왜그리 짧은지 어느덧 동천(東天)이 밝아왔다. 아 동쪽 7천리 저쪽에는 고국이 있다! 암흑에서 벗어난 3천만 인민이 우리의 돌아옴을 고대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저쪽에서 돌연 통곡소리가 들려온다. 달려가 보니 고국 철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다 온 늙은 동무다. 환호소리는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위로하던 동지와 울던 동지가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고 말았다. 이윽고 8월 15일! 정식으로 왜왕이 항복방송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소련군이 함흥에 상륙하여 남하중이고 신의주를 통과한 소련군이 부산을 향하여 진주중이란 보도를 신문지상을 통하여 알았다. 이날 우리들은 비로소 중국의 여러 혁명 동지와 일본의 망명 동지들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조선에 38선 장벽이 생기고 미군이 남선(南鮮)에 진주한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였으며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뒤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았으나 아마 양군이 경성에서 감격의 악수를 하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날로부터 팔로군의 대부대는 장사의 행렬을 개시하였다. 우리들은 여러 동지의 원조로 9월 4일 행군하는 부대에 끼어 그립던 고국으로 행진을 개시하여 7천리를 걸어서 고국의 땅을 밟았다.

나는 지금 가끔 연안을 방문하는 미국인들이 우리들을 대하여 너는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 조선엔 미국과 소련 어느 나라 군대의 진주를 원하느냐 하는 류의 질문을 다시 생각한다. 조선에 진주한 미소 양국이야말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세계민주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2대 국가임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토지문제, 노동법, 남녀문제 등 가장 시급한 제문제가 착착 해결되고 있는 한편이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도 8·15 전과 하등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한편이 있음은 어이한 일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들이 횡행하고 더구나 이들이 정당을 만들고 미군정에 아첨을 일삼고 진보적인 모든 시책을 방해하며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구축(驅逐)하려고 한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던 싸움을 또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년 동안 달성치 못한 우리의 살림을 의논하고 우리의 정부를 세우는데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나도 또한 그 각오로 새출발할 결심이다. <자유신문> 1946.8.13.

당당히 보인 자치능력, 우리는 자주독립의 인민임을 체험
나의 8 ·15 회고(4) 시인 김기림(金起林) 씨

초아흐레날 새벽에 시작한 북조선 일본군 기지에 대한 소련군의 공격 개시는 실로 전광석화와 같았다. 당시 나진 항구에는 그 부두에 쌓아둔 식량을 실어가기 위해서 일본 호송선단 약 백여 척이 꼬리를 물고 들어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새벽 쉴 새 없는 폭음은 함경북도 해안지대 일대에 들려서 내가 있던 경성(鏡城)에서는 이웃에서 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열흘날은 종일토록 바로 고개 하나 격한 청진 항구에 대하여 한 편대의 폭격기가 날아와서는 부두의 중유 탱크를 비롯하여 거진 간단없이 폭탄을 퍼붓는 것을 보았다. 그날 밤에는 청진 나남 상공에는 여러 번 조명탄이 떨어졌고 또한 뒤를 이어 폭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소련군이 청진 항구 상륙을 시작한 것은 열사흘날 정오였다. 약한 시간에 걸친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이야말로 내가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갖은 소중한 실감이다. 그야말로 천지를 뒤흔드는 포성과 햇빛을 가리는 몽롱한 연기―이 속에서 줄지어 달려가는 피난민의 무리. 단시간에 열차의 대부분은 어느 새 모두 피난열차로 변했다. 이러한 속에서도 우리 동포들은 얼마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저마다 전쟁이라는 것이 무서운 파괴력과 무자비성을 느꼈으며 그 모든 것 중에는 우리들 개개인 재산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근거와 그 제국주의가 분쇄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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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침착하며 분별이 있다는 것을 이때에 경험하고 우리의 장래에 대한 큰 위안을 가졌다. 이 전쟁에서 너나없이 느낀 것은 구구한 자신의 재산이나 운명에 대한 생각이 아니고 실로 서로서로 공통으로 느낀 어떤 민족적인 커다란 기회에 대한 기대였다. 보름날 정오 일왕의 항복방송을 바로 성진 임명이라고 하는 작은 거리에서 들었다. 패주하는 일본군은 함흥 부대를 풀어 성진 일대에 진지를 준비하고 일대 결전을 각오하는 듯 하였다. 경찰과 다른 행정기관은 어느 새 철거했다. 15일 후에도 함경북도 해안지대 일대에서는 아직도 일본군의 부분적 반항이 있어서 여전히 불안에 쌓여있었다. 우리 거리에서는 이러한 가운데 열이레날 일본경찰과 행정기관이 철거한 뒤의 비상상태와 패잔 일본군의 행패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치위원회를 만들었다. 이와 전후해서 이웃 군(郡)과 면(面)에는 각각 서로 약속이나 한것처럼 비상상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자치적인 위원회가 생겼다. 이것이 이른바 인민위원회의 자연발생적 경로였다.

