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병참기지 조선반도를 관통해 달린 성화(聖火) 계주행렬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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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성화봉송(聖火奉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올림픽 대회의 사전행사 또는 개막식의 한 장면이 퍼뜩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언젠가 이것의 영어식 표현이 궁금하여 뒤져보았더니, ‘Olympic flame’, ‘Olympic fire’, ‘Olympic torch relay’ 등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근데 암만봐도 여기에 ‘성스럽다’거나 ‘신성하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고 이건 단지 화염(flame), 불꽃(fire), 횃불(torch)이라거나 하는 단어로 읽혀질 뿐인데 어쩐 일로 이것의 번역어는 애당초 ‘성화(聖火)’로 둔갑하여 정착된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동아일보> 1934년 12월 2일자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처음으로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채화한 횃불을 옮겨오는 이른바 ‘성화계주(聖火繼走)’에 관한 시행계획과 이동행로에 대한 약도가 묘사되어 있다.

아무튼 올림픽 성화의 유래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마라톤 타워(Marathon Tower)를 설치하고 이곳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대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점화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때 그리스에서 채화한 불꽃을 직접 계주방식으로 옮겨와 경기장 성화대를 밝히도록 한 것이 성화봉송 릴레이의 첫 사례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으로 예정된 제12회 도쿄 올림픽 당시에도 성화봉송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동경(東京)의 오륜대회(五輪大會)에 성화계주(聖火繼走)를 제창(提唱), 해로는 일본군함이 옮기라고, 희랍측 위원(希臘側 委員)의 소론(所論)」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와루소 6일 발] 올림픽 백림대회에서 각국에 가장 감명을 준 성화(聖火) ‘리레-’는 동경대회에서는 거리 ‘코-스’의 문제로 일단 중지가 되었는데 그 전부터 성화 ‘리레-’의 거행을 열망하여 일본조직위원회에까지 그 안을 제시하고 있던 희랍 IOC ‘호라낫치’ 씨 등은 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금회의 총회 벽두에 이 문제를 제시하여 올림픽 발상지인 ‘아젠스’와 대회 개최지를 연결하여 올림픽 정신의 교양을 기한다고 성명하여 주목을 이끌고 있다. 동 씨의 제안에 의하면 성화는 남방 ‘코-스’를 취하고 올림피야 동경까지 19,286‘키로’, 이 사이 해로가 17,876‘키로’, 육로 1,410‘키로’로 해로는 일본군함을 출동시켜서 이에 충당하여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화(聖火)라는 단어가 올림픽과는 전혀 무관하게 여러 날에 거쳐 온통 신문지면을 장식하던 시절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0년 2월 2일자에 수록된 「반도발전(半島發展)을 기원(祈願), 화찬구(火鑽具) 성화(聖火)를 배수(拜受), 3일 부산(釜山)을 출발(出發)」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들어 있다.

광휘 있는 황기 2600년의 축전을 앞두고 조선신궁에서는 국조황대신궁(國祖皇大神宮)으로부터 존귀한 화찬구(火鑽具, 히키리구)를 배하고 동업(同業) 경성일보(京城日報)와 조선연합청년단(朝鮮聯合靑年團)에서는 성화(聖火)를 배수하여 병참기지 반도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원하기로 되었다고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배수한 화찬구와 성화는 3일 오전 7시 부산에 상륙하여 용두산신사(龍頭山神社)에서 구화(篝火, 카가리비)에 점화하여 가지고 정선수(正選手) 2명에게 봉지되어 조선신궁까지 계주(繼走)를 할 터인데 조선신궁 도착은 9일 오후 2시라고 한다.

황기 2600년의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을 맞이하여 이세신궁에서 성화(聖火)을 얻어 조선신궁까지 옮겨오는 행사계획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2월 9일자의 보도 내용이다. 원래는 불을 일으키는 도구인 ‘화찬구(火鑽具)’를 받아오면 되는 일이지만, 확실하게 신화(神火)를 받아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 직접 횃불에 불을 붙여 옮겨오는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라는 내용도 함께 서술되어 있다.
『경성일보』 1940년 1월 28일자에는 이세신궁에 조선신궁으로 옮겨오는 ‘성화봉천(聖火奉遷)’의 일정과 코스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모두 7일간에 걸쳐 조선연합청년단의 각도 대표자들이 구간을 맡아 계주 형식으로 옮겨지는 성화봉송의 행로에 대해 이를 “내선일체의 발자국 소리”라는 찬사를 덧붙여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황대신궁(皇大神宮, 코타이진구)’는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내궁(內宮)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이곳의 주된 제신(祭神)은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곳에서 화찬구(火鑽具,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도구)와 성화(聖火)를 받아 조선신궁(朝鮮神宮)까지 계주 형식으로 옮겨온다는 얘기인데, 황기(皇紀) 260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병참기지로 활용되는 식민지 조선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기원(紀元)’이라고도 하는 ‘황기’는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 진무천황)’의 즉위년인 서력기원전(西曆紀元前) 660년을 원년(元年)으로 정한 것이며, 이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기원 2600년은 곧 1940년에 해당한다. 흔히 ‘제로센(ゼロ戰)’ 또는 ‘레이센(零戰)’이라고 했던 일본 해군의 주력기인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의 경우, 이러한 약칭(略稱)은 바로 당시의 군용기 명칭채용법에 따라 황기 2600년에서 끝 두 자리 숫자를 따온 표현이다.

