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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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1)
호담강직(豪膽剛直)으로 일관, 유명한 인천탈옥기(상), 김구(金九)씨편

우리의 지도자 김구 선생을 수반으로 한 대한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해방의 환호소리가 3천리 금수강산에 차고 넘친 가운데 고국으로 23일 환국하였다. 기미년 만세 전후 피가 뛰는 젊은 혁명가들은 조국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해외와 해내에서 피로 엉킨 투쟁을 오늘까지 거듭해왔다. 처자와 가정과 형제를 버리고 오직 민족해방을 위하여 피를 뿌려 싸워왔다. 잡힌 목이 되면 악착한 극형도 달게 받았고 철창 속에서 쓰라린 고초도 견디고 참았으며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파옥(破獄) 혹은 살상도 감행하였다. 천신만고 역경 속에서 사선(死線)을 헤매기도 하였다. 자기 한몸의 목숨과 고생을 돌보지 않고 민족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 이 모든 희생과 고통은 오늘의 광명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경과 가시덤불 속에서 청춘을 짓밟고 반생을 바쳐 싸워온 선생의 거대한 발자국에 방울방울 엉킨 혈루(血淚)의 기록을 더듬으려 한다.

◇ ◇

우리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풍모와 성격을 먼저 말하다 (판독불가) 젊어서부터 기운이 장사이라 금년이 71세인데 (판독불가) 오셨다. 그러나 원래가 건장하기 때문에 지금도 40세 (판독불가) 과묵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반생의 혁명운동의 역사를 볼 때 의(義)를 위하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강파로우며 그 생활은 청렴강직하고 검소함을 위주로 하시었다. 자기 한 몸의 이로움을 위하여서는 아무 생각도 일도 안하는 것으로서 선생의 성격 전부를 대변할 수 있다.

선생은 해주 태생이시다. 극히 빈한한 농가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말 못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극복하여 이기고 나갔다. 친구로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들뿐이었으며 태반이 논밭을 가꾸는 농부들이었다. 누구보다도 농사짓고 글을 읽는 농부들 가운데에서 뜻 같은 친구를 얻기에 애쓰셨다. 더욱이 선생에게는 어질고 현명 (판독불가) 어머니셨다.

선생은 어떠한 곤궁과 역경에서라도 친구와 부하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그들의 책임을 자기가 지기를 즐겨하였다. 동지를 위하여서는 고생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에 있을 때의 생활은 최악의 경우 최저의 생활을 하였다. 수많은 가족을 더불고 가난에도 쪼들리었다. 부인은 선생이 기미년 만세 후 중국으로 망명하자 시어머니 한 분과 인(仁, 29)과 신(信, 24) 두 아드님을 데리고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며느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은 손주 두 분을 데리고 일본관헌의 눈을 피해 대련으로 들어가 배를 타고 상해로 가셨다. 그 후 어머님은 씨가 중국천지를 혁명의 무대로 삼고 돌아다니는 동안 상해에서 아드님의 성공을 빌며 (판독불가) 에서 한문을 배웠다. 두뇌가 명석하여 한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문장이 뛰어나 구구절절이 경탄을 자아냈다. 18세 때 갑오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그 동리 당원의 두령이 되어 당원을 거느리고 신천 방면으로 행동을 일으켰다. 당시 정부로부터 파견된 토벌대장 안태근(安泰根)은 선생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귀순하기를 청하였으나 급기야 구월산에서 정부군과 맞닥뜨렸다.

