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한강리(漢江里)가 느닷없이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둔갑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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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동(淸涼里洞), 상왕십리동(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下十里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염리동(鹽里洞) …….”

언젠가 서울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법정동(法定洞) 명단을 쭉 살펴보다가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을 지닌 동네 몇 군데를 골라본 적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끝자리가 모두 “무슨 무슨 리동”인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그냥 ‘청량동’이 아니고 구태여 ‘청량리동’이라고 하여 마을이라는 뜻글자가 두 번씩이나 겹쳐 있다. 그러자니 약간 시골 냄새가 나는 ‘리(里)’라는 이름을 지금껏 그대로 꿰차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보았더니, <조선총독부관보> 193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개정)」의 ‘경성부(京城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리(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동(町洞) 명칭 개정 내역(1936년 4월 1일 시행)

이들 가운데 ‘염리’가 ‘염정(鹽町, 염동)’으로 되지 않고 ‘염리정’으로 바뀐 것은 ‘정동(貞洞)’이 ‘정동정(貞洞町)’이 된 것처럼 세 글자로 맞추는 방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청량리정’이니 ‘왕십리정’이니 ‘답십리정’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구태여 ‘리(里)’라는 것을 남겨둔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원선 철도의 개통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이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사용하던 상태이다 보니,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량리’와 ‘왕십리’라는 지명을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답십리정’의 경우에는 기차역의 소재지와는 전혀 무관하지만, 왕십리와 운율이 똑같으므로 덩달아서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조선일보> 1936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대경성 신구역도(大京城 新區域圖)’이다. 이 당시 경성부 주변의 고양군 지역(용강면, 한지면, 연희면, 은평면, 숭인면)과 시흥군 지역(영등포읍, 북면, 동면)의 일부를 편입하게 되자 한꺼번에 그 면적은 4배나 불어나게 되었다.
<조선일보> 1936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경성부 정명(町名) 구역 및 사무취급관청 명단’이다. 아직은 ‘구 제도(區 制度; 1943년 6월 10일 최초 시행)’가 도입되기 이전 시기였으므로 본청 이외에 각 출장소가 이를 담당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러한 이름들이 한꺼번에 생겨난 것은 1936년 4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이른바 ‘경성부 대확장 계획’에 따라 경성 외곽의 고양군과 시흥군 쪽에서 다수의 지역을 대거 편입하였는데, <조선신문> 1936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경성부(京城府)의 구역(區域)이 일약(一躍) 4배(四培)로 확장(擴張), 인구(人口)도 61만(萬)으로, 드디어 4월 1일 실시(實施)」 제하의 기사에는 이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대망(待望)의 경성부 구역 편입 확장은 가까스로 결정을 보게 되었고 2월에 편입(編入)의 부령(府令)이 공포(公布)되면서 드디어 4월 1일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에 따라 현(現) 경성부의 2만 리(里) 남짓이 일약 4배인 8만 리가 되고 인구(人口)도 44만이 61만으로 대팽창(大膨脹)을 가져와 내용(內容)과 외관(外觀)이 모두 대경성(大京城)으로서의 면목(面目)을 발휘할 것으로 되었는데, 편입구역(編入區域)은 누보(屢報)한 바와 같이
△ 고양군(高陽郡)에서 용강면(龍江面), 한지면(漢芝面, 이상 전부), 연희면(延禧面), 은평면(恩平面), 숭인면(崇仁面, 이상 일부)
△ 시흥군(始興郡)에서 영등포(永登浦, 전부), 북면(北面), 동면(東面, 이상 일부)
△ 김포군(金浦郡)에서 양동면(陽東面)의 일부(一部)로 대(大) 스케일의 시가지 편입(市街地 編入)이 있으며, 부당국(府當局)에서는 이 편입실시에 동반하여 신예산(新豫算)에 관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으며, 또한 이관재산(移管財産), 학무(學務), 기타 각과 관계사무(各課 關係事務)에 대해 도당국(道當局)과 협의(協議)를 이뤄나가고 있다. 다시 확장 후에 대비하기 위해 현 용산출장소(龍山出張所) 이외 영등포출장소(永登浦出張所)와 동부방면(東部方面)의 적당(適當)한 곳에 1개소의 출장소(出張所)가 설치되어질 것으로 되었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부가 갑자기 4배에 달하는 크기로 급팽창하게 되자 일제는 이참에 이 도시에 속한 모든 지역에 대해 일본식 지명인 ‘정(町)’으로 일괄 변경하기로 했으며, 이에 부차적으로 동네 이름 자체도 제 멋대로 변경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여기에는 신규편입지역에서 동일한 지명을 지닌 경우이거나 서로 혼동을 일으킬 만한 우려가 큰 곳들이 대개 이러한 사례에 포함되었다.

