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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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해방 직후 조선 민중들은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화북 지방에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근황과 활약상을 알고 싶어했으며 아울러 동 단체의 지도자들이 조속히 귀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힘써주기를 바랐다. 이번 호에는 먼저 <신조선보(新朝鮮報)>와 <중앙신문>에 실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관련 기사를 싣는다. 기고자는 연안에서 활동하다 귀국했거나 8·15 해방으로 옥중에서 풀려난 관련자 3인인데 조선의용군 제2지대원 심운(沈雲)과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유명한 김학철(金學鐵),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이자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던 김태준(金台俊)이다. – 편집자 주

1938년 10월 10일 한구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해외동포는 언제 오나? ― 연안독립동맹(延安獨立同盟)의 근황

8월 15일 이래 우리민족의 가장 관심되는 일은 다년간 국외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온 모든 혁명전사와 혁명단체의 동향이다. 이제 본사는 연안서 돌아온 심운(沈雲) 씨의 담화를 얻어 독자의 궁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한다. 

심운 씨는 1935년에 상해 교통대학(交通大學)에 재학하는 일방, 당시 김원봉(金元鳳) 씨가 주재하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당무공작에 종사하였으며 그 뒤 1942년부터는 조선독립동맹 만리장성 북경지부 분맹원으로, 동당 직속의 조선의용군 제2지대에 소속되어 정치지도에 종사, 동년 말에 천진에 공작차로 잠입하였다.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바 되어 조선으로 압래(押來), 15년 구형에 8년 언도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8월 15일 후에 출옥한 혁명 전사의 한 분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조선 유학생과 망명청년들은 남경으로 모여들었다가 곧 한구로 가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8개월 동안의 단기훈련을 졸업하였다. 이 중앙육군군관학교는 황포군관학교의 후신이니 군정(軍政) 간부의 양성기관이며 그 당시 동교의 제1대대와 제4중대가 조선청년으로만 편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졸업생들로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군을 한구에서 결성하니 군장은 김원봉 씨요, 제1지대장 박효삼(朴孝三), 제2지대장 이익성(李益星), 그리고 뒤미처 결성된 제3지대장 김세일(金世日) 씨 등이었는데 김세일 씨는 그 후 전투로 왼팔을 분지른 사람이다. 1938년 10월 25일에 한구가 함락되자 내가 소속했던 제1지대와 제3지대는 호남성 강서성 광동성 광서성 등지에서 그리고 제2지대는 호북성과 산서성 등지에서 주로 대적(對敵) 선전과 조선민족을 위한 국제선전과 정치 7부, 군사 3부의 간부양성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에 제1, 제2, 제3의 각 지대가 낙양에 전부 집합하여 서안에 가서 대규모의 국제선전을 하는 동시에 황하 이북으로의 진군을 결의하였으니 그 이유는 화북에 조선동포가 많이 주거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훈련 조직하여 간부를 양성함에 있었다. 그리하여 근거지를 산서성 요현으로 정하고 그해 3월부터 시작한 이동이 그해 8월에 완료되었으니 우리는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기관총은 뜯어서 궤짝에 넣어 짊어지고 낮에는 민가에 숨고 밤에만 진군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요현에 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다음에 말할 조선청년연합회의 주선과 소개에 의존한다. 원래 연안에는 무정(武亭, 武丁은 오류-필자) 동무밑에 조선청년들 100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뒤에 요현에 있으면서 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여 활동중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고 그곳으로 갔던 것이므로 우리는 곧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2년 7월에 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표대회에서 동 연합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발전적으로 해소하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조선의용군은 독립동맹 군사부 직속으로 되었으니 동맹의 최고 책임자는 무정 동무이며 중앙위원은 도합 10명인데 그중에 세 분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나 생각나는 분만은 다음과 같다.