씨는 무너져가는 국운을 붙잡을 구국의 중대한 임무를 깨닫고 중국 일대로 유력(遊歷)한 결의를 이때 품게 되었다. 이렇게 큰 뜻을 품고 국내를 순력하는 동안 21세 적에 황해도 안악군 계압포에서 기골 (판독불가) 죽인 일이 있었다. 그리고는 죽은 헌병의 목에다가 그 죽인 이유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리하여 을미년에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이 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인 데 대한 분함은 더할 나위 없거니와 어찌 감히 국모를 해치는 일이 있겠느냐. 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노라하고 그 연유를 명백히 하고 나서 죽인 사람인 자기 이름과 주소를 써놓고 유유히 집에 돌아가 누워 있었다. 이것이 선생이 일찍부터 가슴 깊이 품어나오는 배일사상의 단적 표현이었다. 그 후 선생은 일본헌병에게 잡혀 인천감옥에 투옥되었다. 2년 동안 미결로 고생하다가 하루는 파옥 (판독불가) 독한 소주 1병과 무명 1필을 들여보내 달라고 말하였다. 그 술을 먼저 간수에게 나누어 주어 마시게 한 후 밤중 마룻바닥을 뚫고 탈주한 것이다. 그러나 높은 담벽을 어찌 넘을 것인가? 선생은 목마를 태워 한 사람을 넘어가게 하고 무명끈을 나뭇가지에 걸게 한 후 또 한 사람을 받들어 넘겼다. 이같이 두 사람을 다 넘겨주고 나서 선생은 마지막으로 그 줄을 타고 탈옥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숨을 곳이 없었다. 이에 사람이 탈옥한 사실을 안 형무소 간수와 경찰대는 그 일대를 둘러싸고 물샐 틈 없는 수사진을 친다. 선생은 옷을 전부 벗어서 내버리고 큰 소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몸을 틀 듯이 하고 숨어있다가 도주하였다. (판독불가)<중앙신문> 1945.11.24.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2)
사내(寺內)총독 암살기도, 김홍량(金鴻亮) 씨 등 1만 4천명이 피검, 김구씨편(중)

인천감옥을 탈옥하자 그 길로 경상북도 예지면 산속 어느 절에 몸을 피신하여 두 해동안 있다가 다시 평양에 있는 영명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3년을 지냈다. 이 절에 있는 동안 고급 한적(漢籍)을 통독할 기회를 얻었고 불교를 연구하고 서도(書道)로서 일을 삼는 한편, (판독불가) 기억에서 사라져갈 때쯤 되어 선생은 이 절을 벗어나서 황해도 장연읍 사직리에 나와 지내며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가지고 청년운동과 배일사상 고취에 몸을 바쳤다.

선생은 31세 때에 가족과 더불어 안악으로 이사하였다. 안악에서 지내는 동안 기독교 방면과 교육 방면 뜻있는 이 (판독 불가)의 중직을 맡아보았다. 안악 일대에 여러 학교를 세우고 동포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빈한한 자와 뜻있는 이들의 교육장으로 공개하였다. 그때 교원들은 일본유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나오게 되는 것을 틈타서 원조를 얻었으며 특히 각계 인물들과 연락하여 비밀 결속을 굳게 하였다. (판독불가) 안악을 중심으로 하여 해서(海西) 일대에 모여들고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철두철미 배일사상을 일반대중에게 고취하고 애국사상을 적극적으로 청년들의 머릿속에 넣어주었다. 학생들은 전선 각지로부터 4~500명이 모여들었다. 모두 혈기방장한 청년들이고 애국지사들이며 배일운동의 투사들이었다. 일본인을 철저히 배척하자! 일본의 침략정책을 완전히 깨트려버리자, 자주독립을 위하려 싸우는데 생명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말자는 것이 학도들의 맹서였고 굳은 신념이었다.

