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1) : 신흥무관학교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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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연구소에서 발간한 노동은 선생님의 유작 <항일음악 330곡집>은 올해로 발간 5주년을 맞았다. <항일음악330곡집>에 다 담지 못했던 항일노래 이야기를 이번 달 <민족사랑>부터 싣는다.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 관련 사건이나 단체·인물 등에 관한 내용과 함께 노래가 가진 음악적 특징 등을 소개하려 한다. 노동은선생님과 편찬 작업을 함께 했던 이명숙 선임연구원과 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가 원고 집필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풍부해진 항일노래를 만나보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다. 1911년 6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독립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주요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앞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 부른 노래, 신흥관련 인물들이 학교 폐교 후 만든 노래 등을 <민족사랑> 지면에 소개하겠다. 내용은 본인이 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본 항일노래의 창작·공유·전승」(<역사와 현실> 124, 2022)을 위주로 할 것이며, 곡조에 대한 해설은 강태구 선생님이 맡아 주기로 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는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가가 있으며, 최근에 한 곡을 추가로 발굴 「실락원」)해 총 4개가 되었다. 항일노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작사가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것이듯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들도 창작자 대부분을 알 수 없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전파과정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형식이 대부분이라 더욱 그러했다. 이번 연재에는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들고 불렀던 것이 확인된 노래들을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소개하려 한다.

가장 먼저 소개할 노래는 「신흥무관학교 교가」이다. 대표적 독립군가 중 하나로 유명하며, 2000년대에 중국 동포 중에도 독립군 오빠에게서 배운 노래라고 말할 정도로 지금껏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만들어지기 전인 1890년대 전후부터 국내에서는 찬송가 등의 서양음악 유입으로 창가라는 새로운 음악이 자리 잡았고, 통감부의 음악교육으로 일본 창가가 유입되어 학교에서 창가를 음악수업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 보도 (<신한민보> 1917.4.5.)

한편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국민들의 계몽과 각성을 바라며 수많은 ‘애국가’와 계몽가요가 만들어져 ‘애국창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국내외 민족학교에서는 민족의식과 항일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애국창가를 음악수업에 적극 활용했다.

음악교재에 포함된 애국창가는 일제에 의해 ‘불온창가’로 지목되어 교재 발매가 금지되고, 음악교사 등을 체포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16년 연말 한영서원(韓英書院) 교사·생도 30여명이 포박되어 간 일명 ‘한영서원 창가집 사건’이 대표적이다. 한영서원은 1906년 감리교회에서 개성에 설립한 사립학교로 사건 당시 음악교사 정사인(鄭士仁)을 비롯한 교사들이 「대한혼」, 「애국가」 등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 일로 정사인은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한영서원의 교가인 「한영서원가」 또한 항일노래로 애국계몽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한영서원가」의 곡조는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곡으로도 활용된 「조지아행진곡」이다.

‘교가’를 제정하고 부른 움직임은 1900년대부터 진행되었다. 교내 행사 등에서 학교에 대한 공동체 의식과 자긍심을 고취하고 교육목표 등을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의미에서 ‘학교의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전 국내 민족학교에서 만들어 부른 교가로는 「한영서원가」 외에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가」도 있다. 이 교가는 신흥무관학교 교장 여준(呂準)이 오산학교 교사로 있을 때 작사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 교가를 제정한 것이다.

현재까지 작사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사에서 독립군 양성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했던 신흥무관학교의 기개와 사명감이 느껴진다. 내용을 살펴보면 1절에서 흑룡, 태원, 영절은 모두 중국을 지칭하고 헌원은 중국의 전설상 시조 헌원씨를 지칭하는 것4으로, 중국을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일본을 품어 젖 먹여 키운 것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2절에서 장백산 밑 우리의 아름다운 영토를 뺏긴 후 우리 자손들은 종의 설움을 받고 있으며, 3절에서 우리 청년들이 칼 들고 말 타며 몸을 단련하고 새로운 지식을 쌓아 우리 민족을 이끌어 새 나라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다.

가사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일반적인 교가에 반드시 포함되는 학교 명칭이나 위치가 드러나지 않는 점이다. 신흥무관학교라는 명칭이 여러 자료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추측된다. 즉 신흥무관학교가 중국 당국과 일제 관헌의 지속적인 감시를 피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초기에는 신흥강습소, 이후 신흥학교나 신흥중학교 등으로 확인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 학교에 국한되지 않은 가사여서 교가보다는 ‘항일노래’로 인식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부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폐교후에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항일노래로 전승된 사실도 확인된다. 1920년대 항일노래를 엮은 가사집 <가곡선집(歌曲選集)>에 「신흥학교가(信興學校歌)」로 수록되어 있었다.