동일 지명 또는 유사 지명으로 정동(町洞) 명칭이 임의 개정된 사례(1936년 4월 1일 시행)

이러한 지명 개정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6년 2월 14일자에 수록된 「부역확장(府域擴張)과 동명통일(洞名統一), 전부(戰部) 정칭(町稱)으로 고친다, 동(洞) 혹은 이칭(里稱)은 시대지(時代遲)라고, 도 당국(道當局)에 인가 신청(認可 申請)」 제하의 기사에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경성의 시가는 현재 186개 정동(町洞)에 나뉘어 있는데 4월 1일부터 인접 읍면을 편입하면 262개 정동리(町洞里)로 되고 인구는 일약 60여 만을 계산하여 면목일신의 대도시가 될 터인데 현재 이동명(里洞名)을 그대로 눌러 쓰는 것은 신생의 대경성에 적당치 아니하므로 경성부에서는 행정구역 변경과 동시에 전부 정(町)으로 개정 통일하기로 되어 도 당국에 인가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개정을 원칙으로 종래의 고유명을 변경치 않고 다만 동(洞)이나 리(里)는 정(町)으로 개정하는 데 불과하나 연희면 신촌리(延禧面 新村里)와 한지면 신촌리(漢芝面 新村里)는 동일명칭이므로 전자는 역명의 관계도 있으므로 신촌정(新村町)이라 하고 후자는 응봉하(鷹峰下)에 촌락을 형성하였으므로 응봉정(鷹峰町)으로 개정할 터이며 또한 한강리(漢江里)는 한강통(漢江通)과 혼동될 염려가 있으므로 구 제천정(舊 濟川亭) 소재지 관계를 따라 제천정(濟川町)이라 개정할 터이고 기타 다소 변경이 된 곳은 통동(通洞)을 통인정((通仁町), 간동(諫洞)을 사간정(司諫町), 냉동(冷洞)을 냉정정(冷井町), 원동(苑洞)을 원서동(苑西洞)으로 개정할 터이며 정동(貞洞), 평동(平洞), 재동(齋洞), 관동(館洞) 등도 이상의 정칭을 붙이기로 되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36년 2월 14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경성부 대확장 계획’ 관련기사에는 차제에 기존의 동리(洞里) 명칭은 일체 폐지하고 이를 일본식 정(町)으로 통일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기존의 ‘한강리’는 제천정(濟川町)으로 개정할 거라는 구절도 포함되어 있다.

이 바람에 한지면의 신촌리는 연희면의 그것에 밀려 ‘응봉정(鷹峰町, 응봉동)’으로 임의 개칭되었고, 한지면의 수철리 역시 난데없이 ‘금호정(金湖町, 금호동)’이라는 이름을 꿰차게 되었다. 특히 한지면의 한강리 지역은 러일전쟁 이후 용산 일대에 일본군 병영지를 구축하면서 그네들이 억지로 갖다 붙인 ‘한강통(漢江通)’이라는 지명과 혼동된다 하여 강제개칭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를 대체하는 지명 후보로는 한때 ‘제천정(濟川町)’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막판에는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경성휘보(京城彙報)> 1941년 10월호에 게재된 타카모토 쇼우(高本承雨, 신승우의 창씨명)의 기고문인 「경성부관내 정명기원고(京城府管內 町名起原考)」, 28쪽에는 한남정의 작명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남정(漢南町, 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 한강(漢江)의 한(漢)과 남산(南山)의 남(南)을 조합한 것이다. 한남정은 한강과 남산과의 중간에 위치하여 전개된 지역이므로 예전부터 한남이라는 명칭은 방간(坊間, 항간)에 통칭(通稱)이었다.