선생의 생활은 실로 빈한한 선비의 살림이었다. (판독불가) 괴로운 빛을 나타내시지 않았다. 이것이 선생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한편 마음에 꺼리는 괴로움도 되었다. 지식층과 농민층 할 것 없이 선생을 따르고 배웠으며 존경을 바쳤다. 전선 각지에 있는 뜻있는 동지들과의 연락은 물론이거니와 일찍 해외에 가있는 분들과의 연락은 서신으로 또는 인편으로 시켜 맹렬해졌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다시금 큰 계획 하나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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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혁명운동기관으로 신한민회(新韓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 회에서는 조선침략의 주구 사내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몇 해동안 교육사업에 힘써 온 터이라 (판독불가) 일을 기어코 이루기 위하여 갖은 난관을 돌파하며 조직적인 행동준비를 갖추기에 힘썼다. 그러자 이 일을 감시하는 일본관헌의 눈초리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변을 싸고돌았다. 동지들로 꽉 얽힌 이 회의 내용은 외부에 새어나갈 리 없다.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성공에 가까워 갔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어찌된 일인지 그만 대사를 이루려는 직전에 일본관헌에게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창졸간에 확대되어 관헌의 체포망은 전선 각지에 흩어졌다. 회원들은 뒤를 이어 검거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은 일본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이 검거선풍 속에 김홍량 안명근(安明根) 양기탁(梁起鐸) (판독불가) 취조와 예심을 거쳐 징역의 판결을 받은 분이 36인, 유배형을 받은 분이 50인, 그 외 집행유예 등 합하여 150명이었다.

선생은 김홍량, 안명근 씨와 더불어 징역 15년의 형을 받고 말았다. 이때가 1909년, 선생이 35세 때였다. 그러다 일본의 명치(明治) 황제가 죽고 대정(大正) 황제가 왕위 자리에 오르자 소위 특사(特赦)라고 하여 감형이 되어 7년 만에 서대문형무소를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깊이 맺힌 큰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배일사상은 민족적인 감정으로 더욱더 격렬하여 (판독불가) 전선 각지로 농산어촌으로 돌아다녔다. 강연은 물론 배일사상을 고취한 환등(幻燈)을 통하여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가르치고 들려주었다. 이렇게 지방 순력을 하는 동안 걸핏하면 관헌에게 잡혀 구류도 당하고 금고도 당하였다.

선생은 어떠한 극형, 어떠한 고통에도 굴함이 없었다. 기한(饑寒)과 병고가 닥치더라도 시종일관 애국운동에로 막진하었다. 선생의 굳고 강한 신념을 누가 꺾으며 누가 막을 것이랴! 1919년 선생이 45세 때 기미년 만세사건은 돌발하였다. 전선 각지에 흩어져있던 동지들을 봉기하였다. 선생은 이때를 당하여 각 방면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판독불가) <중앙신문> 1945.11.25.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4)
김규식(金奎植) 박사편, 카이로선언 공헌 절대, 국제무대서 눈부신 활약

