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지난봄 윤 대통령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말했나

399

[김종성의 히,스토리] 제주 4·3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면

▲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에 진열된 한국사 참고서. 2020.1.12 ⓒ 연합뉴스

교육부가 입법예고한 ‘2022년 개정 교육과정’이 제주 4·3을 필수 학습이 아닌 선택 학습 대상으로 만든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이 제주 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4·3평화재단, 4·3유족회, 교원단체, 역사교사모임 등의 의견을 수렴해 29일 교육부에 제출할 입장 표명을 준비 중이라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에 교육부가 고시한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제주 4·3이 필수 학습 대상인 ‘학습 요소’로 지정됐다. 일례로, <고등학교 교육과정 1>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에서 1945년 8·15해방에서 1948년 정부수립 사이의 주요 사건들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찬·반탁, 미소공동위원회, 좌우합작운동, 제주 4·3사건, 5·10 총선거, 제헌헌법, 대한민국 수립”을 나열하고 이런 사건들을 ‘학습 요소’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번에 입법예고된 개정 교육과정에는 4·3을 반드시 가르쳐야 할 근거가 들어 있지 않다. 4·3에 대한 교과서 기술이 출판사들의 재량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제주 4·3평화공원에서 거행된 제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4·3에 대한 기억을 거론했다.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입니다”라고 말했다.

▲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 74회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당선인이 추념사를 하고 있다. 2022.4.3 ⓒ 인수위사진취재단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은 역사교육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4·3을 기억하며 그 아픔을 치유하고 돌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윤 당선인의 언급은 4·3의 집단 기억을 위한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윤 당선인은 4·3을 자신이 가장 강조하는 ‘자유’ 이념과도 연결했다. “여러분, 무고한 희생자들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고 아픔을 나누는 일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런 뒤 “이곳 제주 4·3 평화공원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널리 퍼져나가 세계와 만날 수 있도록 새 정부에서도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박근혜 정부의 2015년 개정 교육과정보다 후퇴하는 2022년 개정 교육과정 입법예고를 내놓은 지금의 모습과 대비되는 다짐이다.

제주 4.3이 중요한 이유

1945년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가 1948년 분단정부 수립을 향해 자연스럽게 이행한 것은 아니다. 분단을 거부하는 격렬한 저항이 그 과정에 있었다. 분단정부 수립은 그런 저항을 억누른 뒤에 있었다. 그 저항의 대표가 바로 4·3이다. 이는 해방정국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 4·3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4·3같은 저항운동이 나온 것은 분단이 정상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단이 비정상이라는 점은 역대 대한민국 헌법 속의 통일 관련 조항들에서도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1948년 헌법 등),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하여”(1972년 유신 헌법)처럼 분단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관점이 헌법에 생기는 데 기여한 것도 해방공간에서 표출된 통일의 의지다. 해방공간의 한국인들이 분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면, 그 이후의 분단정부들이 형식적으로나마 통일 의지를 피력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흔히 백범 김구의 방북이나 남북협상이 해방공간의 통일 의지를 표상하는 한 장면으로 거론되지만, 이보다 훨씬 강력한 방식으로 의지를 분출한 것은 제주 4·3항쟁이었다.

이 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어린이를 다치게 해놓고도 모른 척한 기마경찰의 태도에서 촉발됐다. 도민들의 항의에 대해 경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국가범죄 혹은 국가폭력에 맞서는 집단 저항이 이 사건의 출발점이다.

이 사건이 장기간의 대규모 항쟁으로 승화된 것은 당시의 핵심 이슈들과 접목됐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의 최대 쟁점인 분단 및 통일 이슈와 만난 것은 이 사건이 정치적·민족적 성격을 갖도록 만들었다.

1948년 2월 28일 유엔총회는 38도선 이남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를 내놓았다.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이 결의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4·3을 항쟁으로 승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그해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350명의 제주도민들이 경찰지서 열두 곳과 서북청년단 숙소 등을 기습해 4·3을 절정에 달하게 만든 것은 1년 전 3·1절 사건에 대한 분노에도 기인했지만 무엇보다 분단 거부와 통일을 향한 열망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인들이 통일을 열망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4·3처럼 강력한 방식으로 통일을 부르짖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4·3이 해방공간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통일을 원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도 긴요함을 보여준다.

4·3은 세계사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가 미·소 냉전구도로 재편되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이 그리스 내전과 더불어 제주 4·3이다.

제2차 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은 그리스에서는 해방 뒤 좌우 대립이 발생해 1946년부터 내전으로 치달았다. 이 내전은 국제분쟁으로 비화됐다. 미국과 영국이 그리스 정부군을 지원하고 불가리아·유고·알바니아 공산당이 그리스 민주군을 지원했다. 좌우 간의 이 충돌은 미국이 세계 냉전질서를 정당화하는 데도 활용했다. 미국이 1947년 3월 12일 냉전 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을 내놓은 것은 바로 이 내전 때문이었다.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은 같은 시기에 발생했을 뿐 아니라 동일한 양상으로도 전개됐다. 미국이 냉전을 공고히 하는 데 활용했다는 점도 같았다.

5·10 총선 당일에 발행된 1948년 5월 10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미국 UP통신(훗날의 UPI 통신) 서울특파원 제임스 로퍼는 본사에 송고한 기사에서 “조선은 희랍 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라며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을 동일선상에서 파악했다. 제주 4·3과 그리스 내전이 현대 세계사에 끼친 동일한 영향을 담은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청소년들이 세계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제주 4·3이 실마리가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냉전 같은 불행한 세계질서에 휘말려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교훈도 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4·3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둘이 아니다.

▲ 제주4.3평화공원의 행방 불명인 표석 ⓒ 제주다크투어

국가범죄에 관한 보수정권의 태도

4·3은 윤석열 정부를 포함한 역대 보수정권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결정적 요인에 대한 힌트도 제공한다. 1948년 당시 제주 인구 25만 중에서 1만 4천(정부 발표) 혹은 3만 명이 군·경과 극우 청년단에 의해 희생됐다. 분단 거부를 표방한 소수의 저항군을 훨씬 상회하는 수많은 국민이 국가폭력 혹은 국가범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달라지고 있지만, 보수정권들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범죄를 인정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국민들의 범죄는 쉽게 인정하면서 국가의 범죄는 얼른 인정하지 못한다. 국가권력의 책임 방기로 피해가 더욱 커진 각종 참사에 대한 대응에서도 그런 태도가 나타난다.

제주 4·3에서 나타난 분단 거부 및 통일의 열망과 더불어, 국가권력이 저지른 일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범죄를 가벼이 다뤄온 종전의 폐습을 추방하는 데도 유용하다. 4·3은 보다 건전하고 올바른 국가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지난 4월 3일 제주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오늘 보니 제주 곳곳에 붉은 동백꽃이 만개했습니다. 완연한 봄입니다”라며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슴에도 따뜻한 봄이 피어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로 4·3 진상규명 및 해결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4·3 학습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격하되도록 만드는 것은 제주에서 동백꽃이 만개하도록 하겠다는 그날의 약속과 배치된다.

<2022-11-2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지난봄 윤 대통령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말했나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김종성의 히,스토리


NO COMMENTS