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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이 벌인 ‘쩐의 전쟁’, 일본에 가담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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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종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월 11일 ‘조선이 망한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 때문이 아니다’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처럼 일본은 전쟁을 통해 조선을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사회 구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조선을 무너뜨리다 보니, 일본은 친일파들의 협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제 침략 과정에서 군대나 전쟁이 전혀 동원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동학혁명 때는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94년에는 그 병력으로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몰아냈다. 이 2건의 출병도 크게 보면 침략전쟁으로 볼 여지가 있다. 또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서울 용산에 일본군이 주둔해 일본의 강압 외교에 힘이 실리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쩐의 전쟁’도 일으켰다. 금융침략의 방법도 구사한 것이다. 군인과 무기만 있다고 전쟁이 되는 게 아니라 군인과 무기를 움직일 돈이 있어야 전쟁이 가능하다는 당연한 이치를 생각하면 일제가 수행한 ‘쩐의 전쟁’은 1882년·1894년 출병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위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대보다 위력적인 돈

일제의 금융침략은 금의 반출로도 일어났다. 청나라 및 중화민국의 세관 통계인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조선부록’ 편은 1885~1893년 9개년 동안에 발생한 조선 무역적자인 1699만 1573멕시코달러의 48.4%에 해당하는 금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밀반출됐다고 말한다. 조선 세관 통계가 <중국 구해관 사료> 부록이 된 것은 1882~1894년에 조선이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은 결과이고, 무역 통계가 멕시코달러로 집계된 것은 당시의 세계 관행이 그랬기 때문이다.

조선 금이 밀반출되는 상황은 조선총세무사를 맡은 영국인 모건(F.A. Morgan)이 작성한 ‘1892년도 조선의 대외무역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유출된 금은 1897년에 일본이 금본위제를 선언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빼내 간 금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적응할 국부를 마련했다.

일본의 금융침략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전개됐다. 친일파 김종한(1844~1932) 등의 보조하에 일본 금융기관의 영향력이 확장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몰래 금을 반출하는 방식 외에 일본 금융의 힘을 팽창시키는 방법으로 ‘쩐의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일제 금융침략을 도운 친일파 김종한은 재일 사학자인 강동진 전 쓰쿠바대학 교수가 1985년 8월 15일 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한·일 80년’이라는 글에도 언급됐다. 이 기고문은 경의선 부설권을 러시아로부터 빼앗고자 일본이 조선의 환심을 사려고 제공한 차관이 공립 한성은행에 사용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본금이 25만 엔이고, 중개료 5만 엔이 이재완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고 한 뒤 “은행장에 이재완, 부은행장에 김종한(전 궁내대신), 총무에 이완용의 생질이며 일제 말기까지 식민지 예속 자본가의 대표적 존재였던 친일파 한상룡이 앉았다”고 설명한다.

한성은행의 실세는 고종의 사촌동생인 이재완이 아니라 부행장인 김종한이었다. 1993년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1권에 실린 장석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김종한: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한 매판자본의 선두 주자’는 “이재완이 은행장에 취임한 것은 왕족에 대한 예우였고, 개편 뒤에도 한성은행의 실질적 책임자는 김종한이었다”라고 말한다.

한성은행은 공립으로 전환되기 6년 전인 1897년 2월 19일 설립됐다. 이 설립을 주도한 인물도 김종한이다. 1943년에 조흥은행이 되고 2006년에 신한은행이 될 한성은행은 1903년 공립화 이전과 이후 모두 김종한의 주도로 운영됐다.

