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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언론인의 변절, 역사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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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장지연

▲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 황성신문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에 대한 한국인들의 울분을 대변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이날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의 장본인이 1910년 국권침탈 뒤에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친일을 했다. 그것도 자신의 주특기인 글쓰기를 통해 일제 식민지배를 적극 찬양했다. 당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를 사는 우리들까지 배신감을 느끼게 할 만한 행적을 남긴 것이다.

장지연은 을사늑약 3일 뒤인 1905년 11월 20일 게재된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우리 2천만 동포여,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며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레 멸망해 그칠 것인가”라고 한 뒤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라고 썼다.

그랬던 사람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1916년 9월 16일자 1면에 “일본이 실로 동양의 패왕”이라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을사늑약으로 ‘남의 노예’가 됐다고 울부짖은 사람이 패왕인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 평화를 만들자는 정반대 논설을 써냈던 것이다. 장지연의 글을 항일 논설의 모범 사례로 가르치는 훗날의 대한민국 역사교육을 무색게 하는 장면이다.

1864년에 경상도 상주에서 출생한 장지연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성리학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1997년에 <전북사학> 제19·20합집에 수록된 최기성 전북대 교수의 논문 ‘위암 장지연의 시대인식 연구’는 장지연의 집안이 저명한 성리학자 가문이었다면서, 그가 서당 입학 이전에 천자문을 암송하고 15세에 주요 경서들을 섭렵하고 20세 전후에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일들을 소개한다.

장지연은 그런 실력을 바탕으로 관료의 길을 걷고자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21세 때인 1885년에 소과(제1단계 시험)의 제1차 시험인 초시에 급제했고, 30세 때인 1894년에 소과에 최종 급제해 진사 자격을 인정받았다.

장지연의 능력을 탐낸 일본

▲ 장지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97년부터 약 1년간 공직을 담당했지만, 그가 공직자보다 논객에 더 어울린다는 점이 1895년부터 명확해졌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격분해 일어난 을미의병 때 격문을 작성했고,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긴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는 고종의 환궁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작성했다. 고종이 환궁한 뒤인 1897년에는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결국 그는 관직이 아닌 언론으로 방향을 잡게 됐다. 1898년에 <대한황성신문>과 <황성신문>에 참여했고, 이듬해에는 <시사총보> 주필에 이어 <황성신문> 주필을 맡았다. 1900년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로 잠시 이적했다가 1901년에 <황성신문>으로 복귀한 그는 이듬해에는 <황성신문> 사장직까지 맡게 됐다. 언론계 진출 몇 년 만에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 뒤에 나온 것이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이다.

한국을 강점한 이후의 일본제국주의는 장지연의 그 같은 능력을 탐냈다. 일본에 저항하는 논설을 썼던 그의 능력을 역이용해 그를 식민지배 선전에 앞장세우고자 했다. <매일신보>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인 것은 그 때문이다.

1910년 강점 이후의 <매일신보>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역점을 기울였다. 한국인들의 의식 구조를 일본 지배에 유리한 상태로 바꾸는 일에 분주했고 이런 일에 장지연을 끌어들인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장지연 편은 50세 때인 1914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해 음력 10월경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다고 소개한다. 이때 장지연은 <매일신보>는 거짓이 많다고 비판하면서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23일자 <매일신보> 사고(社告)에는 그가 객경(客卿)이라는 이름의 객원위원으로 초빙됐음을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장지연의 <매일신보> 입사는 엄밀히 말하면 장지연이 먼저 ‘싸인’을 보낸 결과였다. 그는 <경남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시기에 <매일신보>에 축시를 보낸 일이 있었다. 매일신보사가 윤전기를 증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1913년 7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축시를 기고한 것이다. 그는 “매일신보도 윤전기처럼 영원히 돌고 돌아 무궁하여라”라고 찬미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인해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으로 부각된 장지연이 자신이 속한 신문사도 아닌 총독부 기관지의 윤전기 증설을 축하하며 무궁한 번영을 기원했다. <매일신보>의 스카웃 제의가 아니었어도, 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발적 친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 힘들게 만드는 장면이다.

일본 지배 열렬히 칭송

장지연이 상당히 후한 대우를 받고 <매일신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는 사실관계들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매일신보사는 조선의 문사로 알려진 장지연을 영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라면서 <경성일보> 사장인 아베 미쓰이에와 <매일신보> 편집국장인 방태영이 영입 작전에 동원됐다고 설명한다. <매일신보> 자매지인 <경성일보>까지 장지연 스카웃에 가담했던 것이다.

