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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재일 역사학자가 밝힌 “조선인 사냥”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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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간토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연구한 고 강덕상 선생

지난 1일 오전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일본 극우의 반대시위를 뚫고 ‘9·1 간토대지진 조선인희생자 추도 실행위원회’ 주최로 99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같은 날 저녁에는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서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 주최로 99주기 추모문화제도 진행되었다. 4일에는 가메이도에서 왕희천을 비롯한 중국인 수난자 추도식이 열려 중국의 유가족이 인터넷으로 참여했고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99년 전인 1923년 9월, 도쿄를 포함한 관동(도쿄, 요꼬하마, 사이타마, 가나가와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거리에서 6천이 넘는 조선인과 팔백여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 과정에서 흥분한 자경단원이 저지른 일이라며 사과와 배상은 물론 진상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조선인 강제연행과 강제징병,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일본의 죄상을 파헤친 강덕상

재일 사학자 강덕상은 평생의 연구를 통해 간토대학살에 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세상에 낱낱이 드러냈다. 1975년 발간된 <관동대진재>(중앙공론사)와 2003년에 펴낸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청구문화사)가 바로 그것이다.

▲ 강덕상 ‘엿장수 구영학’의 삽화를 그린 한지영 화가의 그림 ⓒ 한지영

그의 연구는 두 가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첫째는 진도 7.8의 대지진이어도 자연재해인데 왜 계엄령이 발동되었는가? 두 번째는 조선인의 학살을 부른 유언비어의 출처가 어디이고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였다.

일본 정부는 감추려 했고 일본역사학계도 자신들의 치부여서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지만 강덕상은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의 책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아래 학살의 기억)은 그 물음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정판이었다.

1923년 지진이 일어난 9월 1일 도쿄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는 “나는 천 가지 만 가지로 생각해도 이번 재해가 너무 심해 어떤 불상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 같아 불안에 사로잡혔다”라고 했다. 또한 내무대신 미즈노는 밤에 시찰을 하면서 기아로 인한 울부짖음을 들으니 두려웠다, 궁성 앞에 30만, 야스쿠니신사 등에 수만명의 이재민이 노숙을 하는 상황에 공포감과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도쿄의 치안 책임자인 그들은 천황의 보호와 체제의 안전에 골몰했다. 타개책으로 떠오른 게 계엄령. 미즈노 렌타로는 아케이케 경시총감, 고토 후미오 경보국장의 건의를 받아(이들은 도쿄도의 치안 3인방이다) 긴급내각회의에서 계엄령 결정을 주도한다. 계엄령은 외적과 교전 중이거나 내란 상태여야 발동할 수 있고 추밀원 고문의 자문을 거쳐야 하는데 요건이나 과정은 무시되었다.

명분은 ‘조선인폭동설’이었다. 군대는 1일 밤부터 출동했다. 6만 4천의 육군병력이 집결했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선회하고 바다에는 기함 나가토(長門) 이하 150척의 함대가 모여들었다. 육해공에 걸쳐 삼엄한 경계와 군사작전이 펼쳐친 것이다.

▲ 간토대지진시 발동된 계엄령조문 松尾章一감수『?東大震災政府陸海軍?係史料Ⅰ』에 수록 ⓒ 松尾章一

당시 도쿄 일원에 이주노동자로 와 있던 조선인은 많아야 1만 명을 조금 넘는 정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경제가 호황을 맞자 ‘여행증명서’ 제도가 1922년 들어 ‘자유도항제’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조선인이 일본으로 자유로이 들어왔으니 지진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은 일본 거주기간이 불과 1~2년 안팎이었다.

주로 수도·토목공사의 일용노동자 신세로 합숙소에서 생활했다.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낯선데 일본인의 차별적 시선 때문에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지진을 만나 얼이 빠진 상태였다. 이런 상태의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타고 일본인을 공격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당시 나리시노 기병 15연대 병사였던 에츄우야 리이치는 관동대지진을 이렇게 회상했다.

“가메에이도에 도착해 행동개시로 먼저 ‘열차검색’을 해 조선인을 모두 끌어내렸다. 칼날과 총검 아래 그들은 차례차례 거꾸러졌다. 일본인 피난민 가운데서 ‘원수!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연대는 이것을 ‘피의 잔치의 시작’으로 하여 그날 저녁부터 밤중까지 본격적인 조선인 사냥을 했다.”