「신흥학교가」는 「신흥무관학교 교가」 1절을 두 개의 절로 변형한 형태다. 곡명의 한자는 新興에서 信興으로 바뀌어 있고, 가사에서도 한자가 달라진 경우가 많았다. ‘흑룡’은 ‘흥룡’, ‘남에’는 ‘남해’, ‘섬중’은 ‘선중’, ‘헌원’은 ‘현원’으로 되어있고, ‘영절’은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 단어가 다르지만 소리로만 들을 경우 거의 발음이 유사하다. 노래로 부를 경우 같은 소리로 듣게 된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일반 동포와 청년학생들까지 널리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활자로 전달되기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기에 들리는 대로 부르다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소리에 맞춰 한자를 기입하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가곡선집>에는 또 하나의 교가인 「의성학교가(義成學校歌)」도 실려 있다. 곡명의 끝부분에 “(通化縣)”이라고 적혀 있어 의성학교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일본 외무성의 1923년 12월 17일자 문서7에서 확인되는 통화현 소재 의성학교는 1922년 8월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중앙사무소 학무부 부속의 보통학교였고, 교과목으로 지리・역사・한문・산술 등과 함께 창가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문서에서 확인되는 대한통의부 총장 김동삼(金東三)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함께 했던 인물로, 백서농장을 세운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발전시켜 독립군을 지휘했으며, 만주지역 군사세력의 통합에도 노력했다. 대한통의부 세력이 약화될 시점에 다시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노력해 결실을 맺은 것이 1924년 12월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였다. 정의부에는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간부로 많이 있어서 「의성학교가」가 만들고 불릴 시기에도 관련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의성학교가」와 관련해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첫 소절 “요동만주 정기모와 웃둑 앩은봉”은 일반의 교가처럼 의성학교의 위치를 설명하며 시작하고, 후렴은 “의성의성 의성학교만세(라)”를 반복해 학교 명칭을 강조하고 있다. <가곡선집>에 곡조 기록은 없지만,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비교했을 때 가사구조가 유사하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1절의 1∼3행에 해당되는 가사의 글자 수가 4/4/5로 동일하고, 4행은 9글자로 다르지만 노래로 부르기에는 가능한 글자 차이다. 후렴은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후렴 1∼2행 부분만을 반복하는 형태여서 이 역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폭넓은 전파와 함께 학교의 기상과 포부를 잘 표현하는 행진곡풍의 곡조를 「의성학교가」가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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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교가」는 「조지아행진곡」으로 알려진 「조지아를 행진하며(MarchingThrough Georgia)」 곡조에다 개사한 곡이다. 미국 남북전쟁 말기인 1865년에 헨리 워크(Henry C. Work)가 작곡한 「조지아행진곡」은 미국, 영국, 인도, 한국, 일본 등지에서 널리 불렸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조지아행진곡」을 ‘가사 바꿔 부르기’ 한 형식인데, 이는 기존 악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투라팍투어(contrafacture) 방식으로 한국은 물론 서양에서도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우리에게는 ‘노가바’란 단어가 더 익숙한데, 우리 노래의 역사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특히 서양음악 창작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던 한국 근대 초기 상황에서는 기존의 곡조에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가사를 붙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경우는 「애국가」로, 그 곡조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다. 이 곡조는 「애국가」 외에도 다양한 가사로 바꿔 노래되었다.

당시 이러한 서양 유명 곡조는 주로 찬송가를 매개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서양 악곡이 ‘창가’란 이름으로 국내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한국어로 보급된 각종 ‘찬송가집’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보급된 찬송가 중 한국인들이 특히 애창한 곡조는 여러 창가나 애국창가에 다양하게 차용되었다. 「조지아행진곡」 역시 「우리들의 싸울 것은」이라는 찬송가의 곡조였다. 행진곡풍의 이곡은 특히 씩씩하고 활기찬 가사 내용의 노래에 많이 차용되었다.

「조지아행진곡」을 활용한 창가와 항일가요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노복순의 연구에 의하면 항일가요의 범주에 속한 노래 중 「조지아행진곡」을 활용한 것은 총 19곡이었다.9

※ 곡명이 유사한 작대와 작대가, 보국과 보국가는 각각 동일한 곡
※ 곡명이 다른 군병가와 구세군가는 가사와 곡조가 동일한 곡
※ 곡명이 같은 어린이날 노래, 독립군가,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가사와 곡조도 동일한 곡

이를 통해 「조지아행진곡」 곡조의 대중성과 확장성이 폭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가바’식 곡조 활용은 손쉬운 수단이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열망에 비례해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신흥무관학교가 한국 독립운동사상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만큼이나 그 출신자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체감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이러한 항일노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에게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동인으로도 작용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 개화기 서양 악곡 유입과 함께 한국사회에 수용된 새로운 갈래의 서양식 노래. 초기에는 주로 찬송가 곡조에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한 가사로 개사한 노래들이 많이 불림.
이후 한영서원은 교명을 송도고등보통학교로 바꾸고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학교 운영을 이어갔으며, 현재 인천에 소재한 송도중·고등학교가 그 후신이다.
1907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민족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설립한 오산학교의 첫 교가로 ‘뒷 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로 시작한다. 현재 오산고등학교(용산구 소재) 교가인 이광수 작사의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 같다’로 시작하는 교가 이전의 것이다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122쪽
김한산(金漢山)·김희산(金希山) 주편, 발행연도 미상(복사본) <가곡선집>, 대동인쇄소. 노동은 소장 자료 중 하나이며, 노동은은 이 자료가 1920년대 중국 동북 각지의 민족해방운동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평가했다.(노동은, 1996. <노동은의 음악상자>, 웅진출판, 317~328쪽)
노동은, 「음악」,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2002, 304쪽
「機密第171號不逞鮮人의 內容에 關한 件(奉天總領事, 1923년 12월 7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7>,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Ulrich Michels 저, 홍정수·조선우 편, <음악은이> 1(원제: dtv-Atlas zu Musik), 세광음악출판사, 1990, 83쪽
노복순, 「항일가요의 가사 결합양상과 특성」, <동양학> 84,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21, 154~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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