주석 김구 선생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현재와 같이 확호한 지반 위에 세워놓은 부주석 김규식 박사는 서기 1880년 12월 28일 서울시 어성정(御成町) 41번지에서 탄생하였으니 현재 65세이다. 성품은 퍽 상냥한 한편 강직 (판독불가)사인 만큼 김구 선생의 모자란 점이 있을 경우에도 이를 도와 단단한 혁명의 가시덤불길에서도 우리의 갈길을 바로 찾아 금일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사의 일가는 본래가 기독교 신사인 관계로 박사도 일찍부터 기독교를 믿었고 현재도 독실한 신자이다. (판독불가) 그곳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박사의 종매(從妹) 되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김메리 씨는 그때 박사가 미국으로 불러들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돌아올 때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일시는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있고 또 경신학교 (판독불가) 국가를 보다 못하여 피끓는 가슴에 조국광복이란 크나큰 뜻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었다. 청년 혁명가 김규식 박사의 전도는 물심양면이 모두 단단하였었다. 땅 설고 물 설은 이역에서 남의악식(襤衣惡⻝)을 무릅쓰고 와신상담을 기필하던 이 청년도 모진 바람과 고독한 사위(四圍)의 정세에 자칫하면 초지를 굽힐 염려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굽힘없는 성정은 이를 극복하였고 또 국내에서는 기미년 만세사건을 계기로 일본놈들의 탄압에 못 견뎌 많은 동지와 우국강개 의사가 속속 상해로 망명하여 필경은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판독불가) 청년 김규식 씨는 그들 혁명투사에게 부여된 정치적 무대를 종횡무쌍으로 맹활약을 개시하여 임시정부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학무부 총장, 외무부 총장 등의 요직을 맡아 조직된 기구 밑에 국제적 무대에까지 약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은 갈수록 심해가고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생겨난 민족자결 약소국가의 해방이란 신 사조는 우리 조선에도 일루(一縷)의 회광이 보일 것도 같아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평화회의가 열렸을 때 조선 신한청년당 대표의 자격으로 조소앙(趙素昻) 씨와 더불어 참석하였었다. 능숙한 영어로 일한합병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판독불가) 만방에 호소하였으나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였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북경 청화대학과 북진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다가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한국대일전통일동맹(韓國對日戰統一同盟)이 결성되어 항일전선이 통일되자 한족동맹의 대표로 집행위원으로서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의 외교부장 자리에 앉고 미국에 건너가 자금모집과 선전에 맹활약을 하였다. 역사적 필연성을 띤 만주사변은 1937년 드디어 중일전쟁에까지 발전하게 되자 조국광복의 절대적 호기임을 안 우리 임시정부는 재빨리 장개석정부와 협조하 (판독불가) 거두회의가 있을 때마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저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는 우리 김규식 박사가 장개석 장군을 도와서 카이로 선언을 성명케 하는 등 박사의 풍부한 외교적 경험과 탁월한 정견은 우리로서 마땅히 경의를 표하여 남는 바 있다.

실로 오늘의 박사는 박사 자신의 노력과 교양으로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박사를 돕는 내조의 공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리라. 박사 부인 되시는 김순애(金順愛) 여사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여자혁명가로서 일찍이 이화여대를 마치고 북간도에 건너가 여학교 교유로 있다가 뜻하는 바 있어 상해로 건너가 정치운동에 (판독불가)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환국한 김진동(金鎭東) 씨 이하 수 남매를 두시었다. 김순애 여사의 형제는 모두 중명하여 부인의 아우인 김순례(金順禮) 여사도 역시 이화여대를 나와 미국 콜롬비아 대학까지 나왔다 한다.

김부인은 항상 남편을 도울 뿐 아니라 중경의 우리 조선 애국부인회장의 일도 맡아보아 국제부인운동에 많은 활동을 하였고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들어갈 무렵에는 성도대학에서 교편도 잡는 등 우리 조선여성을 위하여 널리 활약하는 분으로 환국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인의 도움과 해박한 지식과 높은 정치적 교양이 박사로 하여금 부주석의 (판독불가) <중앙신문> 1945.11.27.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5)
엄항섭(嚴恒燮) 씨편, 신문기자로 상해서 활약, 30년 동안 서울에 발을 들이지 않은 혁명가의 부친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 씨, 이 이름을 듣고 국내에 있는 사람중에서는 그분이 어떤 분이고 나이는 몇이나 되었을까 하고 알아보고 싶었고 엄항섭 씨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하고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엄씨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외국인 간에는 ‘떼빈트 엄’으로 임시정부 요인 간에 재기발랄하고 중년 신사이며 가장 교양이 높고 사교가이며 금상 (판독불가) 하며 화술도 좋을 뿐 아니라 가장 평민적인 정치가로서 이름이 높은 분이다. 이렇게 이름이 뚜렷한 선생은 1901년 경기도 여주군 이포에서 엄주완(嚴柱完) 씨의 둘째아드님으로 조선에서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국내에 친지도 많은 분이다. 선생은 금년 48세로서 동지 간에 가장 젊은 각료의 한 분이다.

