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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전현충원에 묻힌 1920년생 두 사람의 대조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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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부터 곽낙원 지사까지…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제5회 평화둘레길 걷기

▲ 제5회 이야기가 있는 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가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개최되었다. ⓒ 임재근

지난 2018년 처음 시작된 ‘이야기가 있는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가 지난 16일 5회를 맞았다.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묘를 찾아다니며 해설사로부터 그 묘역에 안장된 인물의 삶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행사다.

평화둘레길 걷기에 앞서 진행된 개회식에서 박규용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공동대표는 “이번 행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민족을 위해서 앞서 갔던 분들의 얼과 정신을 본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이어 “독립운동을 나섰던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잡아갔던 이들 또한 묻혀 있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사를 공동주최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박해룡 지부장도 “그 나라를 알고 싶으면 국립묘지를 가보라고 하는 말이 있다”며 “우리 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 지금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추도엽 유성겨레하나 공동대표는 국립묘지에 친일파가 안장되게 된 근본적인 이유로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을 꼽았다. 이외에도 유성지역연구소와 겨레한마음봉사단도 공동주최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제5회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는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집중했다. 개회식이 진행된 장소가 독립유공자 제3묘역 홍범도장군 묘역 앞이었던 만큼 첫 번째로 소개된 인물은 홍범도(독립유공자 3-917)이었다.

1920년 6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시킨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장군의 지휘 아래 독립전쟁의 첫 승리를 이룬 전투였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독립을 맞이하기 전인 1943년 10월 25일에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묻혔다.사망 후 78년 만인 지난해 8월에 그의 유해를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와 안장되었다.

이날 걷기 행사에 참석한 오광영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는 “현충원은 거대한 역사교과서”라며, “현충원평화둘레길 걷기행사가 홍범도장군 묘역이 있어 더욱 알차졌다”고 말했다.

▲ 을미의병 효시의 주인공 문석봉(독립유공자 2-168) 애국지사의 묘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 임재근
▲ “임시정부 어머니’라 불리는 곽낙원(독립유공자 2-771) 애국지사의 묘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 임재근

이들은 홍범도 장군 이외에도 을미의병 효시의 주인공 문석봉(독립유공자 2-168)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어머니’라 불리는 곽낙원(독립유공자 2-771) 애국지사, 부민관 폭탄의거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조문기(독립유공자3-705) 지사의 묘도 찾았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기폭제로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그 효시가 바로 유성장터에서 창의한 유성의병이었다. 유성장터는 대전현충원과 불과 3k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이다.

곽낙원 지사는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독립운동가였다. 곽 지사의 해설을 맡은 박소현 해설사는 “백범이 민족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라며 “특히 애국장이 추서된 곽낙원 지사의 경우는 단지 백범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명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부민관 폭탄의거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조문기(독립유공자3-705) 지사의 묘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 임재근

부민관 폭탄의거는 1945년 7월 24일에 결행한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이다. 정치깡패 친일파 박춘금이 ‘대의당’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하면서 경성 부민관에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를 열었을 때,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3인은 합심하여 연단 밑에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을 설치해 연설 도중 터트린 의거를 거행했다.

의거가 성공하면서 조문기 선생을 포함한 애국지사들은 곧바로 전국에 수배가 되었지만, 다행히 8월 15일에 해방이 되어 의열투쟁에 나선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조문기 지사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유만수 애국지사는 독립유공자 2묘역 156호에, 강윤국(본명 강백) 애국지사는 독립유공자 4묘역 148호에 안장되어 있다.

▲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지만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장군 2-555)의 묘 앞에서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 임재근

이날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에서 찾은 곳 중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묘역이 아닌 곳은 장군 제2묘역이었다. 장군 제2묘역에서 이들은 찾은 곳은 백선엽(장군 2-555) 장군의 묘였다.

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한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의장을 지냈다.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다. 백수를 누리다 2020년 7월 10일에 사망한 그는 7월 15일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면서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활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이유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

대전현충원 안장자 검색에서 백선엽을 검색하면, 비고란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현행 국립묘지법상 대장으로 예편한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지만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이 된 김준엽(독립유공자 4-397)의 묘 앞에서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 임재근

백선엽의 묘에 이어 찾아간 묘는 김준엽(독립유공자 4-397)의 묘였다. 1920년생 백선엽과 동갑내기였던 김준엽의 삶은 백선엽과는 정반대였다. 김준엽 선생은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집되었지만 일본군을 탈출했다.

학도병으로는 처음으로 탈출한 ‘학도병 탈출 1호’였다. 이후 그는 광복군이 되었다. 백선엽과 김준엽에 대한 해설을 맡은 김요한 해설사는 “1920년 생 두 사람은 극명하게 다른 인생을 살았다”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제5회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걷기 행사에서 해설을 맡은 이들은 지난 8월부터 유성구자원봉사센터와 겨레한마음봉사단이 양성한 해설사들이다. 해설사 육성에 나선 김선재 겨레한마음봉사단 사무국장(유성지역연구소 소장)은 “대전 현충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바쳐 싸우신 독립운동가의 과거가 있지만, 이곳을 찾는 현재의 우리가 있고 독립운동가가 그토록 염원하던 미래의 한반도가 있다”며 “그 미래는 곧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걷기 행사를 마친 이들은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서 묘비 닦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 이날 걷기 행사는 독립유공자 제2, 3, 4묘역과 장군 제2묘역 등 약 2km 정도를 걸으며 진행되었다. ⓒ 임재근

임재근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통일뉴스에도 실립니다.

<2022-10-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전현충원에 묻힌 1920년생 두 사람의 대조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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