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동진
일제가 얼마나 황당한 이유로 한국인들을 탄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정수반인 반일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 김기섭에게 징역형이 선고된 사실이 그중 하나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부 포상 결정문인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1891년 함흥에서 출생한 김기섭은 함흥장터 1919년 3·1운동 사건의 주역이다. 이 때문에 징역 8개월을 살고 석방된 그는 목사 생활을 하다가 또다시 체포돼 1944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에 인용된 위 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김기섭을 심리한 재판부는 “기독을 수반으로 한 천년왕국의 건설에 의해 우리 국체를 기독교리에 의해 통치하도록 하는 국체변혁의 목적을 가지고”라는 말로 김기섭의 정치적 성향을 규정했다. 그리스도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천년왕국을 세우고자 체제 변혁을 꾀한 인물로 정의했던 것이다.
그런 뒤 김기섭의 설교 중에서 “기독교를 독실히 믿는 자만이 천년왕국의 백성이 되어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므로 우리들은 더욱더 신앙을 독실하게 하여야 한다”는 부분 등을 근거로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독립운동 경력자라는 점이 고려되긴 했지만, 이 사건에서는 목사의 설교 자체가 유죄의 핵심 증거가 됐다. 재판부는 김기섭의 설교 중 하나님의 왕국을 일본제국 영토에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선동’으로 간주했다.
예수를 끌어들여 일본제국에 맞서려 했다는 이유로 유죄가 선고된 이 사건은 일제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한국인들을 억눌렀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런 이유로 재판을 열어 처벌해야 했을 정도로 한국인들을 두려워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사건에서 재판장 사사키 요시히사 함께 재판에 참여한 인물이 한국인 판사 강동진이다.
친일 판사들은 법관석에 앉아 봉을 두드리는 소극적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이들의 존재는 일제 식민지배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제 순사들이 한국인들을 잡아다 때리고 가둔 뒤 몇 달 뒤에 풀어준다면,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은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인된 법률 전문가가 ‘이들의 행위는 유죄이며 징역형을 가해야 한다’라고 선고하면, 그 같은 저항이 줄어드는 동시에 일제 국가권력의 폭력성이 합리화된다. 재판부에 한국인 판사가 끼어 있다면 그 효과는 더 배가될 수 있었다. 일제 입장에서 볼 때, 강동진 같은 친일 판사들의 효용성은 그런데 있었다.
일제의 한국인 탄압 실천했던 판사
강동진은 일제 강점 5년 뒤인 1915년 12월 16일 평안북도 박천에서 출생했다. 그의 프로필에서는 군더더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법관이 되기 위한 최단 코스를 밟았다는 느낌이 든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29년 3월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공립보통학교를, 1935년 3월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939년 3월 졸업했다”라고 한 뒤 24세 때인 “이해 11월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라고 설명한다. 한국인의 사법시험 합격이 지금보다 훨씬 어렵던 시절에 24세 나이로 합격했던 것이다.
그 뒤 강동진은 1940년에 광주지방법원 사법관시보가 되고 1941년에 광주지방법원 예비판사가 됐다. 1942년에 광주지방법원 판사가 되면서 일제강점기 마지막 5년간을 일제 판사로 활동했다.
이 기간에 그는 김기섭 재판 같은 시국사건에 참여해 유죄를 선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참여한 재판에서 얼마나 황당한 이유로 유죄 판결이 나왔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주봉식 사건이다.
강동진보다 1년 빠른 1914년생인 주봉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광주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 뒤 권투도장 등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던 그는 1944년 1월 24일에 또다시 체포됐다.
이때의 체포 사유는 상당히 엉뚱했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9권은 “광주 시내 소재 카페의 여급이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격분하여 ‘한국인은 한국어를 써야 한다’고 질책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설명한다. 카페 직원에게 왜 한국어를 안 쓰냐고 항의했다가 붙들렸던 것이다.