김두봉(金枓奉) 한빈(韓彬) 최창익(崔昌益) 이익성 박효삼
(군사 책임자) 진한중(陳漢中) 김창만(金昌滿)

나는 그 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활동이 봉쇄되고 있었으나 지난 7월 7일에 입수한 동지의 보고에 의하면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각각 40개의 분맹(分盟)과 지대를 가지고 있으며 학병과 기타 조선청년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여 연안으로 집중시키어 박효삼 동무 지도로 군정간부를 양성중이라 하며 여러 가지로 군에서 받아쓰던 경비를 현금에 와서는 우리들의 자주적인 농경, 목축, 합작사 등의 경제활동으로 인하여 자작자급하고 있다 하며 기동(冀東)지구에는 재작년에 이미 4, 500명의 맹원이 있고 봉천에는 현재 한청(韓靑) 동무 밑에 2천명의 맹원이 있다 하니 그 발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연안에는 1941년 10월에 일본공산자동맹이 조직되어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오카노(岡野)가 지도하였으며 ‘모리겐’이라는 사람이 노농학교 교장으로 있는데 일본인 청년들도 꽤 많이 있다. 연안에 계신 몇 분을 나 아는 대로 좀더 자세히 소개한다면 이러하다. 

무정 동무는 40세 전후의 아직도 젊은 분인데 중국공산당이 서천(西遷)할 때에 오직 조선사람으로는 이분 혼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어찌 음식이 결핍되었던지 중국공산당원 중에 위장이 상하지 않은 분이 드물다고 하는데 무정 동무도 몹시 약했다가 최근엔 많이 회복되었다. 팔로군 포병 총사령이었으나 지금쯤은 사직하고 독립동맹에 전심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침착하되 예민하고 대담하며 포용력이 크다. 부하에 대하여 중급간부에게는 퍽 엄격하되 하등병이나 일반 민중에게는 대단히 친절하고 관대하다. 전투에 있어서도 처음에 아주 유연한 것 같으나 일단 전기(戰機)를 잡으면 맹호보다도 날쌔고 과감하다. 생활은 몹시 소박하여 지도자에 대한 우대를 스스로 거절하고 하급 병졸과 침식을 똑같이 하고 있다. 그는 1939년 산서성 심현 접전 때에 일본군 일대의 내습을 받아 싸우지 않고 물러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무기의 전부―대포 2문과 기관총 2정을 산중턱에 묻어놓고 숨어있다가 일본군의 승리 축하장을 기습하여 일본군의 사상자 25명가량을 내게 하여 격퇴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두봉 동무는 상해 남경 중경을 거쳐 연안으로 오신 분이니 널리 알려진 한글학자이며 역사가. 성격은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현재 정치교육과 한글, 역사교육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상해인성학교 교장이었고 남경 조선민족혁명당의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꾸준히 한글과 국사 연구를 계속해왔다.

한빈은 로서아(러시아) 출신, 공대 졸업, 만주 공청(共靑), 조선 ML당 관계로 대전서 6년형을 마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광서성 계림 중경을 거쳐 연안으로 와서 현재 정치지도와 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며 세밀하고 조직적이다. 

최창익은 ML당에서 한빈 동무와 같이 대전서 6년형을 마치고 부인 허정숙(許貞淑)과 함께 남경으로 망명, 한구를 거쳐 연안에 들어왔다. 현재 정치지도를 하는 한편 항일군정대학에 교편을 잡고 있다.

박효삼 동무는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앙군 육군장교로 있었는데 조선의용대를 인솔하여 북상. 현 조선의용군장. 성격은 침착 과감하며 전투에 능하다. 특히 그가 1934년 만리장성 고북 구전에서 세운 전공은 저쪽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신조선보> 1945.10.10


조선의용대의 전투보고(1) 팔로군과 연합작전으로 민족해방성전에 치구(馳驅)
― 화북(華北)에서 돌아온 김학철(金學鐵) 씨 수기

수없이 울려오는 조종(弔鐘) 소리에 낙일(落日)의 음영이 처절하던 일본제국주의의 잔천(殘喘)이 태평양상의 한낱 포말(泡沫)로 그대로 사라져 버리자 회전하는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는 우리에게 자유와 광명을 약속해주는 더함 없는 감격인 동시에 우리 앞에 종횡으로 교착되어있는 문제는 너무나 크고 많고 또한 무겁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내외(海內外)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경경일념(耿耿一念)을 모아 상인(霜刃)을 갈아온 것은 물론 우리의 자유와 광명을 재래(齎來)함에 그 목적을 두었고 이제부터 환연(煥然)히 일신하여 앞으로 착종된 문제를 해결지어 나아감이 그의 포회(抱懷)한 숙제인 것은 말할 것 없다.

