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박상준
부처님과 예수님까지 팔아 친일한 사람들도 있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봉은사 주지였던 홍태욱은 범종과 불구 등을 떼어내 일본에 헌납했고, 해주제일교회 목사였던 김응순은 교회 종과 철문 등을 떼어내 일제에 바치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런 인물이 유교에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 대제학에 해당하는 일제 치하의 경학원 대제학 박상준도 그런 부류였다. 성균관은 대학의 기능과 함께 공자 사당의 기능도 수행했다. 일제 때 경학원으로 불린 이곳에서 박상준은 제사 용구를 걷어내 군국주의 전쟁에 바쳤다. 1944년 4월 발행된 경학원 기관지 <경학원잡지> 제48호에서 그의 반민족적·반유교적 행위를 확인할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6권에 인용된 <경학원잡지> 기사는 “(1943년) 8월 5일 박택(朴澤) 대제학과 이경식 사성이 헌납 제기 계(計) 372점, 중량 310관(貫) 300문(匁)에 대한 목록을 해군 무관부에 제출했으며, 익(翊) 6일 오후 2시 박택 대제학, 도변(渡邊) 고문 및 이경식 사성이 현품을 헌납했다”고 설명한다.
창씨개명으로 박택상준이 된 박상준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인 와타나베 도요히코(渡邊豊日子), 경학원 사성인 이경식과 함께 성균관 제기들을 일본 해군에 헌납했다. <경학원잡지>는 성균관에 있던 제기 전부를 다 바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유교를 이끄는 인물이 공자님의 물건을 제국주의 전쟁에 헌납했으니, 민족 차원을 떠나 종교 차원에서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일제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성균관 제기 헌납은 식민지 교육 책임자인 와타나베 도요히코 학무국장까지도 반대했다고 밝혔다. 그런 일을 박상준이 강행했던 것이다.
이름에 붙은 코(子) 때문에 여성으로 오해될 수도 있는 와타나베는 82세 때인 1967년 9월 21일 ‘조선총독부 회고담’을 구술했다. 여기서 그는 ‘지방 문묘에 있는 금속 제기만 거두고 성균관에 있는 것은 그냥 놔두자’는 것이 자기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조선총독부 회고담’에서 와타나베는 “당시의 경학원 대제학 박택상준이 자신은 학문도 문벌도 없는데 총재에 세워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모두 내놓게 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박상준이 성균관 책임자에 임명된 데 대한 은혜에 보답하고자 공자 사당의 제사 용기를 바치고자 했다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1940년 10월 대제학 취임 당시 박상준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근본 정신을 발휘하여 도와 덕과 그 외 온갖 윤리적인 것을 생활화, 즉 실천궁행해야 할 것이 그 첫째외다”라고 발언했다. 공자의 가르침인 <대학>에서 강조되는 수기(격물·치지·성의·정심)와 치인(제가·치국·평천하)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렇게 공자의 가르침을 중시한다던 인물이 공자님의 물건을 하필이면 군국주의 전쟁에 헌납하는 모순을 범했다.
‘대일 충성도’가 승승장구의 배경
박상준은 성균관 책임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의 인생 궤적은 성균관과 거리가 멀었다. 일본에 의한 시장개방 이듬해인 1877년 3월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출생한 그는 대한제국 농상공부 산하의 전보사(電報司)에서 전기통신업무를 관장하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1세 때인 1898년 평안도 안주전보사 견습생이 된 그는 1900년에 간부급인 금성전보사 주사가 됐다. 이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26세 때인 1903년에 퇴직한 그는 4년 뒤 고향에서 사립 동명학교 교감 겸 교사가 됐다.
전보사를 그만두고 공직을 퇴직한 뒤 서른 살에 사립학교 교원이 된 것이 그의 위상을 크게 바꾸었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교사가 된 이듬해에 그는 군수가 되어 공직으로 복귀했다. 1908년에 평안도 강동군수가 됐고,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도 군수직 역임은 이어졌다. 1910년 그는 안정적인 승진 코스를 밟아갔다.