주봉식 사건은 광주지방법원에 있는 2개의 재판부에 배당됐다. 한쪽은 민족의식을 고취한 부분을 담당하고, 또 한쪽은 한국어 사용 부분을 담당했다. 강동진은 민족의식 부분을 다루면서 주봉식의 과거 행적으로부터 유죄의 증거를 찾아냈다. 강동진이 참여한 재판부는 1943년 1월 18일 징역 2년을 선고했고, 같은 날 또 다른 재판부는 한국어 권장 혐의를 이유로 주봉식에게 징역 8월을 선고했다.
강동진은 합의부 사건뿐 아니라 단독으로 재판한 사건에서도 일제의 한국인 탄압을 실천했다. 1943년 3월 9일 굴 판매업을 하는 김준호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례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전남 고흥반도에 사는 김준호는 북쪽 곡성군의 읍내 상점에 들어갔다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고흥군 식량 사정을 설명했다. “10일에 한 되의 배급미는 죽도 못 끓여 먹어 고흥군은 물론 장흥군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판사 강동진은 “시국에 관한 조언(造言)비어를 한 자”라는 이유로 벌금 50원을 선고했다.
1940년 5월 27일 자 <조선일보>에는 박봉 생활자들이 한옥 월세 30원이나 40원을 감당하기 힘들어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기사를 감안하면, 김준호에게 부과된 벌금 50원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한국인들을 괴롭히고 탄압하는 일에 가담했으니, 강동진 같은 판사가 친일파로 규정되는 것은 마땅하다.
해방 뒤에도 재산과 법조인 지위 보존
강동진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이듬해인 1940년부터 일제의 봉급을 받았다. 그로부터 5년간 친일 활동의 결과로 월급을 받았으니, 그 기간에 쌓인 재산은 친일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재산은 물론이고 그 지위도 1945년 8·15 해방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38선 이남의 질서 유지에 급급했던 미군정이 한국인 법조인들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해방 이전보다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도입하려 했던 법관 선거제 같은 것도 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한국인 법조인들이 볼 때, 해방은 일본인 상급자들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기회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강동진은 해방 4개월 뒤인 1945년 12월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옮겨갔고, 35세 때인 1947년 1월 대전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됐다.
1948년에 출범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도 강동진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다른 분야에 비해, 법조인들은 반민특위의 영향을 덜 받았다. 이런 분위기는 일제에 협력해 취득한 그의 재산은 물론이고 그의 법조인 지위가 무사히 보존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이듬해에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초에 인민군에 붙들린 그는 사상 개조를 위한 납북자 행렬에 끼게 됐다. 고향 쪽을 향하는 이 행렬에서 그는 뜻밖에도 반란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때 납북돼 북한 상업성 부장 등을 역임한 뒤 남한으로 돌아와 내외문제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조철의 수기에서 “강동진 변호사”의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4월 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철 수기 ‘죽음의 세월’ 제4편은 강동진이 포함된 납북자행렬이 황해도 재령군에 머물렀을 때의 사건을 소개한다. 방공호를 파다가 동료 수십 명과 합세해 경비원을 구타한 일로 인해 10일간 영창에 구금됐다 풀려난 강동진은 1950년 9월 하순에 동료 60여 명과 함께 도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계획을 주도한 세 사람 중 하나였다.
수기에 따르면, 강동진은 9월 말 어느 날 자정쯤에 동료 60여 명과 함께 인민군 경비병 2명을 목 졸라 죽인 뒤 도주를 개시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순찰 중인 인민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인민군 경비대의 총동원으로 현장에서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고 수기는 말한다.
이때 붙들린 강동진은 일행으로부터 격리됐다. 조철 수기는 “다음날 주모자 3명과 그 외 20명이 포박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라며 “그 후 그들의 소식은 감감하게 되고 말았다”라고 증언한다.
김종성 기자
<2022-10-02>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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