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2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배우와 감독이 미국 에미상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아시아 배우가 주연상을 받은 것도, 비영어권 드라마가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은 6관왕을 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는 한국의 뉴스 콘텐츠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는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김구 선생님 보고계십니까?’, ‘김구 선생님 저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인터넷 유행어) 중 하나다. 이른바 ‘국뽕’이 차오르는 뉴스와 이야기에 김구 선생이 ‘소환’되고 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남긴 ‘부강한 나라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한 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도 함께 회자된다. 바야흐로 K-컬쳐의 시대, 9월 16일에 ‘어린이 백범학교’를 30년 동안 운영해온 ‘청년백범’의 조선동, 홍소연 님을 만났다.
● ‘청년백범’에 대해서 소개해 주세요.
○ 1985년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백범강좌’가 열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사가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그때 임종국 선생님도 오시고, 리영희, 송건호, 강만길, 조동걸, 이만열 선생님 등 명사들을 모셔서 강좌를 열었어요.
거기에서 서로 알게 되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민족문제연구소 모습하고 비슷해요. 처음에는 제대로 된 공간도 없고, 혼자서 접이의자를 깔고 행사 준비하니까, 강좌에 온 청년들이 의자를 나르고, 차를 대접하는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가까워지게 된거죠. 그렇게 함께 행사를 도우면서 공부모임을 하던 청년들이 ‘우리 공부만 하지 말고 뭔가 좀 해보자’ 해서 만든 게 ‘청년백범’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구 선생님에 대해서 ‘임시정부의 주석,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분단과 좌절’ 이런 큰 시각에서 접근했는데, 저희들은 좌절과 역경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성장하는 ‘청년백범’의 모습에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청년백범’이라고 했습니다.
● 두 분은 어떻게 ‘청년백범’에 함께하게 되셨나요?
○ (홍소연) 제가 1982년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근무했으니까 40년이 됐네요. 그때는 사무실이 을지로에 있었어요. 1985년에 협회가 효창원 묘소 가까이로 이사하면서 백범강좌를 시작하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죠. 그래서 조선동 선생을 비롯한 청년들을 알게 되었어요. 8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특히 청년들이 사회에 대한 고민도 많고 활동에 대한 욕구가 있어 자연스럽게 청년백범이 시작된 거죠.
(조선동) 저는 그냥 학생이었죠. 제 아버지께서 한국전쟁 때 혼자 월남하신 분인데 북쪽에서 무슨 정치집회를 하면 ‘김구, 이승만 도당을 벌줘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대요, 그런데 남쪽에 와서 ‘도대체 김구가 누군데 그렇게 욕을 하나, 알고나 욕하자’ 하고 <백범일지>를 구하려고 했더니 금서(禁書)처럼 되어 있더래요. 그래서 어렵게 <백범일지>를 구해서 보니까 욕할 사람이 아니더라고.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백범일지>를 읽어보라고 권하시고, 대학 시절에 저를 데리고 강좌에 오신 거예요. 강좌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습니다.
● 올해 ‘어린이 백범학교’가 30주년을 맞았습니다. 초창기 모습이 기억나시나요?
○ 청년백범 출범 후에 여러 분과를 만들어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첫 사업으로 ‘어린이 백범학교’를 시작했어요. 그게 1992년이었습니다. A4용지에다 안내문을 쓰고 그림도 그려서 주변의 아이들에게 나눠줬어요. 방학 때 이런 학교가 열리니까 오라고요. 처음에는 이 동네 아이들이 등하교하듯이 와서 독립운동에 대해서 공부하고, 효창원 묘역 중심으로 야외활동을 하는 식으로 했습니다. 최근 몇 년은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 전까지는 여름에 분교나 폐교를 빌려서 2박3일 숙식을 하면서 진행했어요.
수업내용은 수벽치기 같은 전통무예도 배우고, 만화에 대한 이야기, 구연동화 같은 것이었어요. 아이들이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아이들하고 저녁 때 판소리, 대동놀이를 배우면서 학교 운동장에서 강강술래 하면서 놀면 아주 즐거워했어요. 그곳이 남이 휴양림 근처에 있는 건천분교였는데 저희가 오랫동안 매년 갔더니, 여름만 되면 할머니들이 아이들을 기다리셨어요. 할머니들이 아이들 밥과 간식을 만들어 주셨거든요.
지금이야 뭐든 찾아보기 쉽지만 그때는 독립운동 관련 사진 같은 걸 보기 어려웠거든요. 밤하늘에 별은 총총한데, 모깃불을 피워놓고 운동장 축구 골대에다가 광목을 치고 ‘철컥철컥’ 하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이들도 재미있었죠. 올해 백범학교가 30년이 됐습니다. 옛날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고 선생님이 되어서 백범학교 선생님으로 참여하겠다고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보람이 있죠.
● ‘어린이 백범학교’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운영되나요?
○ 어느 시대에나 유행 같은 게 있잖아요. 프로그램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양하게 하지만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영화, 음악으로 배우는 독립운동 같은 것은 지속하고 있습니다. 또 아이들이 우선 즐겁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저희가 초등학교 4, 5, 6학년을 대상으로 백범학교를 여는데 이 나이대 아이들이 독서량도 많고 독립운동에 대해 관심이 많아 잘 받아들여요. 그래서 저희는 이 시기 아이들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대면수업을 할 수 없으니까 온라인으로 진행했어요. 학교가 끝나고 온라인 평가서를 받았는데, ‘우리가 지금 사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구나’, ‘참 감사한 일이구나’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단조롭고, 어쩌면 무미건조한 우리 일상의 평화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저희는 막연히 ‘이런 사람들이 뭘 했다’에 그치지 않고 앞뒤 맥락과 독립운동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함께 다루면서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교육에 관심이 있고 ‘괜찮겠다’ 생각하신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보내시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행사지만 힘들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아이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저희가 깨달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나라 평균 초등학생들보다는 공동체나 나눔, 배려 이런 가치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아이들이 오는 것 같아요. 연인원으로 치면 지금까지 약 900명 정도의 어린이가 백범학교에 참가했어요.