『매일신보』 1940년 2월 8일자에 소개된 ‘성화봉천’의 한 장면이다. 여기에는 충청북도 대표단이 담당했던 4일째 행로의 옥천(沃川) 도착 광경이 포착되어 있으며, 기사 본문에는 5일째 행로로서 대전을 떠나 천안까지 이어지는 구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매일신보』 1940년 2월 9일자에 수록된 「성화(聖火)는 무엇인가? 조선신궁(朝鮮神宮) 구화(篝火)에 옮길 이세황대신궁(伊勢皇大神宮)의 신화(神火), 획기적 행사(劃期的 行事)에 반도산하 감격(半島山河 感激)」 제하의 기사는 신궁에서 불의 존재를 신성하게 여기는 뜻과 구태여 이른바 ‘성화봉천(聖火奉遷)’의 행사를 벌이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사에 빛나는 황기 2600년의 뜻깊은 기원(紀元) 가절을 맞이하여 동업 경성일보사(京日)와 조선연합청년단에서 봉사하는 성화봉천계주(聖火奉遷繼走)는 마침내 부산(釜山) 경성(京城) 사이 560‘키로’의 장도를 엿새 동안에 달려 성화는 9일 오후 4시 반 대망하던 조선신궁에 어도착하기로 된 바 이에 이세황대신궁에서 봉천되는 성화(聖火)의 뜻과 또한 봉지되어 오는 화찬구(火鑽具)에 대하여 일반 국민 가운데 아직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듯하므로 조선신궁 아치와 궁사(阿知和宮司)는 8일 그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조선신궁에서는 빛나는 황기 2600년의 기원절을 맞이하여 이세황대신궁(伊勢皇大神宮)으로부터 성화를 봉천계주로 받들어 기원대제의 어료화(御料火)로 쓰기로 되었다. 불은 신도(神道)에 있어서 물이나 소금과 함께 신성한 것으로 존중히 여기는 바인데 이세황대신궁에서는 신사(神事)에 사용하는 불은 언제나 기화전(忌火殿)이란 신찬조리소(神饌調理所)에서 새로이 찬화(鑽火)하는 불만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세황대신궁에서 불을 횃불에 붙여가지고 봉천계주하여 조선신궁의 구화(篝火)에 옮기기로 된 것이다. 또 이번에 이세로부터 받들어오는 화찬구(火鑽具)는 순전히 고대식(古代式)의 것으로 이즈모대사(出雲大社)의 것보다는 얼마간 진보된 것인데 이것은 비파나무로 만든 대(心棒)가 홰나무 절구에 엇갈려서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신궁에서는 이번에 받는 화찬구로 어공병(御供餠)과 신찬(神饌)을 만들고 한편 뜻 깊은 기원대제의 어료(御料)에 쓰며 또 정료(庭燎)에 이를 쓰게 된 것이니 이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다. 이리하여 이번에 받는 것은 화찬구이나 따로이 봉천할 때에 이 신구(神具)의 둘레를 깨끗이 하고 또 확실히 신화를 옮겨온다는 표징(表徵)을 하기 위하여 따로이 이세로부터 불을 받아 횃불에 붙여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이 당시 기원 2600년과 시정(始政) 30주년을 널리 기념하고자 이세신궁에서 조선신궁을 ‘성화’를 옮겨오는 일은 경성일보사와 조선연합청년단이 주관하여 이를 맡았고, 이것이 이뤄지는 전 과정의 동선과 일정은 신문지상을 통해 세세하게 중계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일보사의 사장 미타라이 다츠오(御手洗辰雄)와 조선신궁의 주전(主典) 이케다 료하치(池田良八) 등이 포함된 대표단 일행이 그해 1월 31일 이세신궁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샌 뒤에 2월 1일 날이 밝자 그곳에서 성화를 수령하였고, 이들이 관부연락선 금강환(金剛丸)에 올라 현해(玄海; 대한해협)를 건너 마침내 부산잔교(釜山棧橋)에 도착한 것은 2월 3일 오전 6시였다.

『매일신보』 1940년 2월 10일자에 수록된 이세신궁 성화(聖火)의 경성 도착 관련 기사이다. 사진의 위쪽은 성화봉납식이 거행되고 있는 조선신궁의 모습이고, 아래쪽은 성화봉천 행렬이 남대문 구간을 막 지나는 장면이다.