풍우(風雨)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나는 북악산 하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티끌에 쌓여 하루 이틀의 견문으로서 앞으로의 문제를 토의할 아무 식견도 정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지나간 10년 동안의 해외생활에서 체험한 몇 가지를 들어 국내에 계신 여러 동지들에게 칼을 갈던 그 시절의 생활의 단편이나마 피력해보고자 한다.

 ◇ 

화북조선청년연합회(조선독립동맹의 전신)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군의 전신)가 건립되어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무력전쟁을 개시한 1941년 막달에 나는 석가장(石家莊) 부근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명예롭지 못하게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 그러나 우후죽순처럼 날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그 힘이 오늘에 있어서 조선민족혁명의 강장(强壯)한 추동력이 되어있을 것만은 확신한다.

일체의 반일세력을 뭉치어 한 덩어리로 만든 다음 팔로군과의 긴밀한 연합작전은 일본제국의의 붕괴와 조선민족해방의 위대한 역사를 글자 그대로 선혈로써 물들여왔다.

팔로군은 조선민족해방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
우리는 만공(滿控)의 열성을 다 기우리어 원조를 아끼지 않으련다.
우리의 무기고를 개방하련다. 양말창(糧秣廠:식량창고)도 피복창도 동지들의 임의에 맡기련다.
비록 가난한 선물이나마 만의(滿意)하게 받아주기 바란다.
끝으로 조중(朝中) 양 민족은 연합하자!
조선독립 만세! 중국민족해방 만세를 고창한다.

이것은 중국 18집단군 부총사령 팽덕회(彭德懷. 총사령 朱德) 동지의 우리를 향하여 외친 연사의 1절이다. 이리하여 기관총 소총 권총 수류탄 좁쌀자루 강낭가루주머니 짚신 호신의 우리의 씩씩한 무장대오는 “앞으로 갓”의 호령 밑에 움직이기 비롯하였다.

우리의 대중을 위하여 조선민족해방을 위하여 총을 메고 칼을 잡고 나서는 조선의 건아들!
벽립천인(壁立千仞)의 태행산록을 오르내리며 진사만장(塵沙萬丈)의 황하 양안을 넘나들며 풍찬노영(風餐露營)하던 그 시절, 울긴들 오죽하였으며 웃음인들 적다하랴? 우선 지나간 그날의 생활에서 웃음과 울음을 찾아보자.

먼저 조직적 통일적인 기율(紀律)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팔로군이 통일된 조직 밑에 엄격한 기율로서 대중을 포용하고 움직이고 있거니와 우리들의 기율 또한 다름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순연한 동지애의 결합이 있기 때문에 성문적(成文的)인 장식의 기율을 명령에 따라 복종함이 아니요 어디까지든 화협(和協)과 친애로서 저절로 한 뭉치가 되어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의 자랑이었다. 어쩌다가 동지가 무슨 조그만 과오라도 범하는 일이 있으면 군법의 처단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지끼리 서로서로의 성심 진의로서 간단히 풀어버리고 만다. 적의 야습, 적의 포위, 적의 침구(侵寇)는 끊임없이 우리를 향하여 공격해온다. 적이 천(千)이면 우리는 백(百), 적이 대포면 우리는 기관총, 적고 약한 우리의 힘을 우리 스스로 퇴축(退縮)하여 겁낸 적은 없었다. 끝까지 싸우고 용감하게 물리치고 혹은 물러선다. 밤에 낮을 잇대어 포연탄우(砲煙彈雨)를 무릅쓰고 행동하는 우리의 부대 중에서 불행히도 희생이 있는 날 동지가 있는 날 동지의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릴 때 아니 동지의 한 팔 한 다리라도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격적(擊敵)의 칼날을 다시금 가다듬고 충천하는 노발(怒髮)을 어루만지며 이를 악물고 일어선다. 그러나 그것이 달도 밝은 밤, 바람도 찬 수수깡울 속에 둘러앉아 용감히 적진에서 벽혈(碧血)을 남기고 사라진 동지의 면영(面影)을 찾고 부상한 동무를 간호할 때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운다.

