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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에 충성하면 이렇게 된다’… 어느 친일파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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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홍사익

한국인들은 일본군에 끌려가 총알받이 역할을 했다. 강제징병 피해자들은 그런 억울한 운명에 노출돼야 했다. 그러나 모든 한국인 군인들이 다 이랬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나 백선엽처럼 일본군 장교가 되어 침략전쟁에 앞장선 부역자들도 있었다.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洪思翊)도 그런 친일파 중 하나다.

친일파 홍사익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은 ‘한국인이 일본군 중장까지?’라는 반응을 보이기 쉽다. 그런 반응은 홍사익이 근무하는 일본군 부대에서도 흔했다. 홍사익 중장이 필리핀 파견 제14방면군 병참총감이었을 때 제14방면군 포병 장교였던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1921~1991)의 책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1970년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1986년에 펴낸 <홍사익 중장의 처형> 상권에서 “이상하게도 나는 필리핀 전선에 있을 때 홍사익 중장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상하게도’라고 했다. 20대 초반의 초급 장교가 사단장이나 군사령관의 이름을 알 수는 있지만 군사령관도 아닌 병참총감의 이름까지 아는 것은 드물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썼노라고 저자는 말한다.

▲ 책 <홍사익 중장의 처형> ⓒ 페이퍼로드

그는 자기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필리핀 주둔 일본군 사이에서 많았다고 회고한다. ‘이상하게도’ 병참총감 이름까지 아는 사람들이 초급 장교는 물론이고 일반 병사들 사이에도 있었다고 한다. “‘허어, 조선인 중장이 있다고? 허어’하는 수용 태도가 적어도 일반 하급 장교와 병사의 거짓 없는 수용 자세였다”라며 “따라서 한번 들은 자는 그 이름을 외고 만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개의 경우 병사들은 사단장·군단장은커녕 대대장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필리핀 주둔 일본군에서는 군사령관도 아닌 군사령부 병참총감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한국인이 그 위치까지 승진하는 게 그만큼 드물었기에 그런 반응들이 나왔던 것이다.

경이적인 기록

홍사익은 김옥균의 갑신정변 3년 뒤인 1887년 2월 2일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에서 출생했다. 2009년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9권에 따르면, 그의 본적은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 122번지다.

21세 때인 1908년에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에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에 편입했다. 그런 다음 일제강점 2년 뒤인 1912년에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4년에 졸업했다. 박정희보다 30년 먼저 졸업했으니 이만저만한 대선배가 아니었던 셈이다.

홍사익은 그 뒤 대체로 행정이나 대민 사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에 괴뢰국 만주국 군대의 고문이 되어 만주국군을 개편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1934년 이후에는 만주 거주 조선인에 대한 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상하이에 주둔한 1938년 이후에는 현지의 한국인 정책 수립에 관여했다. 한국인과 만주인을 상대로 한 군사행정 분야에서 많이 활동했던 것이다.

야전 지휘관 생활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항일군과의 전투를 지휘한 일도 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 일대에서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라며 “제18전총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프랑스 식민지인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황제까지 된 나폴레옹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식민지 출신이 제국주의 군대에서 주목을 받으려면 전공을 세우는 편이 아무래도 가장 빠르다. 그런데 홍사익은 야전 지휘관보다는 군사 행정가로 더 많이 활동했다. 그래서 전공을 세울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도 일본군 중장까지 승진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1919년 3·1운동과 관련이 있다. 그가 육군 중위일 때 폭발한 3·1운동은 일본 군부가 그의 효용성에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그가 육군성 인사국에 배치됨과 동시에 그의 존재가 언론을 통해 홍보된 것은 고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해 6월 13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조선인이라고 결무차(決無差), 군대에서 공평한 조선인 대우’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인이라고 해서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 기사는 도쿄에서 육군성 인사국 요원으로 활동하는 홍사익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인터뷰에서 홍사익은 자신이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연대급 부대에도 배치되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일본 식민통치가 공평무사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국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는 동포들을 겨냥해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가령 내가 인도인으로 영국 내지에서 군인이 되었다 하면 연대 같은 데도 부치지 아니하였을 것인데, 일본에서는 조선인 장교라고 결단코 칭하를 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육군 당국의 참뜻이라.

그러면서 그는 “일반 조선인은 결코 육군 당국의 참뜻을 오해하지 말 것이라”라는 당부를 남겼다. 만세운동 직후에 한국인 장교를 요직에 배치해놓고 홍보하는 일본 육군의 진의를 오해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 인사 조치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는 발언이다. 홍사익 자신도 그런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홍보 모델의 말로

‘일본에 충성하면 이렇게 된다’는 모델로 활용된 홍사익은 한국인과 만주인을 상대하는 부서에 근무하면서 장군 계급까지 승진했다. 그런데 제2차 대전 막판에 일본은 그를 다른 용도로 활용했다. 연합군과 일본군의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는 필리핀에 그를 파견한 것이다. 그의 존재를 연합군에 정면으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일본은 제14방면군 병참총감에 임명하기 이전 10개월 동안 그에게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임무를 맡겼다.

여기서 발생한 비인도적 포로 대우는 그가 연합군의 주목을 받고 B급 전범으로 기소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6년 4월 18일 마닐라 국제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5개월 뒤인 9월 26일 사형 집행을 당했다. 식민지인들을 겨냥한 모델로 활용되던 그가 연합군의 처형을 받는 운명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축출됐던 미군이 다시 마닐라로 진입하고 있다. ⓒ wiki commons

홍사익은 ‘일본에 충성하면 이렇게 된다’는 모델로 활용됐지만, 일본에 충성하다가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일본 식민통치는 결국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한국인들은 제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홍사익은 1909년에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에 편입한 이래로 일본 밥을 먹고 살았다. 그때부터 일본 봉급을 받고 일본 연금을 받으며 곳간을 채워 나갔다. 일본이 준 훈장들은 그가 안정적으로 곳간을 채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속에서 그는 비교적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 상권에 따르면, 1901년경에 결혼한 그는 1915년경에 도쿄 주둔 제1연대 근처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그런 뒤 안성에 있는 부인 조숙원(1885~1943)을 그곳으로 불렀다. 일본 생활이 20대 후반부터 안정 궤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1962년 8월 13일 자 <경향신문> 3면 좌상단의 홍사익 특집 기사에 따르면, 1933년에 만주로 부임할 때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그곳에 마련했다. 기사에 의하면, 그는 작은부인도 있었고 그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일본이 주는 월급과 연금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기에 이 같은 두 집 살림과 친일 재산의 형성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친일파 같았으면 그런 재산과 지위를 근거로 해방 뒤에도 계속해서 안정적인 삶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국군 창설에 개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 친일파로서는 매우 드물게 법정 최고형의 처벌을 받았다. 이례적으로 높은 계급과 안정적인 친일재산을 끝까지 누리지 못한 채 59세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홍사익은 강제징병된 한국인 병사들처럼 총알받이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원성을 차단하는 방패 역할을 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를 홍보하는 모델이었다. 그런 역할로 끝났다면 그 역시 일반 친일파나 전범들처럼 여생을 편히 보냈을 수도 있다. 원래의 홍보 모델 역할을 떠나 연합군에 정면 노출된 것이 그의 수명을 재촉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성 기자

<2022-09-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에 충성하면 이렇게 된다’… 어느 친일파의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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