혼란과 무정부상태의 위기에 직면해서 우리 자신이 보인 비상한 자치력과 질서정신에 대하여 나는 이때 큰 자신을 가졌다. 민주주의는 결코 설교만에 의하여 배워질 수 없는 것이고 인민의 정치적 실천을 거쳐 성장하는 것임을 나는 경험을 통하여 체득하였다. 조선민족은 언제든지 제 일을 제 손으로 처리해 낼 민주주의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위원회 발족 직후 곧 우리 손에는 출옥한 투사들이 속속 돌아와서 모두가 밤잠을 자지 않고 유쾌하게 일했다. 특히 감옥에서 돌아온 채 쇠약한 몸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하던 허성진(許聖鎭), 許□□ 씨를 비롯한 여러 동지의 활동에는 지금도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자유신문> 1946.8.14.

건준(建準)서 좌우합작 노력, 그때 나의 실패가 계속됨은 유감
나의 8 ·15 회고(5) 문교부 유억겸(兪億兼) 씨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 독립하리라는 것은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이 발생할 때부터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연희전문학교에서 봉직중이었는데 당시 교장 언더우드 박사와 점심을 같이 하며 이야기한 것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즉 내가 “일본은 패망할 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말하니, 언더우드 박사는 이에 동감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결국 일본은 기진맥진, 마침내 손을 들고야 말았다.

일본 항복의 방송은 교무 협의를 위하여 시내에 들어왔다가 종로 화신(和信)백화점에서 들었다. 전쟁중에 샌프란시스코로부터의 우리 말 단파방송을 작금(昨今) 들어 일본의 운명이 가까워오고 또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자주독립의 공약이 성립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나 막상 그날의 항복 방송을 들으니 뭐라고 말 못할 감정이 북받쳐 올라 뜨거운 눈물이 흐름을 금치 못하였다. 화신에서 십수 명이 함께 들었는데 모두들 나와 같은 흥분과 감격에 젖어 한참동안 말없이 서있었다. ‘조국을 위해 한뜻 한마음으로 일해보자’는 것이 이 순간의 한결같은 결의였다.

그리고 나는 36년 동안 우리 민족의 숙망(宿望)인 자주독립은 반개 년 이내에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적 관측을 하였었다. 물론 주의와 사상의 차이로 다소 마찰은 있을지언정 민족적 양심은 서로의 고집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우리 정부도 세우고 우리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나갈 것으로 보았다. 또 연합국의 어느 한 나라만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우리 조선에 잠깐 동안 진주해 올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국토 양단과 좌우 양익(兩翼)의 분열은 조금도 상상을 못하였다.

해방 직후에 발족한 건준에서 좌우 요인들 사이에 싸움이 적지 않았음은 세상이 다 잘 알 터이지만 나는 그때 좌우합작을 위해 9월 4일까지 동분서주한 일이 있다. 싸움을 화해시키고 감정을 풀어 손을 맞잡고 건국에 매진하도록 하고자 우익 요인도 만나고 좌익 거두도 만나 나의 힘자라는 데까지 애를 써보았으나 끝끝내 별 결과를 못 보고 9월 4일 이후 합작교섭을 단념하고 말았는데 그때에 굳어진 좌우 분열을 해방 1년 동안에 합쳐보지를 못하고 끝끝내 조선은 지금과 같은 혼란의 구렁에 빠지고 말았다.