여기에서는 “한남이라는 명칭은 예로부터 항간에서 통용되던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옛 문헌에는 한강의 이남과 이북 지역을 일컬어 ‘한남(漢南)’이니 ‘한북(漢北)’이니 하는 용례가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예전 한강리 지역을 가리켜 ‘한남’이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딱히 그 흔적이나 근거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멀쩡했던 ‘한강리’를 ‘한남정’으로 바꿔놓은 것은 일제가 이 땅에서 저질렀던 억지스런 지명 왜곡의 한 사례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곳 한강리 지역은 알고 보면 서울 주변을 통틀어 수백 년에 걸쳐 ‘한강’이라는 지명 그 자체를 고스란히 지켜온 유일무이한 공간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애당초 이곳은 ‘한강’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함부로 다른 지명으로 개칭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우선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京都 漢城府)’ 항목에 등장하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강도(漢江渡, 한강나루)]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으며 너비는 2백 보(步)이다. 옛날에는 사평도(沙平渡, 사평나루)라 하거나 속호(俗號, 속칭)로 사리진도(沙里津渡, 사리진나루)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어서 봄가을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人)을 두어 드나드는 사람을 기찰(譏察)한다. 나루 머리에는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광나루, 삼전도,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 길고 너른 한강 물줄기에는 이처럼 무수한 나루터들이 존재했지만, 그 가운데 바로 이곳에만 ‘한강나루’라는 대표명칭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서울 도성에서 삼남지방(三南地方)으로 연결되는 주요 길목의 하나이며, 실제로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정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정리고(程里考)에는 이곳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하여 저 멀리 동래(東來) 방향으로가는 4대로(四大路)가 이어진다는 사실이 잘 명시되어 있다.

또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이곳에 ‘한강진’이라는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유래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한강진(漢江鎭)] 영종(英宗, 영조) 계유(癸酉, 1753년)에 설치하여 훈국(訓局, 훈련도감)의 진(鎭)으로 삼았다. 정종(正宗, 정조) 14년에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순조(純祖) 2년에 다시 훈국의 소속으로 되돌렸다. 별장(別將)을 두며 본영(本營)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으로 30삭(朔)씩 돌아가며 임명하였다. 진선(鎭船)은 15척(隻)이며, 이 가운데 본진(本鎭)이 8척, 동작진(銅雀津)이 1척, 서빙고(西氷庫)가 6척이다. 산천조(山川條)의 내용도 함께 살펴보라.

 

<일본지리대계(日本地理大系)> 제12권 조선편(1930)에 게재된 ‘경성시가도’에는 고양군 한지면에 속한 ‘한강리(漢江里)’의 표시가 또렷이 포착되어 있다. 하지만 1936년에 이르러 경성부 확장계획과 맞물려 용산 일본군 병영지에 그들이 제 멋대로 갖다 붙여놓은 ‘한강통’이라는 지명과 혼동이 된다 하여 이곳은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강제 개칭이 되고 말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성부사> 제3권(1941)에 채록되어 있는 옛 한강진(漢江鎭, 1939년 촬영사진)의 모습이다. 이 건물의 소재지는 한남동 557번지이며, 일제강점기 이후 경성헌병대 분견소와 경찰관주재소의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한강나루와 한강진 등의 존재로 인하여 옛 사람들이 별다른 수식어 없이 그냥 ‘한강’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이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한민국정부기록사진집> 제3권(2000)에 수록된 한남동 일대의 항공사진(1958년 6월 8일 촬영)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숭례문 또는 광희문을 빠져나와 삼남지방으로 내려갈 때 경유해야 하는 주요 길목이자 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행정구역의 개념으로 이 지역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영조 27년(1751년)의 기록인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에 수록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와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 성외지역(城外地域)으로 서강방(西江坊, 서부), 용산방(龍山坊, 서부), 둔지방(屯之坊, 남부), 두모방(豆毛坊, 남부) 등과 더불어 한강방(漢江坊, 남부)의 존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군정편이(軍政篇二), 훈련도감(訓鍊都監), 수성자내(守城字內)의 항목에 ‘어영청(御營廳)’의 관할구역에 속한 곳으로 한강방(漢江坊)의 몽뢰정계(夢賚亭契), 한강계(漢江契), 주성리계(鑄城里契)가 언급된 것이 눈에 띈다.

근대 시기에 이르러서는 1911년 4월 1일에 일제가 경성부 지역에도 면(面)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한강방’과 ‘둔지방’을 합쳐 ‘한지면(漢芝面)’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에 다시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짐에 따라 이때 ‘경성부 한지면’은 ‘고양군 한지면’으로 소속이 이관되는 동시에 그냥 ‘한강’으로만 일컬었던 이 지역은 ‘한강리(漢江里)’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한강리가 뜬금없이 한남정으로 둔갑하게 된 과정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아스런 사실은 ‘한강리’가 ‘한강통’과 혼동을 일으킨다고 하면서도 정작 경원선 철길에는 그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여전히 ‘한강리정거장(漢江里停車場)’이라는 이름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많이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에라도 이 동네가 한강 그 자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는 점을 되살려 ‘한남동’을 버리고 ‘한강동’으로 지명을 바로 잡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당장에 이런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면 우선 ‘옛 한강리정거장’ 자리에 남아 있는 경의중앙선의 ‘한남역(漢南驛, 1980년 4월 1일 개통)’을 ‘한강역(漢江驛)’으로 고치는 정도의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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