또 1915년 3월 14일자 <매일신보> ‘기창만필’에 따르면, 장지연은 자신이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를 저버릴 수 없어 합류하게 됐다고 밝혔다. ‘배불리 먹고 따스한 옷’이라는 표현에서 <매일신보> 측이 꽤 후한 조건을 제시했음을 느낄 수 있다.

장지연은 1918년 12월까지의 4년 동안에 700편 이상의 글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글을 보낸 셈이다. <매일신보>가 제시한 후한 조건이 이런 열성을 추동케 했을 수도 있다.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장지연은 ‘남의 노예’가 된 사실을 비통해했다. 그런 그가 <매일신보>의 후한 대우를 기초로 친일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살아나갔던 것이다.

장지연 본인도 <매일신보>의 일원이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위암 선생 자필수기’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입사한 것은 아베 미쓰이에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아베가 <경성일보> 사장을 그만두면 나도 <매일신보>를 그만둔다’는 조건을 제시했노라고 밝혔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이런 조건이라도 꺼내지 않고서는 <매일신보>에 들어가기가 어색했던 듯하다.

그는 <매일신보>에 들어가는 과정에서는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그 일원이 된 뒤에는 ‘시일야방성대곡’ 못지않은 글들을 쏟아냈다. <친일인명사전>에 열거된 그의 <매일신보> 논설이나 시를 살펴보면, 1905년 11월에 일본을 비판했던 그 열정으로 1914년 12월 이후에 일본 지배를 열렬히 칭송했음을 알 수 있다.

1915년 12월 26일자 ‘송재만필’에서 그는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합리화하면서 한국인들의 단체성 결여를 거론했다. 그는 한국인들을 “단체성 없는 인종”으로 비하하면서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라고 썼다.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글을 쓰면서 ‘시일야방성대곡’을 연상케 하는 문구를 썼던 것이다.

그달 15일자 글에서는 5년간의 식민통치로 한국인들의 삶이 개선됐다면서 ‘지금의 성적에 만족하지 말 것’을 총독부에 촉구했다. “위에 있는 이는 목하의 성적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독칙하며 장려와 지도와 계발에 여력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총독부의 분발을 강조했다.

자발적 친일의 전형적 사례

▲ 장지연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협조를 부추기는 논조로 일관된 사실이 2000년대 이후 드러나게 되면서 2011년 4월 6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묘소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이 해제되었다. ⓒ 문화재청

그는 일본이 한국인들을 잘살게 해준다는 논리를 유포했을 뿐 아니라, 한국인과 일본인을 하나로 엮는 은근한 글도 써냈다. 일왕이 침몰한 일본 군함을 위로하거나 일본인 수재민들을 위로한 사실을 소개하는 글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일왕의 은혜에 감동했다는 식의 시를 썼다. 일왕이 일본인들에게 베푼 시혜를 두고 그런 글을 썼던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히 뻔뻔하게 일제 지배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점은 1916년에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찬양하는 시를 쓴 데서도 나타난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주한일본군사령관인 한국주차군사령관을 지낸 하세가와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을사늑약을 강요한 장본인이다. 하세가와가 가담한 을사늑약 때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사람이 하세가와를 찬양하는 시에서 “원래 낯이 익으니”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하세가와의 부임을 찬양했다.

장지연은 하세가와의 취임이 한겨울 매화도 기뻐 웃게 만들 일이라고 썼다. 최소한의 지조마저 상실한 채 친일에 매진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다’라며 친일파들을 변호한다. 하지만 장지연 등의 사례는 친일이 결코 부득이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매일신보>의 입사 권유는 그의 신변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를 섭외한 아베가 <경성일보>를 그만두면 자신도 <매일신보>를 그만두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는 장지연의 회고는 그 입사 권유가 위협이나 협박을 동반한 게 아니라 성의와 진심을 보여주려 애쓰는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거기다가 <경남일보> 기자 시절에 “매일신보도 윤전기처럼 영원히 돌고 돌아 무궁하여라”라는 시를 보낸 것은 유혹의 주체가 <매일신보>가 아니라 장지연이었다는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장지연은 자발적 친일의 전형적 사례로 거론될 만한 인물이다.

<2022-11-2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언론인의 변절, 역사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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