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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기괴한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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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석원

▲ 김석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사익은 일본제국 군대에서 육군 중장까지 진급했지만, 이는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1914년에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주로 군사행정이나 대민사업 분야에 근무했다. 일제가 그를 부각시킨 것은 1919년 3·1운동의 충격 때문이었다. 식민지 한국인도 평등하게 대해준다는 이미지를 조성하고자 일제가 그를 계속 승진시켰던 것이다.

홍사익의 일본 육사 1기수 후배인 김석원은 홍사익보다 낮은 대좌(대령) 계급으로 제대했지만, 홍사익을 훨씬 능가하는 전공을 기록했다. 제20사단 제78연대 장교로 서울 용산에 근무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에 투입된 대위 김석원은 제78연대 기관총대 대장으로 상당한 전과를 남겼다.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릴” 듣고 싶었던 사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에 인용된 김석원 자서전 <노병의 한>에 따르면, 만주로 파견된 그는 “기왕 군인이 된 바에야 무엇을 하더라도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릴 들어야 한다”는 목표 하에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영화 같은 전투 현장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심양·장춘을 거쳐서 치치하얼까지 전전하였는데, 당시 신문 기자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말 빗발치듯 하는 탄우(彈雨) 속에 몸을 드러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한 뒤 “기관총대장으로서 나의 진두지휘는 그때 상당한 성가(聲價)를 얻은 결과로 일금 7백원이라고 하는 논공행상금을 받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친일파 박흥규(1888~1957)가 실권은 별로 없지만 오늘날의 국회의원에 상응하는 중추원 참의직을 수행하면서 만주사변 전년도인 1930년에 받은 연수당이 600원이다. 대위 김석원이 받은 상금의 가치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자서전에 언급된 그의 ‘성가’는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층 더 올라갔다. 서울 용산으로 돌아와 근무하다가 이때 다시 침략전쟁에 투입된 그는 이 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영웅 반열에 들어섰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석원 편은 “중국 베이징 부근에서 벌어진 남원(南苑) 전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중국군 1개 사단과 교전하여 남원행궁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자 중일전쟁의 영웅으로 선전되었다”라고 설명한다.

김석원은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대적할 수 없다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란 말을 무색케 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의 작전 및 부대 운용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사익만큼 진급하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일본인보다 잘한다는 소릴” 듣는 식민지 한국인이었다.

김석원이 장군 계급장을 단 것은 해방 이후였다. 일제 패망 뒤 육사 특임 8기를 졸업하고 대령으로 임관한 그는 한국전쟁 전년도인 1949년에 준장이 됐다. 소장이 된 것은 1956년에 예편 명령을 받으면서였다.

그 뒤 그는 정치권에 들어가 1960년 서울 영등포에서 무소속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 경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육사 후배가 일으킨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위한 영웅서사시

▲ 성남고 교가 ⓒ 성남고

김석원이 태어난 것은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5개월 전인 1893년 9월 29일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의 출생을 영웅 서사시처럼 묘사한 노래가 있다.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을 ‘원석’으로 통칭하는 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먼동이 트이니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이 나셔서
배움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이 노래가 불리는 곳은 서울 동작구 성남고등학교다. 2019년 2월 26일 전교조 서울 지부가 ‘학교 내 친일 잔재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거론됐던 학교다. 이 교가는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다.

‘먼동이 트이고 온누리 환할 때 환한 이 강산에 태어난’ 김석원이 일본군 장교가 되는 과정과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니다가 1909년 7월 일제에 의해 무관학교가 폐지되자 9월 일본 육군 중앙유년학교 예과 2년에 편입했다”라면서 “1913년 5월 중앙유년학교를 마친 후인 1913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5월에 제27기로 졸업했다”라고 설명한다.

그 뒤 김석원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지만, 선배 홍사익만큼 진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제로부터 받은 물질적 대가는 홍사익이 받은 것을 훨씬 능가했다. 홍사익은 필리핀에 파견돼 포로수용소장을 역임한 일로 인해 1946년 연합군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은 데 반해, 김석원은 일제로부터 받은 것을 기초로 해방 뒤에도 남한 땅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김석원이 일제로부터 받은 것은 1915년 소위 임관 이후의 월급뿐만이 아니었다. 만주사변 전공으로 받은 상금 700원 뿐만도 아니었다.

그가 받은 것은 훨씬 값비싼 것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이 나셔서”라는 노래가 서울 시내에 울려 퍼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받은 것 중에 가장 값나가는 것은 사립학교 설립권이었다.

김석원이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을 설립한 시점은 1938년이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이 시점에는 식민지인의 사립학교 설립이 쉽지 않았다. 사립학교를 기반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의 우려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석원이 학교 설립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광산업자인 원윤수의 자금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떼쓰기 같기도 하고 응석 같기도 했던 김석원의 읍소가 훨씬 더 결정적인 한 방이 됐다. 1993년에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임중빈 인물연구소장의 기고문 ‘김석원: 일본 군국주의의 화신, 가네야마 대좌’는 계급이 소좌였던 1937년에 김석원이 했던 읍소를 이렇게 소개한다.

“천하무적임을 뽐내던 가네야마 소좌는 그러나 일본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는 마당에 학교 설립의 뜻을 관철하고자 떼를 쓰기도 하였다. 일제로부터 받은 전승 포상금 700원과 그의 친구 원윤수의 기금으로 성남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신청서를 내놓고 있었지만 총독부 당국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학이 설립되면 민족의식이 고취된다고 하여 좀처럼 허가해주지 않고 있던 때였다.”

친일파와 사학재단

▲ 1955년 9월 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서울 성남중학교 교장 시절의 김석원 모습 ⓒ 동아일보

중학교 급인 성남고등보통학교는 1926년에 조양학원으로 개교했다가 중일전쟁 이듬해에 원석학원으로 넘어갔다. 김석원은 이 학교를 소유하기 위해 ‘죽으러 가는 군인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총독부에까지 로비를 벌였다. <친일파 99인>은 이렇게 말한다.

“김석원은 친일 거두 박영효를 통해 알게 된 미나미 총독과 줄이 닿아 ‘싸움터에 죽으러 가는 군인의 마지막 소원 하나 안 들어주겠소? 성남학교 설립을 허가해준다면 여한이 없겠소’라고 강변하여 조선총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은 김석원의 사립학교 설립이 그와 원윤수의 자금력보다는 총독부의 협력에 훨씬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총독부가 특혜를 베푼 것은 그의 친일 공로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주사변 전공과 일본군 복무 경력이 학교 설립권 획득에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권력을 이어온 비결 중 하나는 사학재단에 있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성역 비슷한 특혜를 누리는 사학재단을 친일파가 근거지로 삼는 경우들이 있었다. 상명학원 설립자 배상명의 사례도 그중 하나다.

총독부의 협력으로 사립학교를 세워 해방 뒤에도 권력을 이어간 김석원의 일생은 한국 친일파들의 권력 유지 방식 중 하나를 반영한다. 그는 사립학교에 웅거해 권세를 이어가는 패턴을 밟은 친일파다.

김종성 기자

<2022-10-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서울 한 고등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기괴한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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