동지애! 이것만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정신적 단결의 힘이요 자랑이었다.

<신조선보> 1945.11.05.


조선의용대의 전투보고(2) 천험요새인 태행산중(太行山中), 조밥·수수떡도 인간진미
– 화북에서 돌아온 김학철 씨 수기

화북에 있는 우리들의 근거지는 태행산이 중심이었다. 태행산은 산서, 하남, 하북 3성의 변경에 반거(盤據)한 일대 웅진(雄鎭)으로 준험 기발로서 알려져 있는 만큼 산중에 발을 들여놓으면 주위 수백 리의 산악을 중심으로 혹은 광활한 고원으로 혹은 곤곤(滾滾)한 장류(長流)로 일대의 별유경(別有境)을 형성하여 반원시생활의 산촌이며 태고의 유목민을 연상시키는 목장 등이 산재해있다. 중국 팔로군의 근거지가 여기인 만큼 제반의 군사시설을 비롯하여 학교 병원 오락장 등의 설비가 산록에 계곡에 여기저기 설비되어있어 총탄도 이 산중에서 나오고 신문도 이 산중에서 나온다. 계절을 따라 일본군의 포위침공이 격심하다고는 하나 지리적으로 천험의 요새지로 되어있는 만큼 이 태행산중의 근거지만은 꼼짝 않고 그대로 이 산중에서 이동식으로 안전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

태행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의 민중은 태고의 하늘 밑에 소위 현대적인 과학적인 생활양식의 시련이란 터럭 끝만치도 잠입되어있지 않고 태고의 순박 천진 그대로의 민중이기 때문에 이 순박한 민중으로 조직되어있는 팔로군의 군인으로서의 성격 또한 천진 그대로의 발로인 동시에 다시 말하면 동방적인 대륙적인 크고 굵은 선이 그대로 그네들의 생활에 나타나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개천가로 세수를 하러 나가면 인사(隣舍)의 중국군인들도 하나둘씩 수건을 들고나와 얼굴을 수건에 대고 문지른다.(조선사람은 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이런 자리에서는 상관도 하졸(下卒)도 아무 계급과 차별이 없이 같은 인간 동지로서의 너와 나 사이의 친화만이 애연(靄然)할 따름이다. 팽덕회 동지는 가끔 이런 말을 하며 여러 사람을 웃기었다. “대체 우리 팔로군의 병졸들은 모두 무지한 것들이야! 상관 보고 경례를 할 줄 아나 쩍하면 너야 내야 하는 판이니 일본 군인놈들처럼 세련이 못 되었어… 상관 대접을 모른단말야”

이 말은 어찌 보면 불만 같으나 사실은 그들의 인간동지로서의 결합된 상하의 친화력이 모든 허식과 가장을 초탈해 버리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점이 군인으로서의 소만(疏漫)한 태도가 있어도 보이나 일단 위난의 경우에 당하면 동심일덕(同心一德)의 충분(忠奮)을 다하여 성난 사자처럼 적진을 향하여 달리는 구국의 용사들이라 한 사람의 용맹이 넉넉히 적의 백 사람을 당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길러나는 우리들의 물심양면의 생활 또는 대륙적인 그대로의 감염이 적지 않다.