이것이 출동한 계엄군이 조선인을 직접 학살한 모습이다. 수많은 예중 하나일 뿐이다.

유언비어의 유포는 일본 관헌을 통해서

강덕상은 학살의 핵심 주체만이 아니라 유언비어의 출처와 배달망이 일본정부임도 밝혀냈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유부녀를 공격한다, 방화를 했다’는 악소문이 관동 일원에 파다했다.

이 소문 때문에 곳곳에서 재향군인회가 중심이 된 자경단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칼과 죽창, 갈고리를 휘두르며 마을 안팎의 조선인을 마구 죽였다. 살아있는 채로 톱집을 하고 철사줄로 묶어 불구덩이에 던지고 트럭으로 깔아버리는 등, 조선인에겐 지옥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 자경단의 모습 자경단.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재향군인姜?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 강덕상

유언비어의 출처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유언비어는 주로 입을 통해 전달되고 현장에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강덕상은 내무성, 육군, 경찰 등의 자료를 샅샅이 파헤쳐 이를 밝혀냈다.

당시 도쿄 시내의 모든 통신기관은 기능이 정지된 상태. 유일하게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기관은 도쿄만에 있던 후나바시의 해군 무선송신소였다.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는 9월 3일 오전 6시 이 송신소를 통해 각 지방장관 앞으로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라는 내용이 담긴 전문을 보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경찰은 일본내 조선인을 적대시하고 경계했다. 유학생이나 눈에 띄는 자를 요시찰로 분류하고 갑호에는 5명, 을호에는 3명이 미행하며 일상생활을 감시했다. 요시찰이 아니어도 인상, 특징, 교우관계, 일본관을 면밀하게 기록했다. 자유도항제 이후 조선인이 많이 건너오자 각 경찰서 특별고등과에 조선인계를 설치해 감시의 칼날을 강화했다. 고토후미오가 보낸 정부 전문은 조선인에 대한 이런 적대 정책의 연장이었다.

더욱이 미즈노와 아케이케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과 경무총감으로 탄압의 주역이었다. 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내각과 군부의 주요 요직은 갑오농민전쟁과 7년 의병투쟁, 간도사건에서 직간접적으로 조선을 탄압하고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했던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도쿄지사인 우사미 가쓰오는 조선총독부의 내무장관을 지냈고 군사참의관인 오바 지로는 간도작전의 주둔군 사령관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적대 사상이 뼛속까지 배어 있던 이들은 자연스레 계엄의 명분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떠올렸거나 제조했고’ 이 유언비어는 전보와 관헌의 입, 대자보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가장 유명한 게 사이타마현 지방과장이 내무성과 협의해 만든 “도쿄에서 지진에 편승해 폭행을 행하는 불령선인 다수가 가와구치 방면으로부터 혹시 우리 현에 들어올지도 모릅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였다. 이 통첩은 사이타마의 모든 촌락에 내려가 구마가야, 혼조, 진보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자경단을 만들게 하고 학살을 불러 일으켰다.

▲ 당시 사이타마현이 이첩한 문서에 대한 신문기사 10월22일『東京日日新聞』, 11월 2일『東京日日新聞』?, ??????각 신문은 사이타마현이 군(郡)을 통해 그 밑의 관할행정구역에 “불령선인폭동”을 이첩했기 때문에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을 더 확대시켰다고 보도했다. ⓒ 기평미디어 제공

이렇게 강덕상의 <학살의 기억>은 계엄령 발동의 배경과 유언비어의 배후를 낱낱이 밝히고 학살의 참상을 드러냈다. 이 저작은 그의 나이 73세에 이르러야 발간되었다. 청년 시절부터 간토 연구에 매진했음을 감안하면 한평생 간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것이다.

강덕상은 어린 시절, ‘천황의 강한 방패’ 황국소년이 되고팠다. 1934년 네 살의 나이로 경남 함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조선인임이 싫었다. 반찬은 김치뿐인데 냄새난다고 일본 아이들이 소리를 질러대 도시락을 싸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거나 소풍에 따라오는 것이 싫었다.

동네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집단 등교를 하던 소학교 시절, 대열을 짓고 학교에 도착해 봉안전에 절을 할 때 그는 대장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날 아버지가 “일본은 엿이나 먹어라”라고 했을 때 화를 내는 아들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강덕상은 스스로 ‘덕상’의 일본어 발음인 ‘도쿠소’를 버리고 ‘신노사토시’로 이름을 바꿨다.

