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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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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51)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우크라 전쟁에 짓밟힌 수많은 생명
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 꿈꿔야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주님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야2, 2-5)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는 곳입니다. (히브12, 22-24)

가톨릭의 성당과 불교의 사찰은 대개 산중에 있습니다. 단순히 경치 좋고 환경 좋은 곳에 성전을 짓는다는 개념만은 아닙니다. 산에 오를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저절로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게 됩니다. 게다가 발걸음은 느려지고 숨이 차오릅니다. 인간 존재의 미약함과 한계를 체험하고 절대자와 만나기 전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입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매우 좋은 일입니다. 더욱이 산은 위쪽을 향하는 방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하늘과 가깝습니다. 인간 세상과 하느님 세상의 중간지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상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에 산보다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성당은 신학교 건물 3층에 있었습니다. 교수 신부님께서는 층계를 오를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계단을 볼 때면 주님의 산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모든 길이 주님의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욕심을 버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산을 가장 높은 산이라고 예찬합니다. 하느님의 집,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유다인에게는 간절하고 큰 꿈이 있습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파스카 축제 때에 주님의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때는 가장 낮은 자세로 욕심을 버리고 평화를 갈구해야 합니다. 예언자가 지칭하는 산은 바로 ‘주님의 산’, 질적으로 다른 산입니다.

가장 낮은 자세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전적 봉헌, 하느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수용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낮춤과 비움, 곧 십자가의 죽음을 극적으로 표현한 비허(卑虛·Kenosis·케노시스)입니다.(필립2, 6-11)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총칼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대면할 자격이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이렇게 버려야 할 것들을 완전히 버리고, 채워야 할 것을 충만히 채우는 과정입니다.

모든 것에는 전후 맥락이 있습니다. 성경도 집필된 배경, 곧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는 이사야 예언서의 초대 말씀은 매우 기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어두운 과거가 존재합니다. 슬픈 현실에 대한 고발과 백성들의 근원적 회개를 전제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는 책무를 제시합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250여 년에 거쳐 종합 편집된 작품으로 제1이사야(1-39장), 제2이사야(40-55장), 제3이사야(5-66장)로 구분해 설명합니다.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은 구세주이시다’는 뜻으로 ‘예수’님과 어원이 같습니다.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기원전 721년 전후가 제1이사야의 시대적 배경입니다. 제2이사야는 바빌론이 남왕국 유다를 점령한 기원전 586년 전후, 특히 페르시아를 통해 극적인 해방을 찾은 기원전 538년의 감격에서 출발합니다. 제3이사야는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 복구와 메시아사상에 기초한 보편적 구원 사상을 깨닫고 펼치는 시기입니다.

이사야는 ‘고통의 사나이’라 불리는 예레미야보다 90여 년 전에 태어나 활동했습니다. 그 역시 고통의 과정을 겪긴 했으나 그의 소명사화에서 확인하듯 매우 적극적이며 낙관적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1, 6)라고 다소 멈칫거렸다는 얘기는 이미 했습니다.

9월6일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한 시민이 전쟁으로 파괴된 시장을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무서운 고발 뒤 전하는 희망 메시지

반면 이사야는 하느님에게서 소명 받자마자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들 가운데 살면서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야 6, 5)라고 토로합니다. 그때 천사가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 성화(聖化)했으니, 곧 불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이사야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응답합니다. 그리고 세상 한복판으로 나섭니다.

그는 인간의 불신과 고집, 유다 백성의 완고함에 정면으로 맞섭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들은 척 만 척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백성들의 완고함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코4, 12; 이사야6, 1-10)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는 대목에서 설명했듯이, 그 후 아시리아는 유다를 포위하고 공격했습니다. 예언자는 이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하면서 아시리아의 만행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이 유다 왕실과 사제들, 백성들의 불성실과 우상숭배, 온갖 사회적 불의임을 지적합니다. 이사야 1장의 “소나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주님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들이라는 꾸짖음이 그것입니다. 참으로 죄악으로 가득한 백성, 거짓과 불의가 몸에 밴 불충한 지도자들입니다.

“충실하던 도성이 어쩌다 창녀가 되었는가? 공정이 가득하고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살인자들만 가득하구나. (……) 내 지도자들은 반역자들이요, 도둑의 친구들 모두 뇌물을 좋아하고 선물을 쫓아다닌다. 고아의 권리는 되찾아주지도 않고 과부의 송사는 그들에게 닿지도 못한다.”(이사야1, 21-23) 이는 하느님의 신탁, 무서운 고발입니다. 유다에 대한 실망과 좌절, 저주의 메시지입니다.