엄씨 일가는 본래가 뚜렷한 문중일 뿐 아니라 조부 되시는 (판독불가) 외국인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운동에 많은 노력을 하신 분이고 엄친 엄주완 씨도 승지까지 지내셨으나 일한합방의 논의가 분분한 1906년에 국치의 날을 보고 싶지 않아 서울을 등지고 떠나 고향인 여주 이포로 3형제 아이들과 같이 일족이 모두 낙향을 하여 버리고 마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3년 후에 일한합방이라는 역사적 치욕의 날이 오고 우리강토는 완전한 암흑시대에 파묻히고 (판독불가) 광복을 보고 자기의 뒤를 이을 자제들을 교육하기에 전 생활을 바치시었다. 이같이 엄친 엄주완 씨는 그곳에서 서투른 농업에 종사하며 일가권속의 호구지책을 강구하는 한편 3형제 아드님을 서당이나 보통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철저한 학문교육을 하는 한편 애국사상을 고취하기에 온전히 몸을 바치셨다.

3형제 중에서도 둘째아드님인 항섭 씨가 가장 재주가 뛰어났다 한다. 신학문을 가르치고자 서울에 올려보내어 보성고보에 입학시키셨다. 항섭 씨는 이 학교에서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우등으로 일관하여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다시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하였으나 낙향한 양가세는 넉넉지 못하여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 야간부 (판독불가) 해가 바로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미년으로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봉기하였던 만세소동이 일어나자 엄항섭 씨는 가슴속 깊이 숨은 뜻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였다가 원래가 빈한한 가세로는 이 뜻을 이룰 수가 없어 조선에서 가까운 중국으로 건너가고 만 것이다. 그때 엄항섭 씨는 겨우 19세 홍안의 소년으로 망명가라 하기에는 너무나 어렸고 한 소년이라기보다는 숙련된 의열의 기백이 넘쳐흐르는 젊은 투사였다. 중국으로 건너가자 곧 항주로 가서 그곳 지강(之江)대학 정치과에 적을 두고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22세 되던 해에 지강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자 상해 법조계로 들어가 우리 임시정부의 일을 맡아보는 한편 불란서 신문사와 미영(美英) (판독불가) 열렬히 싸워왔다. 그러므로 일본관헌은 엄항섭 씨를 스파이라 하여 10여 년을 걸쳐 수사망을 펼치고 엄중한 감시를 하여 왔으나 종횡무쌍의 기략과 백전십도(白顚十倒)에도 굴복치 않은 선생의 성격은 끝끝내 그네들 왜놈을 조롱하고 금일에 이르렀다.

혁명자에게는 항상 비참한 생활이 따르는 법이다. 엄항섭 씨도 그 예를 벗어날 리 없어 17세 되던 해 결혼한 부인께서는 풍찬노숙의 지나친 시련 속에서 산욕열(産褥熱)로 말미암아 23세의 젊은 청춘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친(慈親)도 역시 영광의 날이 옴을 빌며 15년 전에 돌아가시고 장형 승섭(承燮) 씨도 망명한 두 아우의 성공을 빌며 고향인 이포에서 8년 전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돌아갈 곳조차 없이 한 해 한 해 노쇠하야 가시는 엄친(嚴親) (판독불가) 자기의 절개를 굽히지는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의 아성인 경성의 땅은 우리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밟지 않으리라 결심한 바 있어 오늘날까지 39년간을 경성에 발을 디디는 일이 없었다 한다. 연세가 칠순에 서넛이나 넘게 되어 농사도 할 수 없어 3년 전부터 장손인,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 582의 57 엄기창(嚴基昌) 씨댁에 의지하게 되어도 엄주완 씨는 결코 경성 시내에 발을 디디지 않고 김구 선생 이하 요인과 같이 아드님이 환국한 날 처음으로 39년 만에 서울구경도 하고 전차와 종로 네거리 풍경에 놀랐다 한다. 그 얼마나 위대한 혁명가의 아버지인가.

