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효창공원이 보여주는 오늘의 현실
만시지탄이지만, 지난 2019년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효창공원을 ‘독립운동 기념 공원’으로 재단장하기로 의결했다. 운영 주체가 서울시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동네의 근린공원처럼 인식되던 곳이 내로라하는 역사 유적이자 성역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현재 독립운동가들은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과 대구의 신암선열공원 등에 모셔져 있다. 임시정부 요인 묘역과 독립유공자 묘역을 따로 조성해 군인과 경찰, 사회유공자들이 안장된 곳과는 공간을 분리했다. 묘역의 면적과 봉분의 크기도 여느 묘소보다 넓고 크다.
모셔진 독립운동가는 몇 분 안 되지만, 역사적 위상과 명망으로 치면 여느 묘역에 비할 바 아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과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의사와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세 분의 임시정부 핵심 요인이 잠들어 있다. 아울러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세 분의 의사 곁에 조성되어 있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를 포함해 효창공원에 잠든 여덟 분의 독립운동가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조차 누가 된다. 그들을 빼놓고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단 한 줄도 서술할 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구와 윤봉길의 인지도에 다른 분들이 왜소해 보일지언정 그들의 이름을 생소해할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다.
그런데도 묘가 조성된 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효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거칠게 말해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욕보이는 짓이다. 역사적 위상을 공인받아 1989년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면, 마땅히 이름부터 손봐야 했다. ‘공원’ 앞에 ‘독립’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참고로, 효창공원은 18세기 말 조선 정조 재위 때 어린 나이에 요절한 문효세자의 무덤을 조성하며 효창원이라는 이름을 처음 얻었다. 이후 문효세자의 친모인 의빈 성씨 등이 차례로 모셔지며 묘역의 규모가 커졌다. ‘원(園)’은 세자와 세자비, 후궁 등을 모신 무덤을 일컫는다.
일제강점기에 효창원은 일본군의 숙영지로 사용됐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주둔했던 용산 지역과 인접한 데다, 묘역이 넓고 숲이 울창해 낙점한 것이다. 이후 일제는 태평양 전쟁의 전몰자를 기리는 충혼탑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조선 왕실의 무덤을 서울 외곽으로 이장한 뒤 공원으로 조성했다.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이듬해 윤봉길 등 세 분의 의사를 봉환해 효창공원 터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김구 자신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져 자신이 모신 세 분의 의사 곁에 묻혔다. 나라 안에 독립운동가의 묘역이 정비되기 전인 당시 효창공원은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성소가 된 것이다.
‘성소’에서 ‘동네북’으로
하지만 일제의 잔재인 ‘공원’이라는 정체성은 되레 점점 강화됐다. 일제가 효창원이라는 조선 왕실의 묘역을 일본군의 숙영지와 공원으로 난도질했듯, 해방 후 권력자들 역시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들이 잠든 성소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 때까지 온갖 생뚱맞은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독립운동가들의 묘 주변에 집적대듯 세워졌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들을 선양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성역화했을 법도 하건만, 이승만 정권은 효창공원의 역사성을 철저히 외면했다. 되레 6.25 전후 복구 사업이 한창이던 1950년대 말 독립운동가의 묘를 겁박하듯 육중한 콘크리트 건축물을 세웠다. 효창운동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으로서,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는 운동장이다. 스포츠 역사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부정할 순 없지만, 왜 하필이면 효창공원을 막아선 자리에 세워야만 했을까. ‘독립운동사의 라이벌’ 김구에 대한 대통령 이승만의 몽니였다고 한다면 억측일까.
지난 2019년 ‘독립운동 기념 공원’ 조성 계획이 발표되면서 효창운동장의 철거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도 했다. 찬반 여론이 팽팽히 맞서면서 오랜 갈등 끝에 리모델링으로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당시 축구인들의 반대 논리가 독립운동가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축구의 역사를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승만에 의해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애꿎게 독립운동가 유족과 축구인들의 갈등을 일으킨 셈이 됐다. 효창공원의 수난사를 안다면, 백범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봉창 의사의 동상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마치 효창운동장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도 효창공원은 ‘동네북’ 신세였다. 공원 안 손바닥만 한 빈터만 있어도 마구잡이로 기념물을 세웠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원효대사의 동상이 세워진 것도 그즈음이다. 당대의 고승으로서 기억할 만한 위인이지만, 독립운동가가 묻힌 이곳에 터 잡을 이유는 없었다.
굳이 관련성을 찾는다면, 효창공원에 인접한 간선도로의 이름이 ‘원효로’라는 점뿐이다. 물론, 도로명 또한 원효대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의 업적을 기릴 의도였다면, 차라리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산인 조계사 경내가 제격이다. 조계종이 설립한 동국대학교 교정이라면 더욱 맞춤했겠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는 법, 우후죽순 곳곳에 역사 인물의 동상을 세우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는 이유를 대기도 한다. 그래도 그렇지 독립운동가의 묘소 곁 고승의 동상은 생뚱맞다 못해 황당할 따름이다. 모셔진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경외한다면 감히 범할 수 없는 행태다.
효창공원이 보여주는 현실
압권은 효창공원의 맨 윗자리에 우뚝 선 ‘반공 투사 위령탑’이다. 탑의 크기도 크기지만, 탑이 자리한 위치가 억측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독립운동가들 묘소와 영정을 모신 사당을 발아래 두고 내려다보는 자리에 세워져 있어서다. 위치만 놓고 보면 효창공원의 주인이다.
“해방의 기쁨에 젖어있던 겨레를 속박하며 조국의 북녘땅을 강점한 붉은 침략 마수와 맞서 투쟁을 벌이다가 무참히 쓰러진 자유 투사들…”
탑비에 새겨진 글귀가 섬뜩하다. 하긴 ‘반공이 국시’였던 엄혹했던 시절 이런 내용을 담은 비석은 전국 각지에 흔했다. 1969년 10월 19일이라는 건립 일자를 보니 세워진 시기도 절묘하다. 영구 집권을 획책하며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날로부터 꼭 이틀 뒤다.
“나라의 통일 독립과 겨레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시다.”
위령탑의 맨 아래에 새긴 글귀에서 ‘통일’과 ‘독립’, ‘자유’와 ‘반공’이 마치 동의어인 양 뒤섞인다. 반공을 부르대며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던 참담했던 역사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극단적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회의 간부였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친일파가 빨갱이 아닌가요?”
간혹 몇몇 아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반공 투사로 인식되는 현실에서 김일성도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면 그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공산주의 독립운동을 마치 형용모순처럼 여기는 아이들이 여전히 많다. 그 이유를 위령탑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효창운동장에서 시작해 반시계 방향으로 난 외곽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원효대사 동상과 반공 투사 위령탑을 차례로 만난다. 세 건축물이 독립운동가 여덟 분의 묘소와 사당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친일파의 후예들이 득세하고 되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현실을 효창공원이 보여주는 듯하다.
<2022-10-1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묘소는 왜 이 건축물들에 포위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