● 30년동안 ‘어린이 백범학교’를 지속하는 이유는?
○ 지난 세기 전세계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광풍이 불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식민지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줄기차게 올곧게 독립운동을 펼쳐간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스스로 살아갈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독립운동가들은 현실적으로 보면 대단히 성공확률이 적은 일에 자기 생을 걸은 겁니다. 우리나라는 결국 독립했지만, 독립운동가 개개인의 삶을 보면 성공한 삶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김구 선생님만 봐도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에 가깝죠. 예를 들어 동학에 뛰어들었는데 결국 실패했고, 평생 독립운동을 했는데 조국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분단이 되었고, 분단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막지 못했고, 결국 친일 반민족 세력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김구 선생님의 생을 보면 그런 좌절과 실패가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김창수라는 이름으로 동학 접주로 활동할 때 동지에게 배신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승 고능선을 만나, 사람은 일을 할 때 ‘의(義)’를 중심에 두고, ‘정확하게 판단해서, 실행에 쟼기되, 실패하더라도 계속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것을 실천했지요. 김구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 결국 실패는 스스로 뜻을 세우고, 그뜻을 이룰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학교선생님이 ‘교육은 어떤 사람을 어떤 자리에다 갖다 놓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독립운동가들만큼 좋은 스승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기로 하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길이 옳고, 이기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높은 벽을 만날 때마다 그분들을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죽을 줄 알면서도 뚜벅뚜벅 그 길을 갔던 우리 선배들의 이야기’를 아이들 가슴에 점으로라도 찍어주고 싶어요. 그 점이 아이들에게 기둥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청년백범’의 달라진 점이 있다면?
○ 저희들은 주로 아이들 교육사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함께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청년백범 글, 박시백 그림, <김구,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다>, 한겨레아이들, 2009.) 이 책은 평이 좋아서 15쇄 정도 나온 걸로 알고 있어요. 10년 전부터는 청소년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중국 답사를 14회 진행했습니다. 코로나가 풀리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중국 답사입니다. 몇 년 전부터는 효창원, 경교장 답사도 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시대정신의 실천이잖아요. 나라를 빼앗겼는데 독립운동 말고 어떤 시대정신이 있을 수 있었겠어요. 이봉창 의사 의거 때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동포들이 모아서 보내준 돈으로 수류탄 두 개 구하고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거에요. 그 돈 모으는데 1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이봉창 의사 의거 20일 뒤에 일본이 상해를 쳐들어가거든요. 한 달 동안 일본군 10만 명이 상해에 동원되었어요. 거기다가 비행기 300대, 군함 80척이 투입되었지요. 우리는 수류탄 두 개 마련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힘으로는 절대 못 이기죠. 그런데 이봉창 의사가 환하게 웃고 있어요. 이분들이 웃으면서 죽으러 갈 수 있었던 건, 스스로가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시대정신의 실천이라고 확신하셨기 때문이잖아요.
우리는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을 찾아서 실천해야겠죠. ‘청년백범’은 우리 아이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힘이 나를 억압해도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역사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야지요. 인생이라는 게 결국 개인적인 성공, 실패로만 설명할 수 없는 가치가 있잖아요.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세상, 그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상,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추구했던 가치, 그런 삶의 자세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 이긴 자와 진 자를 가르고, 성공과 실패, 이런 단선적인 가치만 가득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있어요. 이래서는 경쟁에서 이긴 친구들도 행복할 수 없죠.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어린이 백범학교’의 규모도 커지고 횟수도 늘어나 더욱더 많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 ‘청년백범’의 소망이 있다면?
○ 저는 김구라는 사람이 그냥 보통 국가에서 태어났으면 선생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님이 황해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려요.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교육자잖아요.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서 채택한 삼균주의(三均主義)에도 정치, 경제와 함께 교육의 균등이 들어가 있잖아요. 남의 나라 땅에서 돈을 빌려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정말… 이분들은 우리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처럼 귀하고, 하늘이어서 서로 평등하다,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서 국민 노릇을 제대로 하면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가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셨던 거죠.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1949년에 정말 살림이 가난했어요. 경교장에서 겨울에는 제대로 불도 못 때고, 먹는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지만 그 와중에도 학교를 두 개나 세워요. 1949년 1월, 3월에 금호동과 염리동에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셨어요.
또 김구 선생이 치하포사건으로 탈옥 후에 김주경을 만나러 강화도에 갔을 때 김주경의 아이들, 김주경 형제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서당을 꾸렸는데 동네 아이들도 모여들었어요. 그래서 한 30여 명 모아놓고 공부를 가르치다가 강화도를 떠나셨어요. 그래서 지금 ‘청년백범’은 가진 것은 없지만 언젠가 강화도에 김구 선생님 이름으로 학교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42회 어린이 백범학교를 진행했어요. 청년백범 회원들이 다달이 내는 회비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후원금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후원자가 늘어서 더 많은 아이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독립군가 배우기, 영화로 보는 독립운동을 배우는 ‘어린이 백범학교’ 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