이 아버지에 마땅히 이 아들이 있으리라고 우리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여 마지 않으리라. 셋째아드님 홍섭(弘燮) 씨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지나우선공사(支那郵船公司) 1등 통신사로 활약하다가 중일전쟁 이후 형을 좇아 중경으로 들어가 형과 같이 선전에 활약중이며 엄항섭 선생의 현 부인 연씨(延氏)와 어린 4남매를 데리고 근근 환국하리라 한다. 엄항섭 선생은 또 이러한 일화도 있다. 선생이 보성전문학교에 다닐 때 이종사촌인 남상협(南相協) 씨가 호열자(콜레라)로 앓은 일이 있는데 호열자는 말할 것도 없이 무서운 전염병인지라 부모형제도 꺼려하였으나 본래가 소견에 맞지 않으면 굴복하지 않고 그 반면에 마음에 들면 목숨도 내던지는 성격의 선생인지라 수삭(數朔)을 병자와 같이 기거하며 병간호하여 줄기찬 정성으로 병자를 돌보셨다 한다. 그러한 선생이니 소견에 맞지 않는 일본한테 (판독불가) 않고 이십여 년을 굴복치 (판독불가) <중앙신문> 1945.11.28.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6)
유동열(柳東悅) 씨편, 종횡으로 북만을 치구(馳驅), 광복 건군에 위훈 절대

 

우리 독립군이 조직되어 왜적 일본과 전쟁을 개시한 것은 을사년(1905) 11월 17일, 우리나라의 주권이 박탈된 그날부터 따진다면 그새 35년이나 된 셈이다. 이 흘러간 세월에 독립군은 초대 군무부장 이동휘(李東輝) (판독불가) 킨 것이다. 이렇게 영예스러운 군대이며 그 역경에서도 조국광복의 선봉으로서 유감없이 그 투쟁력을 발휘해온 우리 광복군을 현재 움직이고 있는 세 분이 있으니 그가 바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대장과 (판독불가) 유동열 중장인 것이다. 우리는 우선 김구 선생과 같이 이번 환국한 유동열 장군의 풍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장군은 서기 1876년에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금년이 69세 노령의 장군이다. 그럼에도 (판독불가) 아직도 정정한 분이다. 본래가 성격이 괄괄하고 억센 분이어서 일찍이 어려서부터 무인다운 행동이 많아 동리 사람들은 그가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한 성격과 기개를 가진 장군은 고향에서 한학공부를 집어치우고 신학문을 배우려는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 일은 어지럽고 조국의 운명이 빤히 내다보이는 것만 같이 무너져가는 나라로를 바로잡으려면 군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깨달은 장군은 서슴지 않고 무관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동리 사람의 말이 틀림없었다. 그는 군사 (판독불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우리 조선인 학생을 파견하게 되자 장군은 그 선봉이 되어 도일하였고 서양식 훈련과 병학을 몸소 체득하고 돌아오매 구한국정부는 이 청년장교에게 기본 부대 양성의 중요한 임무를 맡기었다.

그러자 갑진년(1904)에 일로전쟁이 일어나고 우리나라 군대가 일군과 협력하게 되자 장군은 육군 참령의 자격으로 연대장이 되어 북선과 연해주에서 싸우고 봉천회전(奉天會戰)에는 우리의 유명한 혁명가 이갑(李甲) 선생과 같이 참전한 일도 있었다. 갑진년 전쟁도 일본의 야수적인 횡포의 승리에 돌아와 (판독불가) 장군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예측하고 동지들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섰다. 그때가 바로 경술년(1910)으로 우선 북경에 갔으나 나중에 우리 정의부가 만주에 서자 장군은 봉천성 관전현에 일본대관 암살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의 제1보를 내디뎠던 것이다.