청년 역사학도가 된 강덕상

강덕상의 변화는 일본의 항복과 함께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역사선생의 인도로 1950년 와세다대 역사학부에 진학한 강덕상은 어느 날 20명 정도 모인 중국연구회에서 “지금까지 일본인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난 조선인이야”라고 고백을 한다.

이때 강덕상은 무서웠다고 기억한다. 강덕상이 조선인 선언을 한 것은 1954년 도일해서 재일동포의 인권획득을 위해 참정권운동을 비롯 지문날인거부운동을 펼친 최창화 목사덕분이었다. 그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찾도록 강덕상을 자극했다.

황국신민에서 벗어난 강덕상을 청년 역사학자로 이끌어준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일본의 한국병합>, <일본 통치하의 조선>을 쓴 야마베 켄타로. 그는 중국현대사에 관심을 기울이던 강덕상에게 “조선사람이니 조선사를 공부해라, 조선사는 일본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거울이다”라고 일깨워 주었다.

▲ 1912년 공포된 태형의 모습 태형은 단순한 매질이 아니었다. ⓒ 미상

야마베 켄타로는 일본이 1912년 조선에서 공포한 태형령(笞刑令)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에서 “수형자를 형판에 붙들어 매고 입을 헝겊으로 틀어막고 노출된 둔부를 때리는 태형이 조선인에게만 적용된다. 매우 잔혹한 형벌이자 간단히 시행될 수 있기에 남용되었다”라고 고발했다.

또 한 명은 박경식이었다. 여동생의 담임이면서 조선대학교의 교원을 지낸 박경식은 강덕상에게 ‘우리는 일본에 끌려왔다.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 그것을 조사하는 게 시무(時務:시대의 의무)이기에 조선인 강제연행을 연구하고 있으니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책 표지 강덕상 기록간행위원회가 만들었다. ⓒ 어문학사 제공

이 무렵 강덕상은 국회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되어 있던 공문비고를 발견한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에 있었던 연합국사령부가 압수했다 반환한 이 문서는 해군성의 자료로, 지진 당시 일본내각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다.

일본에서는 1945년 항복선언 전까지 간토에 대해 사실 규명을 하는 건 곧바로 형무소행이었다. 종전이 되면서 많은 증언들이 나왔지만 민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계엄령 발동의 전후 과정이나 정부 전문 등 핵심 기밀을 ‘공문비고’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수년에 걸쳐 재일사학자 금병동과 함께 정리하고 조선인학살에 관한 다른 1급 자료까지 묶어 1963년 10월 <현대사자료6>(관동대지진과 조선인)을 발간했다. 그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세 편의 논문을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잇달아 발표해 일본역사학계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강덕상은 ‘관동대지진’연구로 명성을 쌓았지만 1989년 4월 그의 나이 58세가 돼서야 일본국립대학인 히토쓰바시 대학의 전임교수로 채용된다. 히토쓰바시 대학은 ‘조선사’ 교원이 필요하자 ‘강덕상’을 원했는데 “외국 국적자는 채용하지 않는다”는 문부성방침이 걸림돌이었다.

“일본의’국공립대학에 정주 외국인을 임용하자”라는 시민운동과 한국유학생의 ‘조선사 교원 유치운동’ 덕에 강덕상은 히토쓰바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지금은 재일한국, 조선인 출신의 교원이 많은데 그가 첫 발을 내디디며 차별과 배제를 깨뜨린 덕분이다.

▲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 책의 표지 2005년 역사비평사에서 번역해 펴냈다. ⓒ 역사비평사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

큰 산 강덕상 선생은 안타깝게도 2021년 우리 곁을 떠났다. ‘시무의 역사학자’로서 우리에게 <학살의 기억>과 <여운형 평전>이라는 자산을 남겼다. 그는 관동대지진에 대한 연구로 일본의 죄악을 세상에 고발했다. 그는 혈액암과 방광암에 걸려 투병하면서도 90을 앞둔 나이인 2019년 여운형평전 전 4권을 완성했다. 여운형을 남북이 공유해야 할 독립운동의 자산으로 제시하며 분단의 극복이 진정한 해방임을 말하려 했다.

