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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청년의 혼을 불러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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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회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개최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가 10일 오후 서울 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청년의 혼을 불러일으키자!”

‘비운의 독립투사’, ‘남과 북으로부터 망각된 항일운동가’로 불리는 약산 김원봉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가 10일 오후 서울 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김언호 창립준비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청년의 혼을 불러일키자”고 호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총회에 앞서 김언호 창립준비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이같이 ‘청년의 혼’을 강조하고는 “김원봉뿐만 아니라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함께 받들어 모실 수 있는 조직, 기념사업회에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하고 (이를 통해)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회, 국가, 민족의 지향을 만들어 내는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격려하고 뒷받침 하는 조직이 되기를 바란다”고 취지를 밝혔다.

김 창립준비위원장은 “김원봉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너무 늦었고 이는 우리 모두의 불찰이라 생각한다”는 통탄과 함께 “그래도 각계 인사들이 모여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게 돼 설레며 어느 사업회보다 중요하고 빛나는 일들을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며 소회와 기대를 밝히기도 했다.

송기인 신부는 축사에서 “김원봉만 기릴 게 아니라 노덕술 같은 사람들의 전기를 써야 한다”며 은유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이어서 송기인 신부는 축사에서 박의영 목사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과 기념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박의영 목사는 김원봉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차정의 조카로 집안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는 데 평생을 바치며 박차정, 박문희, 박문호 선생의 독립유공 서훈을 이끌었다. 다발골수종(골수암)으로 투병하다 2020년 3월 향년 74세로 별세했다.

송 신부는 “김원봉만 기릴 게 아니라 노덕술 같은 사람들의 전기를 써야 한다”고 말하며 “나쁜 역사를 확실히 알아야 좋은 역사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발언 취지를 부연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경과보고,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의 김원봉 선생 약력보고 후 약산의 연설 모습이 담긴 영상이 방영됐다.

3인의 대표들이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경환 공동대표, 김언호 상임대표, 서중석 공동대표.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이어, 김언호 창립준비위원장의 사회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기념사업회의 출범을 알리는 ‘정관(안) 심의와 의결’, ‘임원·집행부 선임’, ‘사업계획(안) 심의와 의결’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임원·집행부 선임’에서는 앞서 발기인대회에서 추천한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상임대표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공동대표로, 장완익 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감사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을 집행위원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들의 힘과 자발적 참여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앞으로 △김원봉 독립운동과 사상에 대한 학술연구 사업 △김원봉 독립정신을 구현하는 기획‧홍보 사업 △민주사회 건설과 평화통일을 위한 사업 △김원봉 서훈 추진 등 기념사업을 적극 이어갈 계획이다.

아울러, 내년 첫 사업으로 ‘조선혁명선언’ 발표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역사기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창립선언문을 함께 낭독하고 있는 김설송(국민대 대학원)양과 최휘주(동국대)군.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참가자들은 김설송(국민대 대학원)양과 최휘주(동국대)군이 공동으로 낭독한 창립선언문을 통해 오늘 ‘김원봉과 함께’를 외치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남북이 증오와 대립의 시대를 넘어 평화공존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민족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라도 선생을 더 제대로 기억하고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다시 살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참가자들은 약산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려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선생이 꿈꾸었던 민족혁명의 정신을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공존과 민족통합의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라면서 “오직 민족을 위한 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했던 선생의 삶이 올바로 재평가되어 ‘밀양 사람’ 김원봉이 아니라 ‘한민족’의 김원봉으로 기억될 수 있을 때까지 ‘김원봉과 함께’는 선생과 함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안영민 ‘평화의 길’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에는 발기인 등 100여명이 참가해 ‘약산 김원봉과 함께’의 출범을 축하했다.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이날 안영민 ‘평화의 길’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는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최초로 발기한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 함세웅 신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등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김원봉 장군과 조선의용대 그리고 광복군이 애창했던 독립군가 감상을 끝으로 폐회했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나 지난달 25일 타계한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의 뜻을 받들어 유족들이 기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해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사회, 학계, 출판계, 종교계를 망라한 원로인사를 포함한 6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지난 5월 16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10월 27일 발기인대회를 마쳤고 103년 전인 1919년 의열단 창립일인 이날 창립총회를 거쳐 정식 출범했다.

젊은 날의 약산.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사회, 학계, 출판계, 종교계를 망라한 원로인사를 포함한 6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지난 5월 16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10월 27일 발기인대회를 마쳤고 103년 전인 1919년 의열단 창립일인 이날 창립총회를 거쳐 정식 출범했다.

한편, 약산은 일제강점기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의열단을 조직한 뒤, 조선의용대 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비타협적 투쟁을 온몸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광복 후에는 ‘신조선 건설’을 위해 앞장선 혁명가로 백범 김구와 쌍벽을 이룬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고착화하면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의 꿈은 좌절되고 분단이라는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김원봉은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에서 쫓겨나듯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에까지 올랐으나 결국은 숙청당해 ‘김원봉’이라는 이름 석 자는 남북 양쪽에서 금기어가 되고 말았다.

창립총회 후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약산 김원봉과 함께’]

이계환 기자/최범준 통신원 tongil@tongilnews.com

<2022-11-11> 통일뉴스

☞기사원문: “청년의 혼을 불러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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