그 후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몽고 매매성에 조선인 군관학교를 설립하자 유동열 장관군과 이갑 선생은 군관학교의 고문이 되어 독립운동의 기본 인재를 양성하기에 몰두하였었다. 그러나 악착무도한 일본헌병의 손은 몽고에까지 뻗쳤다. (판독불가) 흑룡강성으로 옮기고 당분간 그곳에서 분투하셨다. 그래도 일본의 마수는 그칠 줄 모르고 북만의 이곳 중소(中蘇) 국경에까지 뻗치자 장군은 이갑 선생과 같이 해삼위(海參威: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광막한 시베리아 벌판을 수년간 헤매었다. 기미년의 소동은 우국지사를 국내로부터 쫓아내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니 장군 역시 시베리아를 떠나 상해로 달려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임시정부와 같이 독립군이 완성되었고 재중 조선청년들의 맹훈련이 시작되자 장군은 임시정부의 정무와 독립군의 군무를 (판독불가) 군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37년 일본의 아시아 독점의 야망은 드디어 중일전쟁을 일으키니 우리 임시정부는 통일적 독립전쟁과 아울러 조직적 군중운동을 전개하고자 광복군 편성을 한층 견고하게 하였으며 유동열 장군은 참모총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명석한 두뇌, 억센 성격, 그리고 빈틈없는 풍모의 인상은 장군이 세계 어느 나라의 참모장한테도 지지 않을 명 참모장이라는 것을 가장 잘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장군이니 이제 우리의 건국과 건군 (판독불가) (<중앙신문> 1945.11.29.)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7)
이시영(李始榮) 씨편, 애국청년교육에 전력, 전 가족이 모두 혁명투사

우리 민족의 피로 된 한국임시정부의 역사를 상고할 때 을사조약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며 더구나 이준(李儁)과 이상설(李相卨) 두 분이 고종황제의 명령을 받고 헤이그 밀사로 한 몸을 내던져 (판독불가) 이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환국한 이시영 옹은 헤이그사건의 위훈이 높은 이상설 씨와 일가 되는 분으로 젊어서 무너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기에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활약하다가 마침내 헤이그사건도 성공치 못하게 되고 말자 크나큰 한을 품고 많은 식솔을 이끌어 남북 만주로 전가(轉家)하게 되고 말았다.

경술년(1910) 늦은 겨울 선생은 항상 의혈에 불타는 42세의 장년 지사로서 (판독불가) 만주땅을 밟기를 기약하고 떠났던 것이다. 선생은 형제분과 자제분 그리고 동지들과 손잡고 만주 항도천이라는 곳에 머무르며 여기서 피가 뛰는 청년들을 교육해낼 학교를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동지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갖은 고생을 당하더라도 달게 참으며 피로 맹서하였다. 신해년(1911) 2월에는 극한을 무릅쓰고 유하현 추가가에 자리를 잡고 1년 동안 경학사 (판독불가) 청년들로 하여금 농병제(農兵制)의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특히 만주사변 직후 대련감옥에서 옥사한 선생의 계씨 회영(會榮) 씨를 비롯하여 선생의 아드님인 규봉(圭鳳. 시내 낙원정에 사는) 그리고 그 부인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한 가족은 내 한 몸의 고생을 돌보지 않고 피와 땀을 바쳤다. 이같이 조국을 사랑하는 청년들의 교육받은 학교라 일본관헌의 탄압은 날로 심해갔다. 여기서 선생과 동지들은 통화현에 세운 이 학교를 신흥강습소라는 표면 간판을 붙이고 안으로는 열렬히 애국사상과 배일운동과 자주독립운동에 밤낮 가리지 않고 기한과 곤궁에서 싸워 왔다. 이 학교에는 500여 명의 뜻있는 청년학도가 모여들었다. 현재 광복조국 (판독불가) 김동삼(金東三), 김창환(金昌煥) 씨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이같이 청년운동과 애국운동을 거듭하는 동안 다시금 악착무도한 일본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생과 계씨 회영 씨는 북방 노령 땅으로 쫓기게 되고 말았다.