우리들 군인의 식료(食料)는 주로 배급 정도로 되어있어 어디를 가든지 배급표만 내밀면 공급을 받게 되어있고 전체적으로의 생활필수품은 주로 자급자족의 경제기구가 확립되어 식량만은 완전히 자급되어있다. 농경의 계절이면 군인들도 총칼 대신 호미자루를 들고 밭이랑을 타 군(軍)과 농(農)이 완전히 동심일체가 되어있어 생산돌격대가 조직되어 간황, 종식(種植), 목축 등을 대대적으로 하여 조 강낭콩 감자 무 배추 닭 돼지가 우리들의 주방에 미각을 돋구어 주고있어 계속되고 연일의 고달픈 행군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가 영사(營舍)에 들어 무거운 배낭을 끌러놓고 무득무득히 담은 조밥, 강낭떡을 한 움큼 집어넣을 때 그 맛이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월급은 중국 중대장급으로서 월 3원 50전이고 따로 찬값으로 하루에 중국군은 12전, 우리는 특별대우라 해서 20전을 받았는데 그때의 물가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소금이 1근 4원, 흑당(黑糖) 1근 7원 50전, 돈육(豚肉) 1근 2원이었다. 이러하니 우리의 생활양태를 짐작해 알 수 있지 않은가?

대체로 우리들의 생활은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 빈곤이 우리의 팽창해 오르는 혁명의 봉화를 제어는커녕 꼼짝도 움직이지 못하였다. 기근과 피곤에 시달리면서 언제나 뜻은 새롭고 의기(意氣)는 높았다. 더욱이 전선공작에서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네 여동지들의 헌신적 노력이었다. 고국을 버리고 친족을 버리고 현대적인 생활의 안일을 떠나 이역만리 이 산중에서 우리들 사내에게 지지 않고 똑같이 무장의 늠름한 자태로서 조국혁명을 위하여 용감히 싸우는 이 여동지들!

우리는 끝없이 감루를 흘리었다. 이 여동지들도 우리들과 행동을 똑같이 하는 일방 공작으로 보아선 우리들 몇 갑절의 힘을 쓰고 있다. 솥, 밥그릇을 싸가지고 밥도 지어야 하고 그 여러 동무들의 빨래도 해야 하고 어두운 밤 흐린 등잔불 밑에서 버선짝도 꿰매야 하고 도무지 그 고생이란 상상도 하기 어렵건만, 이것도 우리의 투쟁의 한 토막이라는 신념 밑에 조금도 귀찮은 기색도 보이지 않고 언제나 웃는 낯으로 동지를 대하고 꾸준히 일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신조선보> 1945.11.07.


진보적인 독립동맹의 활동, 의용군은 항일전에도 활약
– 김태준(金台俊) 씨의 연안현지보고

작년 11월 일본 관헌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경성을 떠나 금년 4월에야 중국 연안에 도착하여 망명생활을 보내던 중 지난 8월 9일에 일본이 소련에게 항복을 신청했다는 정보를 듣고 귀국준비를 급히 하여 연안을 출발, 매일 7, 80리를 걷고 금주에서 겨우 기차를 타고 만주에 잠시 체재하다가 수일 전 해방된 고국에 돌아온 전 경성대학 강사 김태준 씨는 시내 모처에서 왕방(往訪)한 기자단에게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귀중한 현지보고를 해주었다. 그 내용은 중국 각지에서 항일 10여 년의 혈투 역사를 가진 우리 조선인 투사들로 조직된 조선독립동맹 역시 중국 각 지역에서 항일전에 종사한 역사를 가진 수만의 조선의용군 등 연안을 중심으로 중국 각지에서 진정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대일항전에 시종한 우리 선배 투사들이 현재 귀국 도중에 있다는 것을 보고해준 것인데 그 개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안에 있는 조선독립동맹이라는 것은 1937년 7월 7일 장개석(蔣介石) 씨가 일본에 선전포고한 이후 중국 각지에 있는 우리 조선인이 의용대를 조직하여 각지에서 싸우다가 항일 10년에 전부 연안으로 모여 이 집단이 구성된 것이다. 외국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조선인 자신의 손으로 조선을 해방하자는 주장을 내세우고 이때부터 혁명적인 집단이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국외에 있는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정권인 것이다.