44세 때인 1921년, 그는 부지사에 상당하는 평안남도 참여관이 됐다. 5년 뒤인 1926년에는 강원도지사가 됐다. 그 뒤 함경북도 지사 및 황해도 지사에 이어 1939년에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 자리에 들어갔다. 그런 뒤 1940년에 문제의 경학원 대제학이 됐다. 유교와 무관한 일을 하다가 대제학이 됐기에 “학문도 문벌도 없는데 총재에 세워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성균관 제기들을 바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학문도 문벌도 없는’ 그의 승승장구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1945년에는 일본 상원인 귀족원 의원에까지 진출했다. 현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에 의해 상원 의원으로 임명됐던 것이다. 학문·문벌보다 더 중요한 ‘대일 충성도’가 이 같은 승승장구의 배경이었다.
그가 역임한 또 다른 유형의 직책들도 있다. 일제가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을 침략전쟁에 동원할 목적으로 만든 국민총력조선연맹·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 등에도 가담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평시뿐 아니라 전시에도 보조하는 데 참여했던 것이다.
박상준은 33세 때인 1910년부터 일제의 밥을 먹었다. 군수·참여관·도지사를 거쳐 중추원 참의와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면서 일제 지배 36년 동안에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가 <조선총독부관보>를 토대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그는 1913년·1915년·1917년·1925년·1926년·1929년·1935년에 일본 정부의 훈포상들을 받았다. 이 같은 일제의 ‘인증’은 그가 안정적으로 친일재산을 쌓아가는 데 밑바탕이 됐다.
더 높이 나는 친일파
일제에 부역해 안정적 삶을 영위하는 것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1919년 3·1운동 시기에 나온 그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김도형 계명대 교수의 기고문 ‘박상준: 불가능한 독립 대신 행복한 식민지 택한 확신범’에 따르면, 그는 평안도 순천군수 재임 당시에 쓴 ‘민심의 수무선도(綏撫善導)에 관하여’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훌륭한 삶의 방식을 제안했다. 그것은 일제에 맞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일본에 기대어 일본제국 만세를 부르는 삶이었다.
성난 민심을 달래고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발표한 이 글에서, 그는 식민지 한국은 일본의 지배 덕분에 이익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 뒤에 평양에서 2층집들이 늘어난 사실을 떠올려보라고 역설했다.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그는 일제 식민지배를 찬미하는 대목에서 “평양 시내에 수백 채의 이층집이 들어”선 사실을 거론했다. 그 이층집에 누가 거주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이층집이 늘어난 사실만을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역설했던 것이다.
‘민심의 수무선도에 관하여’에서 그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어른의 도움 없이 일어설 수 없듯이 식민지 한국 역시 일본의 도움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일본 없이는 살 수 없으니 만세운동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가 자기 인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경험한 박상준은 식민지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살았다. 그는 일제 말기에는 강제징병을 적극 찬양하는 방법으로 그런 감사를 표시했다.
일제가 한국에까지 강제징병 정책을 실시한 1943년 8월 1일, 그는 감격에 겨워 마지않았다. 다음날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 2면 중간에서 66세 된 얼굴 사진과 그의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실린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적인 8월 1일 이날을 마지하야 감사 감격하는 바가 만타. 첫째로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에 감사를 드린다. 이번의 징병제 실시도 2천 5백만의 신민(臣民)에게 내려주신 광대무변한 성은의 결과다. 우리는 이 명예로운 징병제의 실시로 인하야 반도의 청소년도 이제는 완전히 제국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황국을 위하야 충성을 다할 날이 왓슴을 기뻐하는 동시에 일시동인의 성은을 기피 감사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일왕이 한일 양쪽을 하나같은 눈길로 바라보고 어진 마음을 동일하게 베풀어준 결과로 8월 1일부터 역사적인 한국인 징병제가 실시됐다고 감격해했다. 그러면서 ‘성은이 망극하다’는 마음을 표시했다. 식민지 한국 청년들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성은’을 기피하고자 했지만, 박상준은 그 성은에 대해 “기피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박상준은 한국 민중이 일본을 위해 희생하도록 유도하는 대가로 자신의 기득권을 확대·강화한 친일파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제국주의와도 손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자님은 물론이고 한국 청년들까지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이기적 모습을 그의 기고문에서 읽을 수 있다.
박상준은 중추원 참의를 넘어 일본 귀족원 의원까지 됐다. 중추원에는 친일파의 중추적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 중추원을 넘어 귀족원에까지 들어갔다. ‘뛰는 친일파’ 위에 ‘나는 친일파’가 있다면, 그는 ‘나는 친일파’들 중에서도 ‘좀 더 높이 나는 친일파’였다.
김종성 기자
<2022-10-10>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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