저주만을 위한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무섭게 꾸짖고 고발한 다음, 희망을 제시합니다. 낙관주의적 희망과 영광의 미래입니다. 이사야 2장 2-5절과 미카 예언서 4장 1-5절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병행 구절입니다. 따라서 후대 작품인 미카가 이사야에 종속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이 둘이 함께 종속된 제3의 원자료가 있을 거로 추측합니다. 당시의 공동체 전례문, 곧 보편기도였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제주 해군기지·사드배치·전쟁…폭력의 시간들

‘주님의 산’이란 흔들림이 전혀 없는 기초가 튼튼한 산, 모든 언덕과 산들보다 높은 산입니다. 주님의 산은 영적인 산, 마음의 산,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장 넓고 거룩하고 가장 높은 산입니다. 종말의 산, 메시아의 산, 구원과 희망의 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온 백성이 그 산으로 몰려옵니다. 우상에 빠지고 죄짓고 악행을 저질렀던 불의한 백성이 이제 이 산을 바라보며 뉘우치고 다가옵니다. 그 행업이 바로 회개와 기도이며 희망입니다. 주님의 산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양심입니다. 가장 낮고 깊은 이 양심이 바로 가장 높은 ‘주님의 산’입니다.

“주님의 산으로 오르자”는 초대는 평화의 기도, 평화의 호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빛 속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아울러 이 초대는 이끌어서 함께 간다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민족이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모여 오면서 내는 한목소리입니다. 주님의 산에는 우리 모두 함께 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의 삶의 지표인 것입니다.

주님의 산은 ‘하느님 말씀’과 동의어로 온 세상 공동체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무장해제의 미래를 보장합니다. 예언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야2, 4)는 말씀으로 평화를 염원하는 순례자의 실천적 기도를 명합니다.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창과 칼 등 전쟁 무기는 생명과 평화를 위한 농기구로 바꾸고 주님의 빛이 온 땅을 감쌉니다. “자, 주님의 빛으로 가자”란 말씀에서 ‘빛’은 창조와 구원, 희망의 원천 바로 하느님입니다.

유다 백성뿐 아니라 온 세계 모든 민족을 여기로 초대합니다. 주님의 산은 보편적 하느님의 나라, 모든 집과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산은 가장 높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적 가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재판의 판단 기준과 척도이며 평화의 실현입니다.

이제 더이상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군비 축소를 넘어 전면적으로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예언자의 꿈, 시인의 꿈, 기도하는 사람의 꿈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평화를 지향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다면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의 지름길입니다.

제주 해군기지와 평택 미군기지 설치, 사드 배치 앞에서 우리가 호소하고 외쳤던 기도와 염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국에 우리가 힘이 없어 미국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던 옥토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바다를 군사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칼과 창, 총과 대포, 군함과 미사일 그리고 군홧발이 수많은 어린 생명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현실은 늘 참으로 잔혹합니다. 하지만 이사야 예언자가 심판과 멸망 이후에 찾아올 희망을 말했듯이, 우리 모두 주님의 산을 오르는 심정으로 더 평화로운 세상, 더 정의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나아가야 합니다.

온 우주 만물과 세상 그리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저희를 축복하셨습니다. 서로 돕고 나누며 평등하게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잊고 본능과 원욕에 따라 뭔가를 더 갖기 위해 이웃을 짓누르고 이웃의 것을 빼앗고 이를 위해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 정의의 법과 사랑의 말씀으로 불의한 저희를 내리쳐주십시오. 욕심과 원욕, 거짓과 위선, 불의와 폭력을 떨쳐버리도록 저희 모두를 내리쳐주십시오. 특히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곳에나 있는 불의한 정치인 무리를 이제는 송두리째 뿌리 뽑아 불태우소서. 그리하여 저희 모두 주님을 찬미하며 모든 이와 함께 기쁨과 평화,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산, 완덕의 산에 올라 주님을 찬미하며 주님과 함께 온 백성이 주님의 평화 속에서 살게 하소서. 세계 평화, 남북의 평화, 가정의 평화, 내적 평화를 일으켜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2022-09-19> 한겨레

☞기사원문: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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