독립동맹의 주장은 ①조선민족은 통일 단결하여 완전 독립국가를 위하여 싸우자 ②일본의 잔여세력을 숙청하자 ③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고 민중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자 ④진보적 민주주의 건설단계에 즉응할 새 문화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표어를 내걸고 독립동맹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그 지도자로서는 가장 정당한 노선을 걷고 있는 박일우(朴一禹) 씨(중국 공산당에서 가장 지지한다)를 위시하여 안창호(安昌浩) 씨 밑에서 싸우던 김두봉(金枓鳳) 씨며 조선의용군을 창건한 김무정(金武亭) 씨 등 우수한 인물들인데 이들이 방금 귀국 도중에 있다. 이들은 국내의 진보적인 인민공화국을 절대 후원할 줄로 믿는다.

다음 조선의용군은 중앙 팔로군에 큰 공적을 가진 김무정 씨가 창건한 것인데 중국 각지의 광대한 지역에서 10년간 항일전에 종사하던 간부들이 연안에 모여 그동안에 수많은 청년간부를 양성하였고 최근에는 중국 만주 일대에 있는 조선동포의 자제 중에서 군인 희망자를 뽑아서 이 의용군을 편성한 것인데 그간에 과학적이요 혁명적인 군사훈련을 해온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 자신의 손으로 해방해야만 할 것이므로 조선이 독립되는데 민중을 위하여 꾸준히 싸워줄 유일한 군대일 것이다. 군사기밀인 관계로 확실한 숫자는 모르지만 현재 병력이 5, 6만 이상이 될 것은 사실이며 또 그 민중적인 기반은 참으로 견고할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연안에 가서 중국 수억 민중의 이익을 옹위하여 싸우는 중공 팔로군의 애국적이요 희생적인 정열과 자기비판의 태도로 새로운 문화건설 등을 실지로 보고 배운 바 컸었는데 제일 놀란 것은 팔로군은 훈련의 여가에 농사도 짓고 하여 의식생활을 자작자급하는 것이었다. 그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기가 쓸 것은 자기 손으로 생산하려는 것이다. 모택동(毛澤東) 씨도 친히 농사를 짓고 있다.

나도 있는 동안 농사를 지었다. 최근 장개석(蔣介石) 씨의 특사가 연안에 와서 국공합작에 대한 토의를 한 일이 있는데 이들은 팔로군과는 반대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실정을 목도하고나서 10년 후면 중국은 팔로군의 천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흥 인방(隣邦)의 배울 점을 우리 것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끝으로 나의 사감(私感)을 말하면 우리 동포는 먼저 단결하고 인민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자는 것이다. 멀리 이순신 장군을 비롯하여 이재유(李載裕) 씨 등과 같은 애국적이요 희생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인민을 위하여 그의 이익을 위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싸워야 한다. 나의 힘이 부족하다고 남의 힘을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김옥균(金玉均) 씨는 일본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었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우세한 일본의 힘에 도리어 이용되고 만 것이다. 혁명적이요 과학적인 이론과 민중의 기반이 없이 공허한 자리에 앉는 것은 만주국 황제와 같은 말로를 밟을 뿐이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역사로 보더라도 해방은 그 나라 그 민족의 자신의 힘만으로 될 것이요 남의 힘을 빌려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에는 반드시 정당한 노선이 있어야 할 것이므로 긴급한 것은 과연 누가 가장 조선인민을 위하여 그 이익을 대표하여 싸워주겠느냐 하는 것이다. 싸워온 연대와 개인적인 문제만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의 존중과 무원칙한 맹종은 절대적인 잘못이다. 정당한 노선이 있으면 따라갈 것이다. 잘못이 없으면 따라갈 것이요, 잘못이 있으면 이를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중앙신문> 194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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