이 상태는 개인이나 단체가 자가횡□의 언동을 감행하고 확호한 자율적 신념이 없이 행동하는 데 기인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나는 실망은 안 한다. 좌우분열과 38도선으로 조선 국토가 양단된데 좀 불쾌를 느끼지만 민족적 양심의 발로와 진정한 민주주의 승리로 필경은 통일되어 다른 나라의 모방이 아니라 우리의 독특한 이상적인 국가가 탄생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자유신문> 1946.8.15.

활발하던 건준 탄생 전야, 환멸에서 희망의 세계로 나서자
나의 8 ·15 회고(6) 민전(民戰) 이강국(李康國) 씨

왜군의 무조건 항복은 8월 12일경에는 결정적이었다. 그래서 총독부로부터 여운형(呂運亨)씨에게 항복 후 치안을 확보하는 데 대한 책임을 져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그때 교섭내용은 치안유지회를 구성하되 그 당시 총독부 조선인 고관과 민간인 유지를 망라하도록 해달라는 뻔뻔한 것이었다. 여 선생은 단연코 이를 거절하고 순연한 조선 애국 혁명가들로 구성할 것을 주장하고 드디어 15일에는 주지의 5개조(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등)을 원등(遠藤) 정무총감에게 제시하였던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선 원등이 5개조를 수락하자 선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내의 치안유지와 행정권 접수의 일체의 준비에 착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준비의 과정은 평온한 것이 아니었다. 16일부터 불온한 기색을 보이던 재경 일본 패잔병의 시위행동은 점점 험악해져서 발도(拔刀)한 왜헌병의 떼가 미친개 모양으로 서울거리를 휘돌고 당시 우리 위원회가 있었던 종로청년회관 앞 큰 거리에는 왜병의 탱크 대열이 무섭게 돌격하여 삼엄하였다. 인천에 상륙하리라는 미군의 소식은 아득한데 패잔 왜병(헌병대)들의 마지막 발악은 더욱 심해져서 급기야 우리 위원회에 대하여 ‘건국’ 두 자가 불온하니 ‘치안’으로 고치라고 협박해온 일까지도 있었다.

기다리던 미군 진주는 9월 8일에야 실현되었다. 그리고 군정이 실시된바 오늘에 이르러 어언 해방 1년이 지났다. 오늘에 당해서 1년을 회고할 때 누구나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환멸이랄까. 그리고 극도의 기아에 떨어진 대중은 도탄에 빠져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있다는 것이 실정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같이 40년간의 일본제국주의의 유독(遺毒)을 숙청하고 독재를 음모하는 파쇼를 분쇄하고서 새로운 민주주의 나라를 세우는 건국 동지로서 과거와 현재와 장래를 투시하여 이것을 옳게 인식하고 옳은 길로 싸워야 될 것이다. 사실 해방 직후 그때와 같은 감격은 없다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해방 직후에 느낀 그 감격은 어떤 것이었나. 해방은 되었지만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전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가로놓여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1년 동안에 북조선에서는 생생한 민주국가의 기초가 서고 지금은 씩씩한 건설, 발전의 길이 열리고 있다. 남조선에서는 허다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꿋꿋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실은 우리에게 장래에 대한 광명과 희망의 전망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현실은 진실한 애국적 혁명투사 앞에 열렸던 감옥문은 다시 닫히고 친일파 파쇼 분자의 대두는 뚜렷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1년 전 8·15는 해방에 대한 감격의 날이었다면 1년 후 오늘은 민주독립의 결의의 날이라고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6.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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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족연합회 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고 함. 영문으로 United Korean Committee(UKC). 재미한족연합회(이하 ‘연합회’로 약칭)는 미주한인사회의 분산된 독립운동을 한군데로 집중하기 위해 9개의 주요 단체들이 연합해 결성한 독립운동기관이다. 연합회는 <해외한족대회결의안>이 선포된 1941년 4월 29일 결성되었으나 이것은 형식상의 선언이었고 실제 결성은 의사부와 집행부가 각각의 조직을 갖추면서였다. 연합회의 조직은 해외한족대회에서 그 대강이 결의됨에 따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의사부와 북미 로스엔젤레스의 집행부로 구성한 2원체제의 위원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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