그 이후 성화봉천행렬은 부산을 출발한 이래 7일간에 걸쳐 동래, 양산, 언양, 경주, 영천, 대구, 왜관, 김천, 황간, 청산, 옥천, 대전, 조치원, 천안, 평택, 수원으로 이어지는 행로를 따라 이동하였고, 2월 9일에 이르러 최종 목적지인 경성에 당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40년 2월 10일자에 수록된 「어성화(御聖火), 서기(瑞氣)어린 조선신궁(朝鮮神宮)에 황황(煌煌), 금일(今日) 오후(午後) 어안착(御安着)」 제하의 기사는 이들 행로의 마지막 이동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일본의 신도(神道)에서 불을 신성하게 여겨 이를 성화(聖火)라고 지칭하는 내력에 대한 글을 담고 있는 『매일신보』 1940년 2월 11일자의 기사 한 토막이다. 여기에 곁들여진 사진자료는 이세신궁에서 옮겨온 ‘성화봉천’의 행렬이 조선신궁에 막 도착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지난 3일 이세황대신궁(伊勢皇大神宮)의 존엄한 신기(神氣)를 다붓이 안고 물결도 세인 달빛 어린 현해(玄海)를 건너 흥아(興亞)의 봄을 맞이한 황국반도의 첫째 관문인 부산(釜山)에 어상륙한 성화(聖火)와 성화기(聖火器)는 남부와 중부 조선 각도 시민중의 열렬한 환영과 환송을 받으며 이레 동안에 경성까지 560‘키로’의 장도를 조선연합청년단 각도 대표와 및 경성 대표의 손에 받들리어 봉천계주하여 9일 오전 9시 성화대는 최후 숙박지인 수원(水原)을 떠나 37‘키로’의 최종 ‘코-스’를 달려 마침내 오후 4시 반에는 대망하던 서기(瑞氣) 어린 조선신궁의 배전 앞에 어안착하였다.

『경성일보』 1940년 1월 26일자에는 이세신궁에서 받아오는 불로써 기원 2600년을 상징하는 2,600개의 성화병(聖火餠, 성화떡)을 지어 이를 조선신궁 참배자들에게 나눠줄 예정이라는 내용이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향토의 영광을 두 어깨에 지니고 선발된 경성부 대표 하마다 토시카츠(濱田利勝), 전문규(田文奎) 두 선수의 손에 받들린 성화와 성화기는 수원을 떠난 지 일곱 시간만인 오후 2시 45분 경성에 들어오는 첫째 관문인 영등포(永登浦) 기린맥주 공장 앞으로 꽃불이 일어나는 가운데 발걸음도 씩씩하게 지났고 동 3시 34분에는 마침내 한강교(漢江橋)파출소 앞을, 그리고 동 4시 12분에는 남대문통(南大門通) ‘세브란스’ 앞을 지나게 된 바 집집에서는 국기를 달고 그리고 연도에는 성화대를 충심으로 받들어 맞는 학생청년단 그리고 수 만의 민중들로 꽉 들어차서 일대 성관을 이루었는데 성화대는 ‘세브란스’ 병원 앞을 지나 동 4시 30분 정각 마침내 대망하던 조선신궁에 어안착하였다.

이들이 가져온 성화에 대해서는 즉시 봉납식(奉納式)을 거행하고 경내에 마련된 구화(篝火, 카가리비)에 옮기어 기원절제(紀元節祭)까지 계속하여 태우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재화병도식(齋火餠搗式)을 통해 이 불로써 2,600개의 ‘성화병(聖火餠, 성화떡)’을 만들어 대전(大殿)에 헌상함과 동시에 참배자들에게 각각 나눠주는 행사도 거행했다고 알려진다.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1940년 2월 11일은 이른바 ‘황기 2600년의 기원절’이었으므로 이날을 맞아 조선신궁에서는 팔굉일우(八紘一宇)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을 내세운 성대한 봉축행사가 거행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바로 이날이 또한 일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한 이른바 ‘씨제도(氏制度)’의 개시일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매일신보』 1940년 2월 11일자에 수록된 ‘씨제도(氏制度; 창씨개명)’ 실시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이 날은 이른바 ‘황기 2600년’을 맞이하는 기원절(紀元節, 초대천황즉위일)‘이기도 했지만, 일제는 하필이면 이때에 맞춰 창씨제도의 시행일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화’라는 말 자체가 이처럼 불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일본 신도(神道) 쪽의 언어습성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렇다면 올림픽 대회의 ‘불꽃’을 일컬어 ‘성화’라는 번역어로 대입시킨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결과물일 테고, 결국 ‘올림픽 성화’라는 용어 역시 일제잔재의 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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