2023년 9월 1일이면 간토학살 100주년이 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제라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학살에 대한 일본인의 회상과 참회록은 즐비하다. 강덕상이 발굴한 정부문서 ‘공문비고’가 엄연히 존재한다. 강덕상이 <학살의 기억>에서 참고한 문서만 해도 600종이 넘는다. 그는 78세에 <학살 재고: 계엄령이 없었다면>(三一書房, 2008)을 썼고 83세에는 <일국사를 넘어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연구 50년>(『大原社会問題研究所雑誌』 668号, 2014.6)를 썼다.

이 차고 넘치는 증거를 가지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게 ‘관동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한일관계에서 우리 정부가 진정 대등하고 독립적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대한민국 국회도 행동에 나서야 한다. ‘간토학살 사건’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을 서둘러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는 법적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

이것은 무참히 학살된 우리 선조의 간절한 바람이며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아주 작은 진혼곡이다. 시간이 없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한일 시민사회, 민중의 연대로 이뤄내야 한다. 그 길에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은 저 먼 땅에서도 함께 할 것이다.

<못 다한 이야기>

나는 강덕상 선생을 생전에 만나본 적이 없다. 간토대학살 99주기를 맞아 조선인희생자를 기리는 의로운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던 중, 강덕상 선생에게 주목했다. 그를 빼놓고 간토의 진상을 말할 수 없기에 선생의 저작, 선생의 일대기 <시무의 역사학자 강덕상>(어문학사 간)을 참조해 이 글을 썼다. 선생의 제자인 광운대 김광열 교수가 많은 도움을 주셨다.

①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 추진위원회는 2021년에 결성되어 현재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겨레하나, 민족문제연구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시민모임 독립,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 KIN지구촌동포연대, YMCA 등 40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② 후나바시 해군무선송신소의 전보전문은 아래와 같다.
“도쿄 부근의 지진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각지에 방화하고 불령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하며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자가 있다. 이미 도쿄부에서는 경계령이 시행되고 있으므로 각지에서는 충분하고도 면밀한 시찰을 더 하고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한층 더 엄밀히 단속할 것”

③ 사이타마현 지방과장이 각 군에 보낸 전화통지한 문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도쿄에서 지진에 편승해 폭행을 행하는 불령선인 다수가 가와구치 방면으로부터 혹시 우리 현에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또 그 사이에 과격사상을 가진 무리들이 이에 합세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 점차 그 독수를 휘두를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경찰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정촌 당국자들은 재향군인분회,소방대, 청년단원들과 일치 협력하여 경계에 임하고 만약 유사시에는 속히 적당한 방책을 강구하여 시급하게 대비를 하라는 취지의 첩문이 내려왔으므로 이에 이첩합니다”

④ 강덕상은 4살에 일본에 건너가 네 개의 이름을 지녔다. 강덕상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나카무라야’라는 채소가게에서 일을 한 후 ‘나카무라’라는 고물상을 차렸다. 덕분에 강덕상은 나카무라의 아들, 통상 나카무라라고 불렸다. 초등학교 때는 그의 성 강(姜)의 일본식 독음인 ‘교우’라고 불렸다. 1940년 시행된 황민화정책은 일본 거주 조선인에게도 적용되어 담임 미쓰나리는 강덕상을 어느 날 교단에 세우고 “오늘부터 ‘신노도쿠소’로 바꾼다”고 했다. 강덕상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덕상’의 일본어 발음인 ‘도쿠소’를 버리고 ‘사토시’를 택해 이름을 ‘신노사토시’로 바꾼다.

⑤ 강덕상의 가장 날카로운 논지 중 하나가 1975년에 출판된 저서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中公新書)의 ‘맺으며(終りに)’에서 1923년 9월 당시 일본의 군대와 치안 당국에는 조선 독립운동을 탄압한 경험자들이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또한 “1910년 조선총독부가 생긴 이래 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이었다. 그것은 갑오농민전쟁과 의병 전쟁을 겪으면서 군사적 대응, 헌병정치만이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이천만 조선인의 원망의 눈길에 휩싸여 있어 고슴도치처럼 무장할 수밖에 없는 권력, 활화산 위에 서 있는 권력”이라고 진단했다.

⑥ 더불어 민주당 유기홍의원이 9월 정기국회에서 ‘간토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할 예정이다.

⑦ 이 글에서 야마베켄타로의 태형에 관한 이미지와 서술은 2022.07.18일자 경기신문 [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강덕상, 재일사학(在日史學)의 고투와 성취 그리고 한일(韓日)관계에서 인용했다.

민병래 기자

<2022-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재일 역사학자가 밝힌 “조선인 사냥”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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