그 후 회영 씨는 다시 큰일을 일으킬 피끓는 뜻을 품고 국내로 돌아와 3년 동안 잠복해 있다가 마침내 종로서에 검거되어 갖은 고생을 겪는 동안 동지들의 이 큰일을 갖추기 위해 손가락을 끊어 필경 대신 혈서로 드나드는 동지와 서신 왕래를 하여 마침내 증거 불충분으로 무사히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일찍이 국내정세는 차츰차츰 날로 피폐해가고 태황제는 변을 당해 돌아가시고 연이어 3.1운동 등 중대 사건은 뒤를 이어 속발하게 되었다. 만세사건 후 뜻있는 이들은 (판독불가) 허리춤에 감추어 가지고 북경으로 들어갔다. 이 적은 돈은 새로 선 임시정부의 유지비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감격한 이야기였다.

이러한 해내해외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 우리 민족의 피로 세워진 임시정부는 드디어 조각(組閣)을 보고 본격적인 정치무대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때 대통령에 이승만(李承晩) 박사, 국무총장에 이동휘(李東輝) 씨, 내무총장에 이동녕 씨였는데 임시정부 초기 재정적으로 가장 곤란한 시절에 선생은 재무총장의 중대한 역할을 맡아 임시정부의 원대한 계획의 운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에는 이같이 민족을 위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와 땀을 바친 혁명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선생은 70의 노령으로 (판독불가) 극동으로 관동에서 상해로 이렇게 몸을 옮기며 의혈의 분투을 거듭하였다.

이 대목에서 기억되는 것은 김구 선생 휘하의 윤봉길(尹奉吉) 씨가 백천(白川) 대장을 폭살한 통쾌한 사건이 일어난 사실이다. 이 사건은 중국 ㅁㅁ를 벌컥 떠업듯이 윤의사의 쾌사는 찬탄을 자아냈다. 상해를 떠난 임시정부는 중경에 자리를 잡고 주석 김구 선생의 지휘 아래 맹렬한 활동을 오늘까지 전개하여 왔는데 선생은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해방된 오늘까지 수십 년간 중요한 자리를 맡아 일하는 한편 민족을 위하여는 한 몸을 초개같이 던졌다.

선생은 광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동지 몇 사람들과 이삼십여 리 길을 도보로 도주하였다가 빙판에서 넘어져 척추를 다쳐 (판독불가) 너무 유명하다. 신흥학교를 세우고 500여 명의 학도를 가르칠때 땔나무가 없어 냉방에서 밤을 지샜고 옷이 없어 북만주 눈보라 속에서도 찢어진 홑겹옷으로 견디고 참았다. 학도들과 동지들도 나라와 동포의 일이라면 어떠한 고생이나 이를 악물고 참고 고통을 견디었다.

선생은 6형제를 가졌다. 모두가 같은 뜻을품고 활약하다가 객사를 하였고 선생 한 사람만이 지금 생존하였는데 계씨 회영 씨는 만주사변 직후 만주 일대에서 큰일을 꾸미려고 대련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다가 부두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혀 대련감옥에 투옥되었다. 씨는 자기 한 몸 잡히고 고생하는 것은 좋으나 자기로 하여 동지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되고 비밀이 탄로되어서는 안될 (판독불가) 형제분을 가졌다. 뿐만이랴! 그저께 규봉 씨의 부인께서는 신흥학교 건설시에 눈보라 치는 겨울에 홑옷을 입고 짚세기에 맨발을 벗은 채, 학도들의 조석을 손수 지어주었다. 이같이 선생 일족은 누구나 빼놓을 이 없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조국해방을 위하여 싸워 온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의술이 능한 것이 유명하다. 빈한한 동포들이 병들면 손수 고쳐주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분이나 의(義)를 위하여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다. 지금 임시정부 각료 중 가장 노령의 분이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대범하고도 자상한 성격은 일반의 존경과 친애를 한 몸에 모으고 있다.

이같이 젊은 시절은 혁명운동에 온전히 바치고 백발이 성성하여 오매불망하던 고국 진흙을 밟게 되니 선생의 감 (판독불가) (<중앙신문> 194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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