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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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우사김규식연구회(회장 김수옥. 김규식 선생의 손녀)는 9월 30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다목적실에서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 우사 김규식과 극동민족대회’를 주최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우리 연구소와 국가보훈처, 청풍 김씨 대종회등이 후원했다. 극동민족대회는 코민테른의 주도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자대회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에서도 약소민족, 특히 한국문제가 논의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극동민족대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조선·중국·일본·몽골·자바·러시아의 대표 144명이 참가했는데 한인대표단은 23개 단체에서 이동휘·박진순·여운형·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 52명이 참가하여 참가국중 최다수였고 김규식은 한인대표단의 단장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코민테른과 극동민족대회’(발표자 :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극동민족대회와 김규식’(발표자 :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홍범도’(발표자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를 했으며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종합토론 좌장을 맡았다.

심지연 교수는 발표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실망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식민지와 약소국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원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코민테른을 결성하자 이에 매력을 느끼고 호응’하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조선 등 피압박민족을 지원했던 이유는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혁명 추진이라는 공산주의 이념에 내포된 국제주의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임경석 교수는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경험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동시대 다른 많은 조선 사람이 그랬듯이, 극동민족대회는 김규식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반병률 교수는 청산리전투 이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자유시참변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축적된 학계의 성과에 더하여 최근 러시아문서보관소에 소장되었던 자료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번 학술회의 자료집은 연구소누리집(minjok.or.kr/archives/128298)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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