▲ 한성은행 주권(1911년). 한국금융사박물관(광화문). 촬영 이충원 ⓒ 연합뉴스

하지만, 공립화 이후에 최고의 수혜를 누린 것은 김종한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는 최대 수혜자가 일본이었다. <친일파 99인>은 “차관 조건으로 일본 제일은행은 일본인 한 명을 한성은행의 심사원으로 파견하여 업무 일체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로써 한성은행은 일제 금융자본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일본 금융자본이 한국에 부식되는 데에 김종한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김종한은 일본 축산업의 조선 진출에도 앞장섰다. 윗글은 “강화도에 250만 평 규모의 한우목장을 차린 일본인 모로와 함께 조선축산장려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는 등 일본 침략자본과 결탁함으로써 매판자본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김종한은 정조의 증손인 헌종 임금 때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풍양 조씨와 경쟁하면서 왕실과 다름없는 권세를 행사한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김경진이 그의 양아버지이고,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이 그의 외사촌이었다. 32세 때인 1876년에 문과 과거시험을 통과한 그는 승정원 승지, 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두 명의 김종한이 등장한다. 이 글의 주인공인 김종한(金宗漢)이 있고, 시인 김종한(金鐘漢)이 있다. 시인 김종한은 1914년생이다.

매판자본가 김종한은 한성은행을 세우기 6개월 전인 1896년 2월에는 조선은행을 설립했다. 은행을 설립하기 전에는 고리대금업도 겸했다. 여기서 축적된 자본으로 전(錢) 교환소를 차리고 이를 서구식 은행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그의 겸업은 농업 지주나 고리대금업을 겸했던 양반 관료들이 상업이나 공업 자본가를 겸하는 쪽으로 전환되는 과도기 양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외교는 이완용, 금융은 김종한

김종한의 친일은 일제 금융침략을 보조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친일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4권에 적시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에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한 신사회에서 환영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위 결정문은 “(1908년) 12월에는 일본인과 함께 한일정당회를 조직”했고 “(1909년) 7월에는 한국의 단군과 태조 및 일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함께 제사 지내기 위한 신궁봉경회 고문을 지냈다”라고 말한다. 한·일의 금융 통합뿐 아니라 종교·신앙의 통합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결정문은 “1910년에는 한일 친선이라는 명목으로 조직된 정우회에서 총재를 역임”했다고 말한다.

<친일파 99인>은 “이완용의 지원을 받아 1909년 12월 국민연설회란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송병준·이용구 등의 일진회와 나라 팔아먹는 일에 경쟁하는 등 추악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라고 설명한다. 이런 “추악한 작태”에 힘입어 1910년에 남작 작위를 받고 1911년에 2만 5000원의 은사공채를 받고 1912년에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5월까지 친일파 최양호가 강원도 영월군수로 부역하면서 받은 월급은 50원이었다. 김종한이 상금으로 받은 은사공채 2만 5000원은 그 500배였다.

그가 일제로부터 받은 물질적 혜택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1929년에 조선 귀족들을 돕기 위해 세워진 재단법인 창복회로부터 200원을 받은 일도 있다. 1905년에 제일은행을 끌어들여 한성은행을 공립으로 전환한 이후로 일본 자본에 예속돼 돈을 벌었으니, 매판자본으로 변신한 1905년 이후의 소득도 엄밀히 말하면 친일 재산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전면전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출병이나 군대 주둔 등을 통해 조선을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이 같은 군사적 카드와 함께 구사된 것이 금융 침탈이다. 금을 밀반출해 조선의 국부를 감소시키는 동시에 조선 금융을 자국에 예속시키는 방법을 함께 동원했다. 이런 ‘쩐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의 군대 동원에 필요한 자금줄을 묶는 효과를 거뒀다. 그런 뒤 강압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멸망시켰다.

일제가 벌인 쩐의 전쟁에 ‘참전’한 인물이 친일파 김종한이다. 그는 조선 금융의 ‘성문’을 활짝 열어 일본 금융자본이 침투하도록 도왔다. 금융 방식으로 일본을 도운 김종한, 외교 방식으로 일본을 도운 이완용 등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은 굳이 총·대포를 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과정을 보고 정진석 위원장 같은 인물들은 ‘조선은 일제 침략전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능·무지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종성 기자

<2022-11-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이 벌인 ‘쩐의 전쟁’, 일본에 가담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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